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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호/특집/제 5회 김구용문학제/천선자/탈박각시나방, 도시의 원숭이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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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시
천선자
탈박각시나방, 도시의 원숭이 외 5편
폐교로 만든 곤충박물관 긴 복도를 따라 놓인 유리 상자 안에 집을 짓고 있는 왕거미, 교미를 끝내고 수놈을 잡아먹는 암사마귀, 먹이를 먹는 장수하늘소, 딱정벌레, 광대노린재를 지나 여러 나라의 나비와 나방이 전시된 이학년 오반 교실로 들어간다. 지중해 바닷빛의 날개를 가진 열대우림에 사는 모르포 나비 뒤의 나방, 뒷목덜미에 그려진 원숭이의 얼굴, 뚫어져라 쳐다보는 우수에 젖은 눈빛, 축 져진 어깨, 낯익은 얼굴은 거울 속 나의 얼굴, 밤마다 깡술로 비굴함을 삼키고, 도둑고양이 걸음으로 걷는 도시 뒤에 몸을 숨긴 탈을 쓴 원숭이, 눈물이 없는 원숭이, 생의 부패한 조각들을 파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뱃가죽을 허리춤에 차고, 우리 속에서 내장도 쓸개도 빼주고 사는 원숭이, 아름다운 도시의 원숭이.
둥글려보면
미움도 둥글려보면 모나지 않는다. 저기 좀 봐. 미움을 먹고 잘 자란 내 키가 담장을 넘고 있잖아. 둥근 세상 밖. 둥근 비행접시를 타고, 둥근 꿈속에서 본 둥근 별을 찾아서 둥글게 떠나. 둥근 달을 좀 봐. 둥근 토끼가 둥근 쪽문을 열어 둥근 머리를 내밀고 둥글게 반기네. 둥근 웃음이야. 수많은 둥근 별을 지나 둥근 우주정거장에 둥글게 착륙해. 둥근 세발자전거를 타던 둥근 귀를 가진 아이들이 둥근 무지개나무를 심어. 벌써 둥근 열매가 익어. 어른들의 둥근 마음을 찾아주려고 둥근 어린왕자를 데리고 둥근 지구로 돌아와. 둥근 놀이동산에서 둥근 회전목마를 타고, 둥근 컵을 타고 둥근 축구를 하다 둥근 농구를 해. 종일 둥글게 노는 아이들의 둥근 눈동자가 둥근 나무에 열리는 둥근 지구의 한 가운데, 둥근 자동차들이 둥근 얼굴의 사람들을 태우고, 둥근 광장을 돌아오잖아. 둥근 빌딩의 둥근 창문을 열고, 둥근 웃음을 지으며 둥글게 몸을 말아 가슴이 따스한 사람들 속의 나.
집착
넌 사랑과 연민, 그 중간 어디쯤에서 길을 잃은 거야. 기억의 조각들 끊임없이 뇌리 속을 헤집고 다니는 문턱, 밤새 잠들지 못해 뒤척이는 뜰. 눈물의 뜰에 갇힌 문턱, 며칠 밤 자면 온다던 엄마의 목소리가 귀울음 하는 문턱, 너의 첫사랑이 떠나고 그 후 몇몇 여자들이 떠나간 문턱, 까치발을 하고 눈물콧물을 흘리며 너의 여자들을 기다리는 문턱, 닳아버린 문턱엔 어린 네가 살아가고 너의 여자들이 살아가지. 문턱은 세월의 수레바퀴를 멈추었고, 텅 빈 뜰에 켜켜이 쌓인 적막, 무성한 칡넝쿨이 기둥을 감고, 지붕을 감고, 내 온몸을 감아서, 너의 여자들이 살아가는 그 슬픈 문턱으로 데려가지.
태양의 신 ‘라’
꿈을 꾸는 목각인형이다.
사막고양이의 눈 속에서 모래바람이 인다.
사구를 짊어지고 걸어가는 굽은 등이 있다.
낙타가 없는 사막, 모래장화를 신고 간다.
건조한 두 눈을 비비며 하늘을 바라본다.
검은 띠를 형성한 수리 떼가 날아오른다.
사막의 하얀 밤이 맹수의 발톱으로 자라난다.
푸석이는 꿈 덩어리는 모래무지의 꿈일 뿐이다.
질긴 꿈 덩어리는 사막여우의 한 끼 식사일 뿐이다.
수없이 많은 물음표가 모래 위에 발자국을 남긴다.
매일 날개가 돋아나는 생각나무가 있다.
매일 몇 뼘씩 자라나는 생각나무가 있다.
매일 열꽃이 피어나는 생각나무가 있다.
몇 개의 심장을 가지고 태어나는 생각나무가 있다.
가느다란 수맥을 따라서 꿈눈이 움튼다.
꿈눈 속에는 협곡의 거친 숨소리가 남아있다.
사방으로 뻗어가는 양팔에는 꿈잎이 무성하다.
사방으로 뻗어가는 다리에는 꿈숲이 울창하다.
잠들지 못하는 머릿속에는 뿌리가 깊다.
무릎 위의 동그란 무늬 나이테가 선명하다.
촉촉한 구름의 눈빛이 타오른다.
오감을 자극하는 바람의 혀끝이 부드럽다.
빛을 잉태한 그림자의 젖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발등을 적시는 빗물 딱딱한 발등에서 피가 흐른다.
꽃대가 솟아오르는 자리,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린다.
작은 내 심장이 지구에 걸린 태양을 밀고 간다.
잠자리
서울광장에 설치된 대형 멀티비전은 잠자리이다.
휴일 저녁이면 가면을 쓴 사람들이 모여서 축제를 연다.
남루한 옷은 장롱 속에 깊숙이 숨겨두고 춤을 춘다.
의미 없는 이야기, 웃음 주고받으며 춤을 춘다.
어깨와 어깨를 맞대고 손과 손을 맞잡고 춤을 춘다.
최음제 가득한 병마개를 열고 춤을 춘다.
태울수록 더 뜨거워지는 열정을 토해내며 춤을 춘다.
눈동자의 물결이 출렁이면 내장의 어두운 벽이 환해진다.
잠자리눈이 촘촘하게 박힌 가슴에 가시 없는 등꽃이 핀다.
춤을 추던 사람들이 밀랍 인형이 되어 제자리로 간다.
공허한 광장 저 편, 북적대는 거리 익명의 사람들이 스쳐간다.
강렬한 색채의 도시적 이미지 정형화된 무명의 사람들.
공간의 한계 속에 회색빛 나무 되어 빌딩숲으로 사라지고,
삼백 육십도 눈동자를 굴리며 그들 속 너의 발자국을 쫓는다.
수상소감
하얀 똥 열심히 굴려 좋은 시 쓰겠습니다
오늘도 하늘에서 흰 똥이 내립니다. 하얀 똥이 몇 칠 내내 내립니다.
일기예보는 예보일 뿐, 주먹만큼 큰 흰 똥이 데굴데굴 굴러서 떨어집니다.
엉덩이가 큰 하나님이 누신 흰 똥, 마을이 흰 똥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가 빠진 호랑이가 흰 똥을 보고 놀라서 뒷산으로 도망을 갑니다.
배가 고픈 고라니가 텃밭까지 내려와 흰 똥 속에서 채소를 찾고 있습니다.
흰 똥에 질린 마을 사람들이 토끼 굴을 하나씩 파고 들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집토끼, 산토끼는 보이지 않고 토끼 발자국이 세상으로 가는 길을 알려줍니다.
바퀴가 달린 삽으로 한참을 치우고 돌아보면 그새 흰 똥이 넘치고 있습니다.
무거운 하루를 써레로 밀고 대빗자루로 쓸고 함지박에 담아 조금씩 치웁니다.
영하의 온도인데 땀이 비 오듯 쏟아지네요. 모자를 벗고 흘러내리는 땀을 닦습니다.
구멍 뚫린 장갑사이로 새끼손가락이 머리를 내밀고 춥다고 야단법석입니다.
지난여름 흐드러지게 핀 장미의 향기가 담긴 장독대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나뭇잎, 꽃잎의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던 작은 연못도 온통 흰 똥 천지입니다.
흰 똥에 묻힌 장독대를 쓸어내자 항아리에 그려진 미녀가 빙그레 웃고 있습니다.
하나 둘씩 흰 똥을 털고나온 미녀들의 웃음소리가 마당에 수북하게 쌓여갑니다.
썰매장를 찾은 도시의 아이들이 흰 똥을 뭉쳐서 던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은 추억 한 장을 만들어 선명하게 인화하고 있습니다.
강아지 나타샤은 흰 똥을 뒤집어쓰고 털이 젖었는데, 이리저리 뒹굴고 있습니다.
벽에 그려진 흰 당나귀는 엉덩이에 감시카메라를 달고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뮤지컬 캣츠의 여주인공처럼 생긴 미녀가 그림 속에서 나와 노래를 부릅니다.
렌즈 속 육각형의 흰 똥은 불꽃놀이를 하고 사람, 동물이 모두 춤을 춥니다.
누군가에게는 좋은 선물이 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지겹고 힘든 일이지만,
쌓여가는 흰 똥으로 세상의 온갖 만물이 잘 자라나려고 기지개를 펴고 있습니다.
하늘 아래 단 한 사람이라도 제 시를 보신다면 갓난아기 귀저기에 묻은 밤톨만큼 작은 흰 똥이라도 열심히 뭉쳐서 굴리고 만들어 보겠습니다.
심사평을 해주신 선생님과 장종권 선생님, 그리고 막비동인들께 감사드리고, 또 추운 날씨에 먼 곳까지 오셔서 축하해주시는 모든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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