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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호/특집/제 5회 김구용문학제/한용국/몸-아픔의 시학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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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국
몸-아픔의 시학을 위하여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도시를 좋아하는 유끼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내가 보기에 도시의 삶이란, 그저 맹목적으로 들끓는다고 밖에 말할 수 없었으니까요. 미친 듯이 서로에게 욕을 해대고, 미친 듯이 사랑을 하고, 미친 듯이 자기를 옳 다고 주장해야 하는 도시...어지럽게 변하 고, 어지럽게 거대해지는...그런 도시 말 입니다. 계획도 없고, 아량도 없는 공간, 내게는 그게 서울이었습니다.
이장욱, 「동경소년」,(고백의 제왕, 창작과 비평, 2010)중에서
시집 해설에서 “현대 도시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과 비애를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평가를 얻은 천선자의 시들에는 그 들끓음 속에서 살아가는 시인의 정념이 다양한 화법으로 활기차게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이 시집은 정념의 활달함에 지배당하지 않고 기원적 사유를 통해 주체의 시적 기원을 탐색함으로써 들끓는 현실과 대결하려는 의지와 결기가 드러나 있다. 필자는 이 시집에서 그러한 의지의 기원으로서의 힘은 무엇인가를 탐색해 보고자 한다. 우선 그것은 주로 나무 이미지를 통해서 드러난다.
복잡한 도로가에 목숨만 유지하고 있는 나무,
출근길에 물을 주고 거름을 줘도 잎이 마른다.
햇살 머금은 솔바람이 잔가지를 흔들어도 반응이 없다.
가랑비가 천천히 우듬지를 적셔도 생기가 없다.
뼈마디만 남아있는 나무에 칡넝쿨이 감고 올라간다.
숭숭한 털북숭이 줄기가 목을 감고 올라간다.
나무를 살리기 위해서 칡넝쿨을 자르고 뿌리를 캐낸다.
이튿날 아침, 나무가 스스로 물관을 끊어버렸다.
-「나무, 우울증」
시인은 도로가에서 근근히 숨을 버티는 나무를 본다. 그래서 출근길에 거름을 주거나 물을 주기도 해 본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칡넝쿨이 감고 올라가도 나무에게는 생기가 돌지 않는다. 그래서 나무를 살리기 위해 칡넝쿨을 자르고 뿌리를 캐내어 준다. 그래도 나무는 결국 죽어 버리고 만다. 표층적으로 생각하면 이러한 풍경은 도시에서 살면서 흔히 겪을 수 있는 풍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이튿날 아침, 나무가 스스로 물관을 끊어버렸다”고 씀으로서 반전을 보여준다. 칡넝쿨을 끊어내 줘서 나무의 물관이 끊어졌다는 것이 아니다. 나무가 스스로 물관을 끊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비극적 전언일까 아니면 어떤 인위에 대한 비판적 전언일까. 칡넝쿨은 그렇다면 무엇일까. 오히려 나무의 실존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었을까. 이것은 어쩌면 존재론적 위치의 역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역전적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힘은 어디에 있을까. 시인이 바라보는 나무의 ‘속’으로 들어가 본다.
네 속에는 차디찬 피가 흐르고 있어.
내 안에 흐르는 강조차 얼어붙게 해.
매끄러운 벽 속에 시린 가슴이 멍울멍울 열리네.
살얼음 조각들이 걸음마다 발끝을 아리게 해.
고뇌의 꼬리가 꼬리를 물며 심장을 아리게 해.
빙벽과 맞닿으면 비로소 강은 온기가 돌고 숨을 쉬지.
곰삭은 고통의 해일이 어둠 속에 투명한 길을 내네.
바위틈에 매달린 이끼는 푸릇푸릇한 아픔이지.
복잡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단순하지도 않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올곧은 오월의 길이지.
길 끝에 오니 강의 늑골에도 한 떨기 꽃이 피네
-「먼 길이었어」
그 나무의 속에는 “차디찬 피”가 흐른다. 그래서 시인의 속(내면)에 “흐르는 강조차 얼어붙게” 해서 “빙벽”을 만들어 낸다. 거기에는 “시린 가슴이 멍울멍울 열”려 있고, “살얼음 조각들이 걸음마다 발끝을 아리게”하는 위태로운 길이 펼쳐져 있다. 그것은 “고뇌의 꼬리가 꼬리를 물며 심장을 아리게”하는 길이다. 이 길이란 무엇인가. 시인의 나무의 속에 대한 사유와 자신의 속(내면)에 대한 사유가 중첩되는 길이다. 풀어서 말하면 시인은 나무의 속을 사유하면서 자신의 속을 등가적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체가 대상을 지배하고 통어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대상되기를 통해서 거꾸로 주체를 사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빙벽”과 맞닿아 온기가 돌고 숨을 쉬는 “강”을 볼 수 있게 되고, “고통의 해일”이 “어둠 속”에 내는 “투명한 길”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 길 끝에 와서 시인은 “강의 늑골에도 한 떨기 꽃이 피”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역전적 사유가 시집의 근저에 흐르는 시적 파토스의 힘이 아닐까. 시인은 이런 존재론적 역전을 통해 현대적 삶의 안과 밖을 두루 살피는 주체의 힘을 획득하고 있다.
바닥 면적까지 훤히 보일 수밖에 없는 나,
뜨거운 나, 물컹한 나, 딱딱한 나, 투명한 나,
겨울바람이 투명인간처럼 금을 긋고 지나간다.
상처는 보이지 않는데, 잘 정제된 아픔의 무덤들,
피라미드 속 황금관의 주인인 파라오의 무덤,
오랜 세월 부패하지 않은 사랑이 미라로 살아있다.
황금가면 속 부드러운 눈빛은 그대의 그대를 마주 보고,
열두 개의 기둥에 새겨진 의미들을 새로이 만들어간다.
벽화 속 상형문자들은 투명한 결정체로 반짝인다.
빛의 방향에 따라 조화롭게 배치된 면적의 합.
네 귀를 접었다가 펴도 잘 맞아 떨어지는 면적의 합.
한 여자의 사랑이 유물로 남을 수 있는 면적의 합.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길, 전설 속 파라오가 되어,
마음의 문 찾아 아득한 시간 정숙한 걸음으로 걸어간다.
-「수평투영면적」
‘한 여자의 사랑이 유물로 남을 수 있는 면적의 합’은 얼마나 될까? 고대 벽화를 앞에 두고 시인은 이 시에서 단순한 평면적이 아닌 “네 귀를 접었다가 펼”수 있는 마술적 평면적을 창조해 낸다. “잘 정제된 무덤”들이 있고, “오랜 세월 부패하지 않는 사랑이 미라”로 살아 있으며, “열두 개의 기둥에 새겨진 의미들”에 “황금가면 속 부드러운 눈빛”이 섞여 있는 삼차원적 공간을 창출해 내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 여자의 사랑이 유물로 남을 수 있는 면적”을 보면, 언뜻 보기에 시인은 그 면적 속에 갇혀 있는 존재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면적은 순간적이지만 영원의 시간인 아득한 시간을 품고 있다. “마음의 문”을 찾아 아득한 시간을 정숙한 걸음으로 걸어가는 시인은 영원히 그 속을 걷고 있는 게 아니다. 어쩌면 잠시 접었을 때 그 문은 열리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시인은 잠시 그 문을 통해 들끓는 세계를 본다. 그리고 다시 펼쳐졌을 때, 정숙한 걸음으로 걷는 자세를 보여준다. 그 “정숙한”의 의미는 무엇일까. 통념과는 다르지 않을까. “세상에 물들지 않고 순결한 자세를 유지한”이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자신과 세계에 대한 오랜 고뇌를 통해 자신만의 걸음을 걸을 수 있게 된 자세’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갱년기에 접어든 여자의 심정이란 더위를 먹고 사는 거대한 맹수야. 야생의 본능을 버리지 못하고 육식의 욕구로 채운 벌건 얼굴이, 사바나의 열대야를 만들어. 우기가 가고 타들어가는 맹수의 영역, 숲이 사라진 초원의 지표면은 용광로로 변하고 불새가 날아올라. 물 한 모금을 위해 동족의 등을 밟고 앞으로 돌진하는 코뿔소, 강을 찾아가는 누우 때의 걸음엔 대지의 거친 숨소리, 흔적으로 남아있는 삶의 터에는 시원했던 바람의 무덤만 무성하고, 마른 강바닥에는 퇴색한 열정의 찌꺼기들, 맹수의 천국이야. 시침과 분침의 교차점에서 멈춘 사바나, 태양의 붉은 발바닥 위에서 발톱을 세우고 송곳니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며 빛의 그림자만 물어뜯어.
-「하루 하루」
시인은 위의 시에서 고뇌의 정체를 드러내 보여준다. 그것은 이른 바 몸에 대한 사유라고 할 만한 것이다. 그 사유는 “갱년기에 접어든 여자의 심정”이라는 환유의 외피를 쓰고 나타난다. 그 속에는 그러나 들끓는 내면이 사바나의 풍경으로 펼쳐져 있다. 시인은 “사바나”에서 생육의 평화롭고 적요로운 풍경을 삭제해 버리고, 이글거리는 살육의 현장을 그려낸다. 그야말로 “타들어가는 맹수의 영역”을 적나라하게 펼쳐 보인다. “동족의 등을 밟고 앞으로 돌진하는 코뿔소”, “대지의 거친 숨소리가 헐떡이는 누우떼의 걸음”, “퇴색한 열정의 찌꺼기가 들끓는 마른 강바닥”은 ‘태양의 붉은 발바닥’에 비유된다. 시인은 거기서 “으르렁거리며 빛의 그림자를 물어뜯는 존재”로 표상된다. 그렇다. 시인의 내면 속에는 ‘여자’가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맹수’가 살면서 끝없이 ‘빛의 그림자’로서의 자신을 물어 뜯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고뇌하는 여성-주체이자 시인-주체의 표상으로 나타난다.
주유소 마당에다 묵직한 복사뼈를 묻고 헐렁한 잔등에 슬픔이 차오르면 바람 장단에 흐느적거리는 스카이댄서를 지나 명인제약 앞을 지나간다. 타원형 캡슐 감기약의 조형물이 제약회사임을 말하고 그 속의 영점 오 촉짜리 알전구는 희미한 열꽃을 쫓고 독감으로 찾아와 밤마다 타오르는 불꽃으로 온 몸을 휘감고 헤어지자는 말 풀려있던 기억들이 종합감기약에 취해 몽롱한 거리를 떠돌고 피지 못할 열꽃, 지킬 수 없는 약속이 봉인된 채 캡슐 속에서 알알이 흔들리고 있다.
-「판콜 A씨」
시인의 시집 전체를 통해서 그 고뇌는 다양하게 변주되지만 의외로 시인은 감추어진 서사의 한 장면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시인이 여러 시들에서 시인의 성장서사라든가 생활서사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기도 하지만, 이 시에서는 그 서사를 뚜렷이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다. 주유소마당에 묻은 묵직한 복사뼈는 무엇인지, 왜 헐렁한 슬픔이 잔등에 차올라야만 했는지, 왜 명인제약 앞을 지나가야 했는지, 시인은 알려주지 않는다. 짐작할 수 있는 이유는 ‘헤어지자는 말 풀려있던 기억들’인데 그것이 사랑에서 연유한 것인지, 혹은 가족서사와 관련된 말인지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시인이 흔들리는 이유라면 그것은 ‘지킬 수 없는 약속이 봉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알약은 속성상 몸에 들어가면 외피가 녹으면서 속에 있는 가루가 풀리면서 약효를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시인은 그 열꽃을 다스리는 알약의 몽롱함 속에서도 끝내 그 ‘지킬 수 없는 약속’만큼은 놓지 못한다. 그 비밀의 영역이 시인의 상처의 기원이 아닐까 짐작해 볼 뿐이다. 그것은 단지 개인적 상처로 작용하지만은 않는다. 바로 그 상처를 몸속에서 끝없이 굴려오면서 그 상처를 통해 세계로 향하는 창문을 열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그것은 다음의 시에서 짐작된다.
허공에서 돌멩이가 자란다.
삶을 지그시 누르고 있다.
그 돌멩이 자라서 바위가 된다.
이것이 세상사는 법이라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무거워지면서
머리 꼭대기에 내려앉는다.
-「돌멩이」
‘허공에서 돌멩이가 자란다’는 이 도저한 비극적 인식은 시인의 눈이 아니고서는 도출될 수 없는 것이다. 그 돌멩이는 자라서 바위가 되고 끝내 시인의 삶을 누르고 있다. 그리고 말한다. 이게 ‘세상사는 법이라고’, 허공에서 자라는 바위를 이고 살아가는 시인의 천형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이 시에는 시간적 역동성과 공간적 질감이 부여되어 독자들로 하여금 허공에 떠 있는 바위들을 하나의 실체로 표상할 수 있도록 작용한다.
이 시는 또한 인간은 깨어있는 의식을 통해 자각하는 부조리의 상태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알베르 까뮈의 철학을 연상하게도 한다. 까뮈는 말했다. ‘산정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스를 그려보지 않으면 안된다’고. 산정을 향해 끝없이 바위를 굴리며 살아가는 삶과 서서히 무거워지는 바위를 이고 살아가는 삶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행복한 시지프스를 찾을 것인가. 시인은 다른 시에서 이렇게 쓴다.
코와 입, 귀와 눈, 하나로 이어지는 길,
밖으로 가는 길, 세상으로 가는 길이,
몸속에서 시작된다는 아버지의 말씀이셨다.
-「몸 속의 길」 부분
알레르기로 인한 고통과 치유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는 위의 시에서 결국 “밖”으로 가는 길, “세상”으로 가는 길이 “몸속에서 시작된다”는 시인의 전언은 우리에게 바로 그 행복한 시지프스는 시인의 내면에 살고 있는 존재임을 알려준다. 고통을 육화하여 끝내 “밖으로 가는 길, 세상으로 가는 길”을 찾아내는 누군가가 그녀의 몸 속에는 살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천선자 시의 미학은 몸-아픔의 시학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그 몸-아픔의 시학이 세계와 함께 울고 웃는 ‘풍쟁이’의 시학을 창출해 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시인은 말한다. “그건 그냥 사는 거다. 살아주는 거다”(「척,하며 가는 길」) 에서처럼 능동태적 존재전환이 가능한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무거워지면서/머리 꼭대기에 내려앉는”(「허공」) 바위를 극복해 내는 힘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서두에 인용한 이장욱의 소설 한구절처럼 “계획도 없고, 아량도 없는 공간”이자, “맹목적으로 들끓는”다고 밖에 없는 공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 삶을 견디고 살아가는 힘은 어디에 있을까? 삶을 살아가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천선자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그 힘은 바로 우리의 몸속에 있음을, 우리의 몸-아픔을 사유하여 세계의 아픔에 맞서는 것이 “살아주는” 힘임을 알 수 있었다. 천선자 시인의 이 몸-아픔의 시학이 더욱 깊어져서 하나의 견고한 시학으로 우뚝 서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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