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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호/집중조명/박서영/문상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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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2
댓글 0건 조회 3,517회 작성일 15-07-10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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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조명

박서영

문상 외 4

 

 

어젯밤의 유일한 슬픔 때문에 오늘밤 문상은 슬프지 않았다. 바람이 달려오는 것 아니고, 풀잎이 상처 입은 것 아니고, 갑자기 첨벙 뛰어드는 건 무엇인가.

 

너의 심장 아니고

 

달 한 마리 아니고

 

가덕도 숭어가 저수지까지 헤엄쳐온 것도 아닐 텐데, 물고기들이 환부 속으로 뛰어드는 소리. 나에게 소중했던 장소들이 훼손되고 있는 것 같다. 장소들이 쏟아지고 있는 것 같다. 심장 안에서, 안으로

 

바람의 포옹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직 차려지지 않은 빈소에 앉아 있었다. 누가 죽기라도 한 것인가. 옆에서 언니가 울었다. 남동생이 죽었다고 했다. 나는 간밤의 유일한 슬픔 때문에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심장을 가르자 비릿한 달이 헤엄쳐나갔다. 모르는 사람처럼 나갔다.

 

오늘밤 당신이 유일해졌다. 나는 모르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자꾸 하게 된다. 반복하게 된다. 유일해진 당신을 잊기 위해서. 내 심장에서 기억의 파편이 쏟아지고 있는 것 같다. 파경(破鏡)이다. 달이 깨진다. 몸 안에서, 안으로

 

 

    

 

너에게로의 망명

 

 

어느 날 국가가 나를 사랑한다며 다가왔다

국가는 폭력적으로 나를 뒤덮어주었다

갑자기 키스하고 안아주었다

나는 매달렸지만

국가는 결국 나를 버렸다

나는 자존심도 없이 울면서 붙잡았지만

국가는 자신이 준 아름다운 것들을 모두 꺼내가고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다시 국가가 기분이 나아졌다며 나를 달래주려고 다가왔다

예전 같진 않았지만

망명하는 자에겐 엄격한 잣대가 필요하진 않다

국가가 다시 화를 내면

달과 태양으로 덮을 수 있을 만큼

내 슬픔의 크기를 줄이는 수밖에는

내 열망의 크기를 줄이는 수밖에는

내가 매달리지 않자 국가는 더 이상 나를 버리지 않았고

사랑해주지도 않았다

그날 이후 나는 배회하는 공기가 되었다

무게와 크기를 잴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달과 태양은 여전히 내 슬픔을 덮기엔 너무 작다

국가여, 국가여. 나는 이렇게 애틋해질 수밖에 없다

 

 

    

 

토란

 

 

토란을 다듬으며 생각한다

이 일은 밤새 지구를 닦는 일처럼 아프다고

손가락을 파고드는 끈끈한 액체가

그날의 키스처럼 달콤하다고

우리는 밤의 무덤 속에서

서로의 가슴에서 흘러나온 노란 진액을 핥아댔고

마치, 마지막처럼

 

피부가 가려워

무엇보다 멈추지 않는 통증에 대해서도 말하려네

내가 품고 있었던 두 개의 눈사람 중에서

하나는 녹아내리기 시작했고

나는 딱딱해진 토란 하나를 병으로 갖게 되었고

다만 지금은 토란 껍질을 깎는 시간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아직 토란 요리를 해 본 적 없어

젖가슴에 뿌리내린 토란이 점점 자라는 걸 느끼면서도

괜찮아, 밤의 슬픈 짐승을 숨겨주는 것도

내 노동 중의 하나일지도 모르지

심장이 그걸 지킬 자신감을 주었으므로

이 무서운 행복, 마지막처럼

밤새 심장을 둘러싼 껍질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툭툭툭 자신의 리듬을 버렸으면 좋겠다

설렘. 사랑. 고백. 불안. 이별. 모욕감도 어떤 리듬을 타고 왔겠지

나도 한때 그 리듬을 타고 죽을 기회가 있었다

토란, 재배하지 않았지만 내게 온 시간의 음표들.

 

 

 

 

재래시장

 

 

지구 끝에 사과의 창문이 있군요

당신이 세상의 모든 나쁜 말을 쏟아낸 후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사과의 창문엔 둥글고 향긋한 즙이 묻어있어요

바람에 흩날리는 것을 커튼이라고 부르지는 않고

찢어진 심장이라고 부를 수는 있겠어요

 

나는 당신과 함께 지구의 끝에 가보는 군요

이별에 능통한 자들은 혀에 변명의 지도를 그릴 줄 알아요

스스로를 나쁜 놈이라고 말하면서도 울진 않아요

 

내가 입술을 열자 당신은 사과를 던졌어요

인도사과처럼 단단하고 푸른 얼굴

고백한 입술은 책임지려는 고통으로 자꾸 이상한 말을 하지요

 

지구에는 시간의 구멍을 파는 벌레가 살아요

당신은 씨앗이었다가 꿈틀거리는 사과벌레였다가

사과를 터뜨리고 사과나비가 되어 날아갔지요

 

사과의 창문 안에는 거래를 잘 하는 상인이 살아요

그는 사랑의 처음과 끝을 혀에 적어놓고 갔어요

혀에 그려진 천문도를 따라가 보면

목적을 이룬 고통이 만세를 부르며 웃고 있어요

시큰하고 얼얼한 사과 향이 남아있는 내 입술은

지구 끝에서 영원히 닫혀있는 창문처럼 침묵하지요

여전히 사랑과 미련은 서로의 꼬리를 물고

빙글빙글 돌고 있지만

 

찢어진 달이 울어야 할 때는 언제일까요

어느 날 문득 지구의 창문을 통해 맑고 깨끗한 달을 보게 되겠죠

여전히 모든 게 영원했기에

나는 더 이상 우물을 파지 않고

거래를 잘하는 상인을 찾아 길을 떠나기로 결심했어요

 

 

 

 

도요 감자

 

 

달과 별에 물렸다. 눈물을 흘린 이유다. 달과 별의 잇자국이 온 몸에 가득하다. 종이상자를 찢고 돋아나 있는 감자싹은 마지막 발버둥 같은 것, 씩씩한 울음의 싹이다. 자꾸 울다보면 몽환적이 된다. 물속에 집을 짓게 된다. 집에 연둣빛 독이 가득 차게 된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당신과 나는 심장을 개조한 허술한 창고에서 함께 놀았구나. 사실은 감자가 문제다. 한 박스라니. 감자만 먹고 살 수 없어 감자가 썩어가고 있어. 오늘밤은 내가 감자를 씻고 감자를 깎고 감자요리를 한다. 사실은 당신 때문이다. 혼자 슬픔의 세포가 완성되어가는 것 같다. 감자요리를 함께 먹고 싶다고 달과 별이 입 벌리고 있다. 나는 밖에 의자를 내놓는다. 당신을 앉힌다. 어제 그랬던 것처럼 의자 한 귀퉁이에 비스듬히 앉아있는 소년이 있다. 오늘밤 힘센 감자 몇 알로 통증을 몰아냈다. 통증을 몰아내는 방법은 맛있게 씹어 삼켜 버리는 것. 의자에 찢어진 심장이 있다. 그것만이 분명한 위로가 되는 오늘밤.

 

 

 

 

시작메모

 

 

달이 손목처럼 흘러가고 있다. 또 밤에 대한 이야기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내 손목을 통과해 흘러가는 기분은 단어들이 자신의 손목을 통해 흐르는 느낌을 좋아한다.’고 말한 제임스조이스의 글을 읽고 난 후였지 아마도... 어느 날 밤이었을 것이다. 내 손목을 통과해 흘러가는 단어들을 붙잡느라, 해방시키느라 심장이 뜨거워진 밤. 어떤 기억에 사로잡혀 어느 새 두 뺨도 달아올랐다. 어떤 충동으로 인해 생긴 감각들은 서글픈 일이다. 그러나 시의 언어들이 손목을 흘러갈 때 몸의 감각들이 열리는 것도 사실이다. 내게는 그것들이 불안하고 두려운 감각이다. 그 순간에는 무서운 병이 나를 찾아와도 견딜 수 있을 것 같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진다. 우연이나 운명이 뭐가 다를까. 어차피 모든 일들은 순간의 기록들이다. 순간들이 모여 현재가 되지만 당신은 곧잘 후회하고 잊고 싶어 한다. 나의 천성은 쉽게 잊지 못하고 자꾸 뒤돌아본다. 기억들이 모여 슬픈 감각의 발원지가 된다. 기억이 현재처럼 생생하다는 건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억을 현재처럼 보여주는 노동을 하고 있다.

달이 흘러간 밤하늘은 무언가로 가득 차 있다. 비어있지 않다. 밤의 에너지는 검지만 빛나고 아름답다. 따뜻한 당신의 목소리, 다정한 문장들은 영원하지 않으므로 나에겐 가장 잔혹한 사랑이었다. 그래서 용서할 수 없는 밤이 있다. 내 심장을 견딜 수 없는 열망에 빠지게 하는 당신의 문장들. 세상의 단어들. 나를 둘러싼 우연의 순간들. 운명의 순간들. 그들을 통해 나는 세상을 보고 표현한다. 말하고 싶어지는, 말해야 하는 어떤 것들도 심장이 불타오르는 고통이 오면 침묵할 수밖에 없겠지. 갑자기 모든 피가 심장으로 모여 흘러가면, 어깨가 내려앉고, 목이 따스해지고, 두 뺨이 달아오르는 느낌에 휩싸이게 된다. 감각이 열리는 순간. 손목으로 달과 태양이 단어를 서로 주고받으며 스쳐가는 느낌. 조금은 용감해지는 이 느낌. 아마도... 어느 날 밤이었을 것이다. 심장에 쓴 것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허무에 빠져든 시간도 있었다. 그렇게 이렇게 나는 달과 태양의 칸막이 사이를 오락가락 하고 있을 뿐이다.

 

 

박서영 - 1995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좋은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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