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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호/집중조명/권경아/달과 태양의 시작-박서영 작품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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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아
달과 태양의 시학
-박서영 작품론
1.
박서영은 첫 시집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에서 슬픔과 고통이 진동하는 내면의 풍경을 보여준 이래 슬픔과 고통, 불안과 절망 등의 감각들을 심장으로 노래하고 있다. 시인의 슬픔과 고통은 좋은 구름을 지나 이번의 신작시들을 관통하고 있다.
심장을 타오르게 하는 사랑에서 비롯된 슬픔과 고통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달과 태양의 거리라 할 수 있다. 달이 떠오를 때 태양은 사라지지만 진정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침이 되면 태양은 다시 떠오르고 달은 사라지게 된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반복되는 나타남과 사라짐처럼 박서영의 시들에 나타나는 슬픔과 고통은 사랑 그 자체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사랑의 특성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찢어진 꽃잎”에 “온 힘을 집중한 채 울고 있”는 여자. 그녀를 울게 하는 것은 “오므렸다가 터졌다가 피었다가 졌다가” 도무지 가만있질 않고 무럭무럭 자라는 슬픔이다. 피었나 하면 지고 졌나 생각하면 다시 피어나는 반복적 행위에서 오는 절망이다. 슬픈 것은 멀리까지 갔다가 “돌아온 심장은 처음의 그것이 아니다”(「맨발」, 좋은 구름)라는 것. 아니 더욱 슬픈 것은 처음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시인은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통을 느끼면서도 사랑의 처음과 끝을 반복하고 그 사이에서 맴돌고 있는. “여전히 0에서 흔들리고”(「영혼이 진흙처럼 뻐근해지고」, 좋은 구름) 있는 시. 이것이 박서영의 달과 태양의 시학이다.
2.
물과 불의 흐느낌처럼 식었다가 타오르는 심장
굳어버리는 순간에 따라 피우는 꽃이 다르다
맹수의 시간 - 경로를 이탈하여 마주치는 것들,
식물의 시간 - 어떤 의미에서는,
놀랍게도 나는 아직 굳어야 할 순간을 선택하지 못했다
뜨겁고 말랑말랑한 지옥에서 춤을 춘다
혀와 심장이 녹아내려 실어증의 날들이 계속되었다
왜 돌아왔을까
깨져버린 알이 다시 태어난 느낌이다
누가 선물했을까, 식탁 위의 저 꽃병은
- 「던졌던 순간」 부분, 좋은 구름
화가 나서 식탁 위의 꽃병을 던졌다. “깨지기 쉬운 무언가를 던졌던 바로 그 순간” 시인은 “어딘가에 버려진 애착 같은 것”을 느낀다. “몸의 일부는 깨진 파편 속에 꽂혀” 있는데 오늘 가만히 몸을 들여다보니 “그때의 파편들이 돌아와 체온을 높이고 있다”. 깨버렸는데 그때의 파편들이 지금은 돌아와서 체온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식었다가 타오르는 심장”. 혀와 심장이 녹아내려 실어증의 날들이 계속되었는데 “왜 돌아왔을까” 시인은 “깨져버린 알이 다시 태어난 느낌”을 받는다. 식탁 위의 꽃병을 던져버렸는데 누가 선물했는지 다시 놓여있는 식탁 위의 꽃병.
체중계에 올라가본다
0에서 시작된 바늘의 작은 실랑이가
결판을 내지 못한 채 오래 망설이고 있다
혼자 울고 있는 사람의 어깨처럼 흐느끼는 바늘
울음이 흐르는 곳에 나도 있다
사랑과 고통이 서로 밀고 당기며 밀봉된 곳
영혼이 피부를 찢고 나온다
수북한 털, 주름살, 검은 반점, 파란 핏줄
몸을 뒤죽박죽 색칠해놓고 있다
이 반죽 덩어리에서
눈물이 빠져나가도 가벼워지지 않을 것이다
내 영혼은 진흙처럼 무거워졌으니까
- 「영혼이 진흙처럼 뻐근해지고」 부분, 좋은 구름
사랑과 고통이 서로를 밀고 당기고 있다. “희극이나 비극이나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 더 두렵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사랑과 고통이 함께 온다는 것. 그것은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것. 그것이 슬픔과 고통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다는 것이 또한 고통임을 시인은 알고 있다. 달과 태양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뜨고 지는 것을 반복하는 운명을 지녔듯이 사랑의 시작과 끝은 언제나 반복된다. 또한 태양이 달을 밀어올리고 달이 태양을 밀어 올리듯 사랑은 또 다른 사랑에 밀려 다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의 시작과 끝, 사랑과 고통 사이에서 여전히 망설이며 어느 쪽으로 향하지 못하고 흐느끼고 있는 바늘. “여전히 0에서 흔들리고” 있는.
지구에는 시간의 구멍을 파는 벌레가 살아요
당신은 씨앗이었다가 꿈틀거리는 사과벌레였다가
사과를 터뜨리고 사과나비가 되어 날아갔지요
사과의 창문 안에는 거래를 잘 하는 상인이 살아요
그는 사랑의 처음과 끝을 혀에 적어놓고 갔어요
혀에 그려진 천문도를 따라가 보면
목적을 이룬 고통이 만세를 부르며 웃고 있어요
시큰하고 얼얼한 사과 향이 남아있는 내 입술은
지구 끝에서 영원히 닫혀있는 창문처럼 침묵하지요
여전히 사랑과 미련은 서로의 꼬리를 물고
빙글빙글 돌고 있지만
- 「재래시장」 부분
이 시는 사랑의 관계에서 반복되는 사랑의 처음과 끝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나쁜 말”을 쏟아낸 후 당신은 ‘사과’라는 향긋한 즙을 묻히고 있다. 그러나 시인의 “찢어진 심장”은 커튼처럼 바람에 흩날린다. 당신과 함께 “지구의 끝”을 경험한다. “스스로를 나쁜 놈이라고 말하면서도 울진 않”을 만큼 “이별에 능통한 자”가 당신이다. 당신은 사랑의 처음과 끝을 자유자재로 쓰는 사람이다. 사랑을 시작하는 씨앗이었다가 사과벌레가 되어 사과를 던지더니 나비가 되어 날아가 버렸다. 사랑을 시작하기도 하고 끝도 내버린 당신을 잊어버리면 될 일인데 시인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사랑과 미련은 서로의 꼬리를 물고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국가가 나를 사랑한다며 다가왔다
국가는 폭력적으로 나를 뒤덮어주었다
갑자기 키스하고 안아주었다
나는 매달렸지만
국가는 결국 나를 버렸다
나는 자존심도 없이 울면서 붙잡았지만
국가는 자신이 준 아름다운 것들을 모두 꺼내가고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다시 국가가 기분이 나아졌다며 나를 달래주려고 다가왔다
예전 같진 않았지만
망명하는 자에겐 엄격한 잣대가 필요하진 않다
국가가 다시 화를 내면
달과 태양으로 덮을 수 있을 만큼
내 슬픔의 크기를 줄이는 수밖에는
내 열망의 크기를 줄이는 수밖에는
내가 매달리지 않자 국가는 더 이상 나를 버리지 않았고
사랑해주지도 않았다
그날 이후 나는 배회하는 공기가 되었다
무게와 크기를 잴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달과 태양은 여전히 내 슬픔을 덮기엔 너무 작다
국가여, 국가여. 나는 이렇게 애틋해질 수밖에 없다
- 「너에게로의 망명」 전문
사랑하는 당신은 시인에게 애국과 충성을 강요하는 국가와 같다. 사랑한다며 어느 날 내게 다가온 국가. 마음을 주고 사랑하게 되자 국가는 매달리는 나를 결국 버렸다. 자존심도 버리며 잡으려 했지만 충성만을 강조하는 국가. 어느 날 마음이 변했던 것처럼 어느 날 또 다시 마음이 변해 시인을 달래며 다가오는 것이다. 당신에게 망명한 시인은 “슬픔의 크기”를 줄이고 “열망의 크기”를 줄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슬픔과 열망이 줄어든다는 것은 사랑이 식어간다는 또 다른 표현일 것이다. 시인이 더 이상 매달리지 않자 더 이상 시인을 버리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국가. 사랑 받는 것과 버림 받는 것 사이의 “무게와 크기”는 얼마인 것인가? 시인이 알 수 있는 것은 “달과 태양은 여전히 내 슬픔을 덮기엔 너무 작다”는 것뿐이다. 사랑이 반복될수록 고통은 깊어진다. 사랑이 깊을수록 “흰 나무들이 서 있는 숲에서 통증을 앓는”(「은신처」, 좋은 구름) 것이다.
3.
사랑하는 만큼 고통이 뒤따른다는 사실은 맵고 아린 토란과 같다. “연둣빛 독이 가득”한 감자와 같다. 극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마치 마지막처럼 “무서운 행복”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아직 토란 요리를 해 본 적 없어
젖가슴에 뿌리내린 토란이 점점 자라는 걸 느끼면서도
괜찮아, 밤의 슬픈 짐승을 숨겨주는 것도
내 노동 중의 하나일지도 모르지
심장이 그걸 지킬 자신감을 주었으므로
이 무서운 행복, 마지막처럼
밤새 심장을 둘러싼 껍질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툭툭툭 자신의 리듬을 버렸으면 좋겠다
설렘. 사랑. 고백. 불안. 이별. 모욕감도 어떤 리듬을 타고 왔겠지
나도 한때 그 리듬을 타고 죽을 기회가 있었다
토란, 재배하지 않았지만 내게 온 시간의 음표들.
- 「토란」 부분
토란을 다듬는 일은 아프다. 독성을 지닌 토란을 손질할 때는 두꺼운 장갑을 준비해야 한다. 맨손으로 잡았다가는 알러지 반응을 일으켜 가벼움과 함께 통증이 밀려오는 것이다. “그날의 키스처럼 달콤하”지만 “멈추지 않는 통증” 또한 품고 있는 토란. 시인의 몸에 뿌리내린 토란이 점점 자라나고 있다. 토란이 자라는 걸 느끼면서도 시인은 “밤의 슬픈 짐승을 숨겨주는 것도 내 노동 중의 하나일지도 모르지”라며 괜찮다고 말한다. “그걸 지킬 자신감”을 심장이 주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처럼 “이 무서운 행복”.
“설렘, 사랑, 고백, 불안, 이별, 모욕감”은 어떤 리듬을 타고 함께 온다. 그러나 심장이 행복을 지킬 자신감을 주었기에 시인은 두렵지 않다.
달과 별에 물렸다. 눈물을 흘린 이유다. 달과 별의 잇자국이 온 몸에 가득하다. 종이상자를 찢고 돋아나 있는 감자싹은 마지막 발버둥 같은 것, 씩씩한 울음의 싹이다. 자꾸 울다보면 몽환적이 된다. 물속에 집을 짓게 된다. 집에 연둣빛 독이 가득 차게 된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당신과 나는 심장을 개조한 허술한 창고에서 함께 놀았구나. 사실은 감자가 문제다. 한 박스라니. 감자만 먹고 살 수 없어 감자가 썩어가고 있어. 오늘밤은 내가 감자를 씻고 감자를 깎고 감자요리를 한다. 사실은 당신 때문이다. 혼자 슬픔의 세포가 완성되어가는 것 같다. 감자요리를 함께 먹고 싶다고 달과 별이 입 벌리고 있다. 나는 밖에 의자를 내놓는다. 당신을 앉힌다. 어제 그랬던 것처럼 의자 한 귀퉁이에 비스듬히 앉아있는 소년이 있다. 오늘밤 힘센 감자 몇 알로 통증을 몰아냈다. 통증을 몰아내는 방법은 맛있게 씹어 삼켜 버리는 것. 의자에 찢어진 심장이 있다. 그것만이 분명한 위로가 되는 오늘밤.
- 「도요 감자」 전문
당신과 나는 “심장을 개조한 허술한 창고”에서 놀았던 것이다. 감자가 가득한 종이상자 속에서 감자만 먹고 살았지만 더 이상 “감자만 먹고 살 수 없”다. 종이상자를 찢고 돋아나 있는 감자싹은 마지막 발버둥 같은 것이다. “씩씩한 울음의 싹”이다. 집에 “연둣빛 독”이 가득 차게 된 것을 보며 “밖에 의자를 내놓”고 “당신을 앉힌다”. 당신이 떠난 것인지 시인이 떠나 보낸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늘밤 “힘센 감자 몇 알로 통증을 몰아냈다”는 것이 중요하다. “맛있게 씹어 삼켜 버리는 것”이 “통증을 몰아내는 방법”이라는 것. 슬픔과 고통의 심장에서 통증을 몰아내고 그 찢어진 심장에서 다시 위로를 받는다. 달과 태양은 끊임없이 서로를 밀고 당기며 함께하고 있다. “사랑과 고통이 서로 밀고 당기며 밀봉된 곳”을 시인의 영혼이 찢고 나온다. “여전히 0에서 흔들리고” “계속 변하고 커”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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