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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호/신작시/하정은/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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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하정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밤마다
엠파이어 건물 지붕위 웅크린 야수를 본다
그리고 처형당하는 마녀의
애절한 울부짖음으로 심장이 찢기곤 한다
땅속 저 깊이 뿌리내린 해는
태고 적 부터 이렇게 낯은 듯 늘어지게 길고
회색 도시는 빌딩만이 방방 불을 밝혀
축제를 즐기고 있다
문밖은 구름과 바람이 연대하여
정적을 만들어내고 햇살은 이미 철거중이다
봄볕을 받아 겹겹이 살아 움직이던 가로수 잎들이
점점 누렇게 숨이 잦아들어
마지막 남은 연민끼리 몸을 부비고 있다
비상구 불빛마저 꺼버린 세상, 위험한 짐승들은
내친김에 온 세상을 내리 핥아
어둠이 완결되고 희망은 침묵 속에 온전히 갇혔다
언제부터인가 머리 속에서만 북적이는 언어는
좌판 위에 뉘인 생선인양
잠시 후
등에 사정없이 내려 꽂일
시퍼런 칼날의 공포마저 포기해야 한다
뭄 밖, 새벽이
쉴 새 없이 문을 두들겨도
어느 부동의 수도자처럼 고백 한다
지금 눈과 귀는 사용 불가라고
어떤 동행
나는 오늘도
요양병원 203호 병실로 간다
그 요양병원 203호 병실에는
외딴집에서 엄마를 기다리다
혼자 쓰러져 잠든 계집아이의
슬픈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203호 병실 제일 구석자리
하얗게 쉰 성긴 머릿결 사이
검버섯이 듬성듬성하게 핀 모습으로
기다림은 원망과 불안으로
다시금 체념으로 이골 난 여인도 있다
기억 저편 기다림에 지쳐 울던 그, 계집아이처럼
여인과 나 사이, 축적된 아린 전설은
철 침대 머리맡 목이 긴 화병에 꽂혀
찬바람을 말없이 안아 들이고 있다
단내를 삭히는 세월 내내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엄마의 젖비린내가
나의 갈비뼈 사이를 드나드는 동안
목 울대가 젖어 올랐던 기억이 껍질을 벗는다
203호 병실을 밝히는
차가운 물빛 같은 달 속에서
여인과 나는 함께 흔들리고 있다
*하정은 : 2009년 열린시학 봄호 신인작품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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