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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호/특집1/시와 독자/장이지/독자 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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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장이지
독자 혐오
프롤로그
독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사실 우리 모두는 시인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독자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점을 제외하더라도 독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지극히 곤란한 일임을 밝혀둔다. 그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우리가 있을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우리의 작품에 새 생명을 준다. 그들이 자주 저자의 메시지를 도외시하고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있을지라도 사정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독자들에 대해 언제나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언제나 독자들을 혐오한다! 나는 어디엔가 혐오하지 않아도 될 ‘진실한’ 독자가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만, 모든 독자들이 ‘진실해지기를’ 바란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이 글은 어떤 계몽의 의도에서 쓴 것은 아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독자는 이미 대부분 죽었다. 계몽하려고 해도 이미 때가 늦은 셈이다.
독서부의 에이스
먼저 향수를 불러일으킬 만한 이야기부터 하고 싶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나는 ‘독서부’였다. 입시 위주의 교육 환경에서 독서부 이외의 특별 활동 부서가 제대로 존재했는지 지금은 잘 기억할 수가 없다. 무언가 다른 부서가 있기는 있었겠지만, 실질적으로 즐길 만한 활동은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때 나는 교내에서 금지하는 동아리에 하나 들기는 했지만, 그런 대로 조용한 모범생 축에 들었다. 그런 내가 독서부에 든 것은 누가 봐도 알기 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담임선생님은 내가 독서부에 들어가서 당연히 교과 과목을 더 공부하리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내가 독서부에 든다고 하니까 좋아하셨다. 실제로 독서부의 일반적인 풍경은 영어나 수학 문제집을 내놓고 푸는 것이었다. 교련 선생님이 앞에서 졸고 계시고는 했다. 나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읽었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 담긴 책을 가지고 왔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독서부장으로 교련 선생님에 의해 지목됐다. 그때 나는 셰익스피어가 제법 재밌다고 생각하면서 읽었다. 깊은 의미까지는 잘 알지 못했지만―그러나 나는 그것을 끝까지 알고 싶었고 알려고 노력한 독자였다―, 그것은 그런 대로 ‘이야기’로서의 재미가 있었던 것이다. 4대 비극이 끝난 후로는 셰익스피어의 어떤 희극을 골라잡았는데, 그것이 왜 훌륭한지에 대해서는 끝내 깨우치지 못한 채 일 년이 지나버렸다. 셰익스피어 이외에 다른 것도 읽었을 텐데, 어떤 것을 읽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다.
학교 뒤편에는 제법 큰 동네서점이 있었는데,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무렵에 처음 문예지라는 것을 거기에서 발견했다. 그 잡지에 유명한 문학평론가가 소설 월평을 쓰고 있었는데, 그 월평에 다루어진 김형경의 장편소설을 구입해서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읽었다. 읽다가 걸려서 조금 혼나기도 했다.
고등학생 때 생긴 습관이 있다. 마음에 드는 책에 ‘책가운’을 입히는 것이다. 나는 내 시집도 가운으로 잘 싸서 몇 권 지니고 있다. 딱히 책은 소중한 것이니까 그렇게 하고 다니라고 말해준 사람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냥 책이 더러워지면 안 될 것 같았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유별나게 결벽증이라도 있는 사람쯤으로 알기 쉬울 듯하나, 나는 땅에 떨어진 음식도 곧잘 집어먹곤 하는 사람이다. 결벽증과는 다른 것이다. 언젠가 어떤 출판사 직원이랑 이야기하다가, 시집을 읽을 때 좋은 시가 있으면 책장 모서리를 접어둔다고 하니까 그 직원이 아연실색하던 것이 떠오르지만, 나는 그것을 그 시집에 대한 예의로 해오고 있으니 책을 무조건 깨끗이 보자는 주의라고도 할 수는 없다.
책 냄새를 나는 좋아한다. 집이 좁아서 책을 제대로 보관할 수 없다는 점에 항상 나는 아쉬움을 느낀다.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책을 좋아하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도 자주 한다. 책장 모서리를 접더라도, 시집에 밑줄을 긋더라도, 책을 소중하게 가슴에 안고 다니는 독자들이 나는 좋다. 누군가 내 시집에 책가운을 입혀 가지고 다니는 것을 본다면 매우 기쁠 것이다. 그런 독자가 아직도 있을까 싶기는 하지만 말이다.
독자의 죽음
지난 세기 우리는 ‘저자의 죽음’이 지닌 의미에 대해 줄곧 성찰해왔다. 저자는 죽었다. 저자는 언제나 지난번보다 좋은 ‘작품’을 쓰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작품’이 ‘책’이 되는 순간 저자는 죽게 된다. ‘책’은 거대한 유통 구조 속에 들어가면서 ‘상품’이 되어 활기를 띠게 된다. 저자가 가장 무력감에 빠져 있는 순간에 말이다.
그러나 저자가 자신의 작품에게서 소외를 경험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독자들은 환금성을 띤 상품으로서의 책에서 ‘작품’을 소환해내는 작은 기적들을 만들어내곤 했다. 분명히 그것은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이라고 할 만하다. 그것은 현재진행형의 기적은 아니다. 이번 세기에서 우리는 ‘독자의 죽음’이라는 매우 기분 나쁜 사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물론 대학에서는 여전히 작품을 읽는 훈련이 이어지겠지만, 그 훈련은 어디까지나 헛수고로 끝나게 될 것이다.
‘독자의 죽음’이란 작품의 심층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의 상실을 의미한다. 그것은 문학이 사회나 문화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있는 데 따른 부대현상의 하나라고도 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고도화되고 사회의 모든 가치가 환금성에 의해 정해지는 사회에서 문학은 고립을 면치 못한다. 사람들은 당장 직업을 구하는 데, 혹은 돈을 버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여력이 없다(고 느낀다). 독서야말로 사실은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훈련하지 않으면 일정한 궤도에 오를 수 없는 영역이다. 독서는 일종의 경험주의이기 때문이다.
오프라인 독자 커뮤니티
2007년 겨울에 나는 첫 시집을 내놓고 난생처음 한 독서 모임에 초청된 적이 있다. 대학로 소재의 한 찻집에서 스무 명이 조금 못 되는 독자들이 내 시집을 사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에게 문학 과목을 배운 대학교 제자 하나가 그 모임에 나를 ‘섭외’한 것이었다. 그때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당신은 왜 시에 구두점을 찍느냐는 질문을 받은 기억만 희미하게 날 뿐이다. 나에게는 독자들을 만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나는 내가 상상 속에서 그렸던 독자와 현실의 독자가 전혀 닮지 않았다는 것을 그날 겨우 깨달았다. 그 후로 또 7년이 지난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그날 만났던 독자들보다 더 훌륭한 독자는 만나보지 못했다. 이것은 나만의 불운일까.
독자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실망한다. 그들은 내 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렇게도 생각해보았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사람들 말고, 어디엔가 내 시를 아주 잘 이해하는 다른 독자들이 숨어 있으리라고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물론 독자들 역시 나를 만나고는 실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에 대해서는 내 책임도 없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나는 실망감을 잘 감출 수 없다. 그들은 내 시를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나를 빤히 쳐다본다. 어떤 때는 동물원 원숭이 보듯이 바라본다. 사진과 다르다거나 생각보다 젊다는 말을 면전에서 한다. 도대체 시집에 실린 사진이나 실제의 외모가 작품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나는 잘 이해할 수가 없다. 시인이 아니더라도, 그런 말은 실례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래도 나는 꾸준히 독자들과 면대면으로 만나는 기회를 만들어온 편이다. 계속 만나다보면 그래도 문학을 이해하는 방법에 대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말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론에 대해 설명할 때도 있고, 시인의 생애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있고, 시를 읽어줄 때도 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독자들은 이야기가 길어지면 불만을 토로한다. 어떤 독자들은 시인을 보기 위해서 그 자리에 나오기도 하고, 단순히 집에 혼자 있기 싫어서 나오기도 하며,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나오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시에 대해 알기 위해서 오는 사람은 소수라는 사실이다. 어느 순간 나는 그런 분위기를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여우같은 얼굴로 독자들 앞에 서곤 한다. 작년에 세 번째 시집을 내놓은 이래로 몇 번의 문학콘서트라는 것도 해보았다. 독자들은 내용이 없는 콘서트일수록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웃고 떠들다 온다. 과거의 낭독회와 요즘의 문학콘서트는 따지고 보면 다를 게 별로 없다. 음악이나 퍼포먼스를 곁들이면 새로운가. 그것은 지루함을 줄여주는 장치에 불과하다. 그러나 종종 음악이나 퍼포먼스마저 지겨울 때도 있다. 차라리 시집을 한 권 정독한 다음에 모여서, 시인을 앉혀놓고 이 구절은 왜 이렇게 쓴 거냐고 이해가 안 되는 구절의 의미를 일일이 물어보는 모임이라면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문학콘서트에 간 관객들은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첫사랑 이야기가 왜 궁금할까. ‘TV 토크쇼’를 지나치게 많이 본 탓일까. 이런 것도 문화생활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것을 양질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싶다.
웹에서의 속물주의
문학콘서트에 참여한 경험은 곧장 SNS의 소재가 된다. 여기에는 본말전도의 혐의도 없지 않다. SNS에 비일상적인 경험을 올리기 위해서 문학콘서트 같은 데를 찾아다니는 사람도 있다. 문학은 SNS에서도 심각한 소외를 경험하고 있다.
트위터에 국한된 현상인지도 모르지만, 시의 일부분만을 ‘트윗’ 하는 것도 문제다. 그렇게 시를 분절적으로 향유하는 사람들이 늘어가서인지 요즘 시인들이 시의 전체적인 짜임새보다는 그럴 듯한 표현에 매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는 의심하고 있다. 또 그것을 ‘리트윗’ 하는 사람들은 전체 시를 모른 채 “나는 시도 아는 사람”이라고 폼을 잡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걱정되는 면도 있다.
웹에 우후죽순처럼 문학 커뮤니티들이 생겨나고 있지만, 나는 이 현상에 대해서도 그저 마음 편하게 박수를 보낼 수만은 없다. 그들이 한 권의 시집을 함께 꼼꼼하게 읽고, 어디선가 모여서 그것을 함께 이야기하는 자리를 꾸준히 만들고 있다면 매우 고무적인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 카페나 무슨 웹진 같은 것을 만들어놓고 누가 올려준 시만 주마간산 격으로 읽으면서 젠 체하는 사람들을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나마 웹에 게시된 시들이 언제나 원전을 충실히 옮겨놓고 있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저자와 작품이 잘못 짝지어진 것도 있다. 헤비 블로거나 웹진의 운영진들이 자기 홈페이지의 방문자수를 보며 대단한 사람이나 된 것처럼 시를 보내라 마라 하는 것도 신물이 난다. 홈페이지 방문자들이 전부 무언가 읽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정말 웹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지 않을까. 무언가 읽고 ‘리트윗’ 하거나 ‘좋아요’를 누르는 것이 아니다. ‘공감’ 버튼을 누른 사람이 많다고 해서 기뻐할 일이 아니다. ‘리트윗’이나 ‘좋아요’, 혹은 ‘공감’을 누르는 사람들이 모두 독자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읽는 사람들이 아니라 단지 웹 페이지의 기능에 ‘반응하는 사람들’일 뿐인지도 모른다. 실제로는 어떤 것도 읽고 있지 않은 것이다.
‘저자=독자’
시집 독자들 중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아마도 시인 자신들일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결국 시인들만 시집을 읽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유명 브랜드의 시집이 아니라면, 상황은 더 안 좋다. 시집을 내놓고 시인이 출판사에서 구입한 만큼만 독자들의 손을 타게 되는 일도 많다. 다시 말해 독서시장에서 전혀 팔리지 않는 시집도 허다하다는 것이다. 지인과 동업자들끼리만 돌려보는 시집이라니 이 얼마나 우울한 소식인가. 아니, 우울하다기보다는 우스운 이야기인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저자=독자’에 한없이 근접해가고 있다. 오프라인에서는 시인 티를 내면서 돌아다닐지 모르지만, 웹에서는 우리 자신이야말로 앞에서 묘사한 ‘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동업자지만, 동업자의 시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려는 마음도 없지만, 그럴 듯하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시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감수성’을 지닌 사람들인데, 하며 몸을 외로 꼰다. 자고로 ‘감수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처럼 약이 없는 경우도 드물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남들과 다른 존재임을 호소하려고 한다. 물론 거기에 어떤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 역시 빤한 희극에 불과하다.
나는 가끔 시인이라는 데 부끄러움을 느낀다. 시인들만큼 문학에 해악을 끼치고 있는 족속들은 없는 것이다. 시인들이야말로 최악의 독자고, 최악의 속물이다. 시인을 자처하는 시인이 되기보다는 순수하게 ‘읽는 사람’으로, 한 명의 ‘서생(書生)’으로 남고자 하는 사람을 신뢰하는 것이 모든 의미에서 현명한 일이 될 것이다.
에필로그
이 글에서 필경 독자들은 실제보다 더 우습게 그려졌을 것이다. 이런 희화화의 자격이 내게 있느냐 하면, 그런 것은 전혀 없기 때문에 나는 뒷맛이 개운치 않다. 사실은 내가 이상을 매우 높은 데 두고 있어서 생긴 불만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최근에 품게 된 독자들에 대한 아쉬움이 아예 없던 것으로 되지는 않는다.
‘진실한 독자’에 대해 나는 아직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단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을 따름이다. 보이는 곳에서 독자들을 찾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눈에 잘 띄는 독자들, 그들은 자기가 읽은 것을 자랑하고 칭찬받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은 결코 아니다. ‘본말전도’라는 말을 나는 앞에서도 썼지만, 여기서도 다시 한 번 경계의 의미에서 써두고 싶다.
독서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다. 독서에 어떤 효과가 있다면, 그것의 현현을 보는 것은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나 가능할 것이다. 자기계발서나 외국어 단어장이 아니라 시집 한 권을 앞에 두고 내 삶과 타인의 삶을 맞대보는 경험, 내가 독자들에게 권해주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이다. 나는 우리 세대가 이 경험의 아름다움을 다음 세대에 전하지 못할까봐 두렵다. ‘독자 혐오’가 ‘자기혐오’로 전환되는 순간은 바로 이 때다.▨
* 장이지: 2000년 『현대문학』신인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안국동울음상점』,『연꽃의 입술』,『라플란드 우체국』, 평론집으로 『환대의 공간』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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