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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호/특집1/시와 독자/김경주/소규모 낭독모임 펭귄라임클럽 FENGUIN LIME 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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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3
댓글 0건 조회 4,417회 작성일 15-07-09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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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1
김경주

소규모 낭독모임  펭귄라임클럽(FENGUIN LIME CLUB) 


레몬에이드 상회 단골


등단을 한 후 나는 오랫동안 유령작가로 살았다. 변변한 작업실 하나 없었으므로 내 작업실은 주로 살롱(cafe)이나 캬바레였고. 나는 커피유목민처럼 털털거리는 노트북을 들고 돌아다녔다.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면서 다양한 필명으로 여러 지면에 글을 쓰며 버텼다. 오늘날의 시인들의 모습 속에서 병들어 입으로 피를 토하는, 소위 3-40년대 작가들에게 전리품처럼 여겨지던 각혈의 로망 따위를 기대한다면 찾아 보기 힘들지 모른다. 아마 그런 시인을 그리워하거나 보고 싶다고 한들, 문전박대 당할 확률이 크다. 내 생각이 아주 오차가 크지 않다면 오늘날 좋은 시인은 각혈의 로망따위와는 별개로 똥구멍으로 피를 토할 확률이 아주 크다. 이유는 간단하다. 좋은 시인이라면 책상에 그만큼 많이 앉아 시를 쓰고 있을 테니까. 치질이 그에게 곧 찾아 올 것이다. 우리끼리의  은어로 이야기하면 항문에 꽃이 피는 것이다. 그러니까 최남선의 최초의 현대시 규준을 측량으로 한다고 했을 때, 한 세기가 동안 시인의 리얼리티는 입(각혈)에서 똥꼬로 피를 토하는 현실을 맞이했다. 문학은 이상이었지만 글쓰기는 현실이다는 것을 이제야 글쟁이로서 이해해가는 정도라고 해두자. 내가 유령이었을 때 세상은 내게 외로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나는 내 몸을 이해하고 싶은 언어의 욕망으로 스스로 유령(고스트라이터)이 되었지만, 유령이 되어가는 내 언어를 달래는 것이 내가 아는 유일한 시작태도였다. 나는 여전히 아무도 모르는데 내 난동으로 흥분되는 야설을 많이 쓰고 있다. 그 야설을 들고 가 낄낄거리며 레몬에이드 상회 단골중 하나로 지내는 게 좋다.  


텍스트 우드스탁 


어느날 나는 홍대의 한 복합문화공간의 열린포럼에 패널로 참여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나는 홍대주변의 문화예술 거점변화와 예술가들의 급속한 이동분포에 대해 처음으로 ‘문화생태계’라는 말을 썼다. 나는 이 생태계라는 말의 뜻에 진실을 담았다.(지금은 너나 나나 이 생태계를 다 빌려다 쓰고 있다)그 패널로 참여하며 내가 주장한 것은 홍대는 이제 문화생태계로 지칭되어야 하며 홍대에서 예술을 하는 창조적인 사람들이  자본의 폭리로부터 보호받을 규명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뚜벅이처럼 말했어도, 십여년 넘게 이곳에서 시를 쓰며 다양한 히끼꼬모리들, 똘똘한 분석가 디씨인사이드 폐인들, 코스프래 집단, 자리를 잃어가는 밴드들의 클럽장, 무모한 열정으로 값싼 인쇄소를 전전긍긍하는 무가지, 독립진 군단, 기타줄을 잃어버리고 유성을 찾아 떠난 딴따라, 김밥나라 단골 뚜쟁이 유령작가들의 심정을 대변해 보자는 심사였다. 포럼후 여러잡지들과 시사를 담당하는 전문인들이 앞 다투어 이 문제를 다루었다. 그들은 우리의 진정성을 옹호하는 척 진실을 찾았고, 우리는 다시 살롱에 모여 진정제(술)를 찾아야 했다. 그들에겐 언제나 뜨거운 ‘화제’였고, 우리에겐 아직도 ‘문제의식’이었지만. 

 

소규모 낭독모임의  펭귄라임클럽(FENGUIN LIME CLUB) 


여기저기서 낭독회가 출몰한다. 출판사가 신간출간을 기념으로 행사를 기획할 때 단골 메뉴처럼 등장하기도 하고, 수많은 책이나 문학과 관련된 페스티벌 행사에 낭독은 빠질 수 없는 레시피가 되기도 한다. 인문학 포럼이나 세미나에서도 토론이나 논쟁이후 부드럽게 낭독은 코스요리처럼 등장한다. 아예 핫(hot)한 스팟(spot)에 카페를 차려놓고 잘 안 나가는 귀사의 책을 할인이나 덤핑으로 팔아가며 정기적으로 낭독회를 기획하는 출판사도 늘어가고 있다. 판만 벌리면 언제든 우리의 주인공인 작가는 MAIN GUEST로 나올 준비가 되어있다. 작가 파워가 조금 밋밋하면 언더그라운드 밴드나 말솜씨 좋은 궤스트 몇을 붙여주면 시간은 금방 흐르고 관객은 찰떡처럼 붙는다. 부끄. 부끄하던 작가들도 자신의 책 몇 페이지를 진정성 있게 들려주고 이것저것 책속에 숨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주면 독자들이 흠뻑 젖는 것을 보고 ‘그래 교감은 이런거였지...’라며 골방에 갇혀 창작으로 외로웠던 자신을 정서로 동요하기에도 낭독회는 효과만점이다. 낭독회는 삐라가 되어 처방전처럼 SNS 필터를 통해 도시 곳곳에 뿌려지고 힐링이나 치유제로 사용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도시의 기획자들은 모두 의심하지 않는다. 독자입장에선 싸인받을 책을 들고 와서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작가의 생얼을 바라보며 낭독하는 입술을 따라가며 몽상에 빠지기에도 낭독회는 그만이다. 출판사입장에선 이런 고객들의 충성심을 상대로 출입구에 ‘오늘의 책’을 쌓아 두고 현장판매를 통해 매출을 보강한다. 며칠 후 온라인 구매 판매 게이지가 올라가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마케터는 인터넷서점에게 끊임없이 매물을 던지고 인터넷서점은 중매자로 나서서 잘나가는 작가와 책 사이에 티켓으로 다리를 놓고 팔 걷어붙이고 홍보를 돕기도 한다. 낭독회는 책이 안 팔리는 스마트 시대에 대중이 문학이나 독서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폼나는 인문학적 아날로그 행사로 점점 확산되는 모양이다. 책도 살리고 작가도 알리고 모두가 winn winn 할 수 있는 낭독회 프로젝트는 이제 자기개발서나 타분야 책관련 기획자나 마케터들에게도 침을 흘리는 필수 아이템이다. 책이 이렇게도 안 팔리고 영상과 미디어에 주눅 든 문학이 절뚝이는 시대에 작가도 이렇게라도 해서 몇 권 팔아주니 면피는 하는 셈이어서 출판사와 작가의 새로운 공존방식이라도 불러도 좋겠다. 낭독회에 익숙하지 않아서 독자를 만나는 방식이 서툴러도 금방 익숙해진다. 사회자가 오늘의 순서를 설명하고 오프닝은 뮤지션으로 시작하고 클로징은 관객이나 독자의 질의응답, 그리고 작가사인회로 오늘의 행사는 피날레를 장식하고 마무리하면 되니까. 대형서점에서 가면 매대에 서서 책을 고르는 손님들을 향해 방송으로 잠시 후 ㅇㅇㅇ작가의 낭독회가 있을 예정이라고 방송을 하는 것도 익숙해져 가는 패턴이다. 오늘의 초청 작가는 관객도 없는 자리에 미리가면 뻘줌하니까 뒤로돌아가 담배를 피우며 행사를 기다린다. ‘한 시간만 버티면 일당이 나오니까. 강연회보다 더 모냥도 나고 독자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으니까’ 대충 이런 식으로 자신과 합의를 보기도 한다. 글을 써서 밥을 짓는 내 경우에만 하더라도 어림잡아 일년에 10여차례 이상 낭독회에 초청받거나 낭독회 기획을 의뢰받곤 한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이런 행사들을 치르고 나면 어색하다. 어디서 오는 심사인지 몰라도 어느 때는 행사를 마치고 줄행랑을 친 적도 많다. 낭독이 이벤트 항목이 된 참담한 기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람쥐는 사라지고 청솔모만 득실거리는 문화 생태계


시가 대중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안타까워서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를 중얼거리다가 2000년대 초반부터 홍대의 클럽이나 카페에 몇몇이 모여 본격적인 낭독모임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지금 홍대 살롱문화의 효시로 평가받는 상수동 이리카페의 주인장들과 단골들이 친구가 되어 주었다. 우리는 자주 모여 써온 시를 서로 읽어주었고 들어주었다. 그림쟁이. 음악쟁이. 글쟁이. 화장실 낙서쟁이. 언더밴드 클럽주인장. 카페주인들. 오뎅장사하는 사람. 신문배달부. 야쿠르트 지점장. 자전거 수리공. 문신을 해주고 먹고 사는 친구. 연극쟁이. 다큐멘터리 종사자. 잡부.등 서로가 관객이고 주인공이 되어 모국어를 즐겼다.물론 그때에도 게릴라적인 형태의 낭독모임은 여기저기 존재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선구적인 형태의 낭독모임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모임이 빈번했다면 나는 게으르지는 않은 편이고 기웃거리는 것에 워낙 관심이 많아 한편?이 되었을 텐데 결과론적으론 나는 운이 없는 편이었다. 내 주변엔 시를 열심히 쓰는 이들이 넘쳐났지만 광장이나 카페로 들고 나와 그걸 읽어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지독히 혼자라고 여길 때 나는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에게 내 시를 읽어드리겠다고 했다가 뺨을 얻어맞은 적도 있다) 내가 꾸린 소규모 낭독모임의 취지는 간단하고 선명했다. 우선 낭송과 낭독을 조금 구별하자는 것이었다. 시낭송회라고 불리는 행사에 가면 문학을 하는 내 입장에서도 보기 민망한 경험들을 자주 목격했다. 대형스피커로 BGM을 틀어놓고 무대에 올라가 과잉된 감정을 몇 옥타브까지 올리는 것에 박수를 날려 주는 문인들의 시낭송회는 어딘지 모르게 촌스럽고 불편했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외국에 나갈 때마다 작은 공연이나 소규모 낭독모임에 뜬금없는 감동을 받곤 했는데, 고대 소포클래스 시절부터 낭독문화에 익숙한 유럽문화권에선 낭독은 그들에게 이벤트가 아닌 일상과 같은 여유가 있었고 곁에서 보면 그들은 책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을 향유하는 방식으로서 더 오랜 ’읽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가령 문인들이 주를 이루지 않아도 몇 십 년 이상 지속해온 작은 마을의 낭독모임을 수도 없이 보았고 노인이 되어서도 그 모임을 지속하는 모습에선 일종의 무긋한 구석이 나를 자주 매혹으로 이끌곤 했다. 문학과 책과 예술을 좋아하고 시를 좋아하는 우리부터 모여서 소리 내어 읽자. 다만 가능하다면 테크니컬한 음향에 기대지 말고 자신의 목소리로 라이브하게 깡깡하게 읽자. 가까운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우리의 호흡을 그대로 돌려주자. 문학은 숨 쉬는 경험이니까. 모여서 숨 쉬자. 연극적인 작업과 시쓰는 작업을 병행해 오던 내 문학청년시절은 쓰는 것과 소리 내어 읽는 것은 동일한 작업의 하나였다. 나는 언제나 소리가 살아야 문학이 산다는 작은 불씨를 품고 있는 조그만 덩치의 시인이었으니까.  

공간으로 찾아가는 라임 


십여 년 동안 낭독모임의 멤버와 이름은 수시로 바뀌곤 했다. 관객 없는 지하 클럽을 빌려 쓰기도 했고 공간을 빌려주는 카페구석이 되기도 했으며, 거리의 놀이터나 옥상에서도 했다. 이름도 텍스트 우드스탁(text woodstock)이 되었다가 일요시극장이 되었다가 지금은 펭귄라임클럽이 되었다. 그 사이 재주가 출중한 녀석들이 합류해서 낭독모임은 더욱 다양한 형태로 변해가며 즐거워져 갔고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관객도 조금씩 늘어갔다. 물론 그게 무엇이든 누구나 시작할 수는 있지만 지속하기는 어렵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자본의 메커니즘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생태계 놀이문화를 자신들의 판에 이식했고 급속도로 낭독회는 상품이 되기 시작했고 멤버들은 이벤트 낭독을 기획해주거나 그들의 기획에 세션이 되어 흩어졌다. 안타까웠지만 물살이었고 흐름이었다. 낭독이 활성화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어느 사이에 나 역시 출판사나 기획사의 수많은 낭독모임을 연출해주기도 했고, 그들의 이벤트에 신물이 나도록 불려다녔다. 우리의 제도권 교육에선 문학은 답안을 찾는 과정에 녹아들어가 있다. 소리 내어 읽을 시간이 없다. 어서 볼펜을 쥐고 행간에 밑줄을 그어가며 묵독으로 답안을 찾아야 하니까. 하지만 그 속에서 모범답안을 찾는 문학에 시달린 대중들에게 문학을 향유하는 방법으로서 소리 내어 텍스트를 읽는 것을 전달하고자 했던 내 의지 역시 점점 기형이 되어 간다는 사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숲에 모여 살던 토종의 다람쥐가 흘러들어온 청솔모의 난입으로 도토리를 빼앗기고, 심지어 잡아먹히다가, 종국엔 멸종이 되어가고 고유의 생태계가 파괴되어가는 기분이랄까? 감염은 사실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 도 없을 것이다. 낭독문화의 다변화과정을 놓고 이 시대를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립이나 사냥꾼과 포획자의 구도로만 집중시키고 싶은 생각도 크지 않다. 시스템은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작동되는 것일 테니. 다만 순정은 잃어버렸어도 잊지는 말아야 한다. 우리는 다시 소규모 낭독모임으로 돌아가는 운동을 해야한다. 펭귄은 걷지만 인간도 아니고, 날지만 물 속을 날고, 턱시도를 입고 있지만, 뒤뚱거리고 산다. 하지만 가장 추운 곳에서 살면서도 지구상의 생명체중에서 개체멸종을 가장 지혜롭게 견디고 있고, 눈과 입안에 얼음이 가득한 꽁꽁 언 새끼를 발등에 올려놓고 녹일 줄 아는 모성이 가득한 동물이다. 그들의 고유한 라임을 나는 존중한다. 조금 기우뚱 기우뚱 거리게 읽으면 어떤가? 조금 서툴게 쓰고 읽어도 우리는 서로의 낭독에 귀를 기울여준다. 한 달에 한번 우린 펭귄들처럼 모여서 총총. 자신의 라임을 읽는다. 당신도 사는 게 어색해지면 들려 달라. 조금 라임이 뒤뚱뒤뚱 할수록, 낭독은 좋지 아니한가? 


시인은 물리학자와 은유를 공유한다. 가설을 공유하며 그들은 미지의 세계 앞에서 매혹을 숨길 수 없다. 지금까지의 사실 앞에서 언제나 그들은 망설인다. 진실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어느 궤도에 멈추어 선 채 우주가 자신과 합승해주기를 바라며 끊임없이 히치하이킹을 하고 있다. 엄지손가락을 번쩍 세워 지나가는 자신의 착란을 멈춰 세우고 싶다. 시인은 자신의 언어를 타고 지상의 새로운 물리를 찾아 떠나고 물리학자는 자신이 발견한 것을 시인이 새로운 언어로 명명해주기를 바란다. 우주동반자로서 시인과 물리학자는 비행을 멈출 수 없다. 새로운 언어의 출현이 처녀비행이라면 새로운 물리의 출현은 처녀시의 재림지이다. 지금까지의 언어로는 답할 수 없었던 매혹이 있다면 당신은 이 비밀을 누설하고 싶은가? 이 비밀을 묻어버리고 싶은가? 시인은 난데없는 언어로 새로운 비밀을 만들어가는 자가 아니다. 시인은 새로운 비밀로 언어를 다르게 보이게 하는 자들이다. 모음 하나를 잃어버릴 까봐, 첫 이슬을 가진 모음을 기억하고, 희미한 음표들을 초대한 저녁을 어느 문장의 구석에 들여놓기 위해 자신이 가진 밤을 모두 쓸 수 있는 자들의 현기증이 있다. 아무도 없는 캄캄한 도시의 보도블록위에 내려앉아 알을 낳는 새가 있다. 그들의 이름은 시인이다. 말의 속살들이 너무 환해서, 언어의 첫 이슬들이 글썽거려서, 세상의 ‘사이’들을 서성거리다가 죽고 싶은 생명체가, 언어의 희끗희끗한 여울로 자신의 적요가 날아가는 자들의 합창이 여기 있다. 새로운 시인들의 참혹하고 명랑한 산책이. 밤마다 이 도시에 존재하는 시인의 다락방과 지하실에선 텍스트 우드스탁이 열린다. 나는 지금 당신의 어느 잠결을 뒤적거리는가? 

레몬에이드 상회 단골들


1700년대 말 파리 시가에서는 오늘날 살롱문화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른바 레몬에이드 상회였다. 물론 이미 기존의 파리의 커피하우스는 수백 개가 넘게 있었지만 본격적인 오늘날의 카페문화로 진화하기 전까지 좌판에 판매하는 레몬에이드를 마시며 사람들은 문화예술이나 가십을 주고받았다. 아라비아에서 건너온 기적의 음료처럼 레몬에이드는 급속도로 유럽에 퍼지기 시작했다. 당시의 팸플릿을 살피면 지방 유지부터, 공무원, 법조인, 식객, 도박꾼, 첩보원, 순진한 청년, 매춘부, 허풍쟁이, 황혼의 연인들, 문학애호가, 예술가등이 레몬에이드를 마시며 새로운 유행과 문화를 만들어 갔다. 카페 여주인이기도 했던 샤를로트 부레트 큐리(charlotte bourette-curee)는 <레모네이드의 시가(詩歌)(muse limonadiere)라는 두 권의 시집을 내기도 했다.그녀는 말한다. ‘카페의 구석을 차지하며 내 자신을 초월하는 태풍과도 같은 열정에 사로잡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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