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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호/집중조명/이정현/몽상의 언어로 적은 시인 'K'의 편지 - 김중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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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3
댓글 0건 조회 4,673회 작성일 15-07-09 14:13

본문

집중조명 
이정현

몽상의 언어로 적은 시인 ‘K’의 편지
-김중일론

                                     “그들은 벗어날 수 없겠지만, 그들은 만나고, 입 맞춘다.
                                          그들의 입속에 갇힌 작고 붉은 날개들이 아무런 감정도 
                                          고백도 없이, 격렬하게 잠시 뒤엉켰다 떨어진다.”
                                                                     - 「날개들의 추격전」 부분
                                                 
                                                               
1.

 ‘K’와 ‘k’는 아파트에서 창문 너머를 응시한다. 그들의 눈에 들어온 풍경은 견고한 무관심이 유일한 규칙인 수용소와 흡사하다. 그 풍경은 한편의 지옥도이다. 마치 엑셀 프로그램의 독립된 칸처럼, 각 층에는 이질적인 삶들이 무심히 전개된다. 시체가 썩어가는 방의 아래층에는 조리사가 요리를 하고, 그 아래층에는 가수지망생이 노래한다. 그 아래에는 해고당한 회사원이, 또 그 아래에는 불면증에 걸린 여자가 살아간다. 뼈아프고, 가망이 보이지 않는, 불안정한 공존(들). 김중일(시인의 이니셜 역시 ‘K’로 시작된다) 시인의 첫 번째 시집 『국경꽃집』(창비, 2007)에 수록된 시 「창문들의 소용돌이」에는 이런 풍경이 등장한다. 

 15 석양이 붉게 떨어지던 저녁, 비닐랩을 뒤집어쓴 냉
동육처럼, 창문에 얼어붙은 듯 서 있던 Y, 아직도 그대로 
있다.
 14 불꺼진 창문, 텅 빈 입속같이 눅눅한
 13 창틀에 팔뚝을 걸치고 달빛을 보다가, 하염없이 보
다가 피우던 담배를 자신의 눈동자에 비벼끄는 x.
 12 불꺼진 창문. 턴 빈 해골의 눈 속같이 캄캄한
 11 백년 전 전쟁에서 한쪽 눈을 잃고 달을 박아넣은 m
이 달을 보며 x 대신 고통스럽게 울부짖고.
 10 불꺼진 창문, 텅 빈 귓속같이 먹먹한, 오늘밤의 적
막은 너무 시끄러워 귀가 다 먹겠구나.  

 (……)

 5 엄마의 시체가 며칠째 썩어가는 방의 창문, 가장자리
에 눈곱처럼 나른하게 눌어붙은 얼굴이 노란 아이 c.
 4 어디서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지? 자신이 만든 요리
에 감탄하는 조리사 h.
 3 유행가를 흥얼거리며 창문에 불어넣은 입김이 사라
지기 전에 잽싸게 싸인 연습을 하는 가수지망생 j.
 2 회사에서 해고당하고부터 두문불출 이중창 사이에 
결재서류를 끼워놓기 시작한 사무원 s.
 1 언제부터였는지 두 짝의 창문이 눈을 부릅뜨고 죽은
시체처럼, 자신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다고 믿게 된 불면
의 여자 w.
                     - 「창문들의 소용돌이」 부분

  시집 『국경꽃집』에서 ‘K’는 주로 기형적이고 초현실적인 상황―공간에 놓여 있다. “구름이 구워지는 상점”에서 “장마 내내 말없이 구름만 구워”(「구름이 구워지는 상점」)내고 식당에 앉아서 끊임없이 음식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눈알들이 득시글득시글한 요리”(「창문 한 접시가 놓인 식탁」)를 주문하는 식이다. 퇴근하는 거리 위에서 ‘K’는 문득 “깊숙이 지상에 못 박힌 자신”을 인식하면서 죽은 후에도 “묘비 앞에 커다랗고 봉긋한 못대가리 하나”(「위험한 거리」)만 남아 있을 거라고 토로한다. ‘K’는 기이한 상황에서 사람들을 마주치고 바라보지만, 그들의 만남에는 ‘과거’와 ‘미래’가 없다. 그들은 오직 현재 안에서 이내 어긋나거나 그냥 흘러가 버린다. 그러나 시인은 냉소적으로 ‘K’를 관찰하는 위치에만 머물지 않는다. 일인칭의 ‘나’가 등장하는 시에서 화자는 과거와 미래를 언급하고, 어떤 ‘온기’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다. ‘나’가 그리워하는 세계는 ‘K’의 그것과는 다르다. 분열적이고 흩어지는 ‘K’의 세계와는 달리 ‘나’의 세계―‘국경꽃집’―는 흩어지는 기억과 시간이 간직된 ‘모래시계’이다. 또한 ‘국경꽃집’은 상처와 기억이 내재된 공간이기도 하다. 1부 ‘울적한 K군’과 2부의 ‘국경꽃집’은 부조리한 현실과 망명하고 싶은 과거로 대비된다. 기억과 상처로 생성된 ‘국경꽃집’의 원형적 이미지를 ‘나’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

 내가 어렸을 적, 개나리담장을 걸을 때마다 누나 생각
에 나는 국경꽃집이 되었다. 우리가 살던 파란 대문 집에
서 염색공장까지 한없이 이어지던 개나리담장, 누나는
그 길을 따라 출근했다가 얼굴이 노랗게 물들어서 귀가
했다 (……)

2

 사막으로부터 편지가 온 날이면 어머니는 새 빨랫비누
를 모조리 강판에 갈아 마당에 흩뿌리고 대청소를 했다
집 안 구석구석 비누냄새가 만개(滿開)했고, 편지봉투에
는 항상 석 장의 편지지 말고도 아름다운 사막의 모래알
갱이 몇알씩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 모래알갱이를 작은
유리병 속에 모으며, 모래시계를 만들었다 사진 속의 아
버지가 밟고 선 인피(人皮)를 펼쳐놓은 듯한 사막, 식물도
감에서 본 선인장 그 붉고 선연한 사막의 꽃 생각에 나는
국경꽃집이 되었다 (……)

4. 

 나는 어렸을 적부터 자주 국경꽃집이 되었다. 하루에
도 열두번씩 얼굴이 붉어지며 우두커니 서 있어야 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때마다 땡볕은 내 등줄기에 후끈
거리는 작고 뜨거운 봉창을 내고 도망갔다. 밤마다 꿈속
에서는, 포클레인에 압사한 대문 앞 버드나무가 제 몸속
에 칭칭 감아놓고 있던 나이테를 채찍 대신 꺼내들고, 무
섭게 바닥으로 질질 끌며 나를 쫓아오곤 했다. 
                                 - 「나는 국경꽃집이 되었다」 부분
 
  ‘국경꽃집’은 스러진 기억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염색 공장에 다녔던 이웃집 누나에 대한 기억, 열사의 사막에서 온 아버지의 편지, 그 기억의 알갱이들을 모은 ‘나’는 그것을 유년의 ‘모래시계’로 명명한다. 따스한 유년의 기억은 “포클레인에 압사”되었지만 ‘나’는 모래시계를 뒤집듯이 거듭 유년의 기억으로 내적인 망명을 시도한다. ‘K’가 가상의 기이한 시공간을 부유하는 데 비하여 ‘국경꽃집’에는 스러진 기억의 조각들이 존재한다. 그곳에서 ‘나’는 꽃을 태운 화력(花力)으로 몸을 녹이고, 칼을 담금질한다. 

 국경꽃집은 꽃을 파는 곳이 아니었던 거야. 거대한 꽃
들의 전당포. 담보로 맡긴 꽃이 시들기 전에, 빌려간 무
기를 사용하고 반납해야 하는 곳이었지. 나는 꽃집을 가
득 채우고 있는 각양각색의 무수히 많은 꽃들을 두려운 
눈으로 둘러봤어. 내가 어쩌다가 그곳을 지키게 되었는
지 모르지만, 지독히도 추운 곳이었어. 나는 벌벌 떨면서
끝내 찾아가지 않고, 얼어버리거나 스러질 듯 말라버린
꽃다발 하나를 벽난로 속에 던져넣었어. 불길 속에서 빨
갗게 다시 피어나는, 그 화력(花力)이 잠시잠깐 나의 몸을
녹여주었지. 신기한 건 인수인계 한번 받은 적 없는 내가
너무나 익숙하게 그 불길을 이용해 일본도를 담금질 했다
는 거야.   
                        - 「국경꽃집의 일일日日」 부분

  ‘나’는 꽃―기억―을 태운 온기로 견디려고 하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않는다. 스스로를 “단 한번만이라도 따뜻하게 안아보려”는 노력은 실패하고 만다. 시집 3부의 제목이기도 한 ‘기적의 혈맹당원들’은 그 온기를 되살리려는 ‘나’의 페르소나를 지칭한다. 3부에 담긴 시에서 화자들은 특히 불안정한 상황에 직면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골목을 걷는 “깡마른 노인”이 “실험을 기다리는 모르모트처럼 떨고”(「원나잇」) 있다. 둥근 어항을 안은 여자가 발을 헛디디고 “어항 속의 금붕어가 헛구역질”(「깨지지 않는 어항」)을 한다. 혈맹당원들의 아지트에는 “가족들이 이불을 둘둘 말고 실패처럼 뒤엉켜”(「기적의 혈맹당원들」) 잠들어 있다. 이들이 이렇게 으깨지고 처참한 지경에 이른 것은 “포클레인에 압사한 대문 앞 버드나무”라는 표현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4부 ‘태양건설’(주)에 수록된 시에는 ‘나’의 기억들이 폭력적으로 ‘제거(철거)’되는 장면들이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우리집 마당으로, 수양버들 길고 가는 가지로
이마를 질끈 동여맨 붉은 팔뚝의 인부들과 수양버들 일
가를 후송할 근육질의 화물바퀴를 동원하였다.
 우리는 우리집 마당 한가운데 수양버들이 있던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암종같이 검붉은 구덩이를 바라보았다,
대대로 해와 간통한 음부 그 깊고 축축한, 우물 같은 오
랜 집으로부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 「수양버들 속의 집 한 채 made by SMLC」 부분

  ‘나’는 끊임없이 기억의 안식처―과거―를 그리워하지만, 어린 ‘나’가 납득할 수 없는 이해관계로 인하여 철저하게 파괴된 상태다. 그래서 기억을 되새기는 ‘나’의 언어는 “촛불로 쓴 문자”와 “다 타버린 활자들”(「성」)로 표현된다. 간단하게 정리하기 어렵지만 김중일의 첫 시집 『국경꽃집』 1~4부를 시간적으로 잇는다면 2, 3, 4, 1부의 순서로 연결할 수 있을 것이다. 기억의 공간이 동의할 수 없는 세계에 의해서 파괴당한 후 ‘나’는 방황을 반복한다. 모래알갱이들을 모아 ‘모래시계’를 형성하고, 공장까지 피었던 개나리들은 이미 흩어져 버렸다. ‘K’는 안식의 공간이 파괴당한 채 과거와 현재 없는 만남, 즉 이방인들이 모여 사는 낯설고 기괴한 공간에서 살아간다. ‘K’의 세계는 ‘국경꽃집’이 없는, “시체를 유기한 땅을 다지고 다지고 다지듯/ 이상야릇한 울분”(「창문 한 접시가 놓인 식탁」)이 가득한 불길한 세계다. 그래서 ‘나’는 “모자를 뒤집어쓰고 잠이 들”어도 “잠든 밤엔 슬픈 꿈”(「슬픈 모자를 쓰고 잠들다」)을 어김없이, 반복한다. 어쩌면 ‘K’는 ‘나’가 그 슬픈 꿈에서 조우한 ‘나’의 페르소나일지도 모른다.

2.

 김중일의 두 번째 시집 『아무튼 씨 미안해요』(창비, 2012)에 그려진 세계는 『국경꽃집』에서 ‘K’가 등장하는 세계가 확장된 것으로 읽힌다. 『아무튼 씨 미안해요』에서 김중일은 우리가 사는 이 시공간을 ‘커튼콜의 세계’로 파악한다. 다시 말해서 공연(노래)이 끝난 이후의 적막과 권태가 지배하는 곳으로. 「커튼콜의 세계」에서 시인은 “공연이 끝나자 나는 태어났다”고 적는다. 

 줄거리도 없이 캄캄했던 공연의 막이 내려지자 나는 태어
났다. (……)

 어차피 객석에는 목이 석자씩 빠진 귀신들만 가득 찼어.
죽느냐 사느냐 그런 건 애초부터 관심 없지. 사랑을 속삭이
는 대사는 고리타분하고 교활해야 혀에 척척 감겼네. 커튼
을 젖히면 언제나 거기 있는 것들. 얼굴 없는 짙은 화장 역
겨운 향수 냄새. 목소리 없는 땀의 발성과 몸 없는 지루한 
의상. 누런 먼지 같은 햇볕을 잔뜩 뒤집어쓰고 오늘도 커튼
콜. 온종일 뛰어다녔더니 심장이 어느새 뚝 떨어진 석양처
럼, 내 왼쪽 옆구리까지 흘러내려와 있다. (……)

 공연이 끝나자 나는 태어났다
 달달 외웠던 대사는 한 줄 기억도 없고 
 내 바지 위에 당신이 쏟은 포도주와
 구둣발에 짓밟힌 몇 조각 악취 나는 치즈의 밤
                                      - 「커튼콜」 부분

  ‘커튼콜의 세계’에서도 계속 인간은 태어나고 살아가지만, 그것은 독창적이고 진보적인 삶이 아니라 앞서 살다간 이들의 ‘반복’에 불과할 따름이다. ‘나’는 “언젠가 정말 우리는 굳이 죽지 않고도 죽을 수 있지 않을까”(「이와 오」)라고 묻고, “지금까지 원형이라고 믿어왔던 몇 가지들”(「완벽한 원」)들을 회의한다. 뚜렷한 성취, 기쁨과 절망, 완벽한 법칙 따위가 제거된 상태에서 인간들은 살다가, 죽는다. 굳이 변화를 찾는다면 조금씩, 미세한 ‘변주’가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역사’는 무겁고 진지한 무엇이 아니라 쓸쓸하게 퇴폐적이면서 무기력한 슬픔이 내재된 개념으로 전락한다. 두 번째 시집에서 김중일은 ‘역사’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시 몇 편을 수록했다.    

 역사는 이빨에 오랫동안 피를 묻히지 않았다. 역사는 힘
쓰는 게 힘들다. 하루만 지나도 음식에 쥐떼가 들끓던 그해
겨울, 역사는 한때 스스로 이 마을의 징후가 되고 싶어했다.
마당에는 형에게 고용된 베테랑 철거반 땅거미들이 어둑
한 집 안으로 스며들어, 과묵하고도 은밀하게 마당으로 짙
게 드리워진 역사의 그림자를 뜯어내고 있다. 관짝 같던 그
림자의 일부가 뜯어지자 그 틈새로 역사의 부릅뜬 그러나
늙고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끔벅거렸다. 
 역사는 나이를 거꾸로 먹는 족속. 그가 우리를 낳고도 아
직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정말 아슬아슬한 일.
                                          - 「거짓된 눈물의 역사」 부분

  또 다른 시에는 아예 ‘역사’라는 무기력한 인물이 마을을 떠도는 장면이 나온다. “등은 꼽추처럼 굽어” 있고, “평생을 붙어다니며 고락을 함께했던 근육들에게도 버림 받은 지 오래”이며 거친 언어를 남발한다. 마을의 노파는 ‘역사’를 향해 말한다. “그자는 흡혈귀야.”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던 역사가 아직도 내던지지 못한 것은 “무거운 그림자”((「늙은 역사와의 인터뷰」)뿐이다. 기묘한 풍자가 지배하는 이 텍스트들은 시적 화자인 ‘나’의 지독한 염세적 세계관을 대변한다. 끈질기게 김중일의 시를 따라온 독자들이라면 여기에 이르러 탄식을 뱉을지도 모른다. 지겹다. 그렇다면 시인은 가망 없는 세계를 거듭 확인하기 위하여 시를 쓴 것인가. 그러나 “무기력하게 뒤섞이며 오직 배회하는 것에만 목숨을 걸고 있는”(「황색 날개를 달고 우리는」) 사람들이 가득한 세계에 공동적이고 지속적인 것이 틈입한다. 슬픔과 눈물이다. 개인적인 층위에 머물던 ‘나’의 언어는 어느 순간 확장되는 데 그것은 납득할 수 없는, 지독한 상실을 겪은 타인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씨 미안해요』에는 예외적으로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이 적힌 두 편의 시가 있다. 「잘 지내고 있어요」와 「눈물이라는 긴 털」은 각각 ‘서울 2009’, ‘용산, 천안함 그리고’라는 부제를 지닌다. 이 시의 부제는 자연스럽게 2009년 용산 사건과 진실에 대한 질문조차 금기시된 채 숱한 젊은이들이 수장되었던 2010년 천안함 사건을 상기시킨다. 여전히 몽환적인 시 역시 슬픔을 머금고 있다.

 아빠는 세상의 막다른 옥상에서 먹고살다 죽었고요
 지난 시간들은 다 불타 흐르기 마련
 지금보다 더 어리고 어려서 한없이 어려서
 내가 한점 공기였을 때, 그저 한평 공간이었을 때
 사랑을 나누던 그날 밤의 날숨이었을 때부터
 나는 무릎을 껴안고 둥글어지길 즐기는 아이 

 (……) 
 밤마다 심장이 한 덩이 구근처럼 격렬하게 뛰고
 아귀처럼 눈물을 빨아먹고
 심장에 묻힌 가는 다리는 무성한 가지를 뻗고
 시곗바늘이 잠든 아이의 표정을 빈틈없이 꿰매고 있다 
                                       - 「잘 지내고 있어요-서울 2009년」 부분

 이것은 이상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의 이상형은 털 없이 매끄러운 피부에 가급적 눈물의
숱이 적은 평범한 사람입니다
 
 어디쯤 잘라서 정리할까요?
 여기쯤? 아님 여기?

 시신의 일부 같은 저녁의 서쪽 하늘 아래서 어머니는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고 나면 온몸에 털이 무성해지는구나
 흑백사진 속 인화된 작약 같은 음색으로 어머니는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꿈속에 숨어서 혼자 많이 우나보다
                                     - 「눈물이라는 긴 털-용산, 천안함 그리고」 부분

 드물게 구체적인 시공간을 제시한 두 작품이 연상시키는, 현실의 처절한 슬픔은 독자로 하여금 김중일 시를 개인적인 몽상으로 해석하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우리는 이미 그 슬픔을 목격했으며 어떤 방식으로든 함께 앓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집의 2부와 3부에서 ‘체온’과 ‘불면’, ‘마음’과 ‘열쇠’라는 언어와 마주할 때 우리는 그것을 다른 층위에서 이해하게 된다. 고독하고 어두운 정서는 변함없지만 두 번째 시집의 후반부로 갈수록 시인의 언어는 점차 현실과 ‘마찰’한다. 그러니까 ‘체온’이 주는 온기를 다시 열망하는 방향으로. 이 과정을 이렇게 정리해보자. 따스한 기억을 상실한 채 ‘K’의 냉소적인 세계로 표상되는 악몽을 앓던 ‘나’는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긴다. 시간이 흐르고 ‘나’는 크게 흐느끼는 소리에, 악몽에서 벗어난다. 스스로에 대한 연민과 자의식의 미로를 헤매던 ‘나’는 타인들 역시 “꿈속에 숨어서 혼자” 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을 통해서 ‘나’는 지금 현재 자신의 삶이 타자의 삶과 깊이 연관돼 있음을 확신한다. 

 거친 해풍 속에 내걸린 해먹 위에 우리가 눕던 날
 해변은 해먹처럼 좌우로 흔들렸고
 당신의 큰 손은, 쓸모없이 버려진 열쇠들을 평등하게 다 받아주는 검은 자물쇠처럼
 손금의 굴곡이 어지러운 내 손을 잡아주었다
 손이 손을 잡는 것
 팔목에 매달린 단 하나의 열쇠와 열쇠가
 다른 손금을 포개는 것 새롭고 같은 굴곡을 갖게 되는 것
                                              - 「식어버린 마음」 부분

3. 
 
  두 권의 시집이 출간된 이후 김중일 시의 변화는, 일인칭 ‘나’의 세계와 이인칭 ‘너’의 세계가 나란히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두 세계는 깨지거나 흩어지지 않는다. ‘나’와 ‘너’의 세계를 파괴하려는 포클레인의 굉음 따위는 없다. ‘나’와 ‘너’의 세계는 함께―있음으로 공존한다. 

 여독 속에 내 무릎을 훔쳐 베고 잠든 너의 두 눈은 길고 아름다운 속눈썹에 덮여 있다. 꿈을 꾸고 있다는 건 꿈을 빌리고 있다는 것. 너의 감은 눈. 감은 눈은 달빛에 깊이 찔린 상처 같다. 너의 긴 속눈썹은 너라는 하얀 주머니를 급기야 꿰맨 자국이다. 감은 눈의 너. 지금 여기 내 무릎을 벤 너라는 주머니 속에는 나와 같은 부피의 죽음이 밀주密酒처럼 가득하다. 나는 누가 볼까봐 황급히 너의 눈을 두 손으로 꼭 틀어막았다. 내 손바닥의 수면 아래서 노오란 꿈들이 치어처럼 일얼이는 감은 눈으로 너는 우리가 기대앉은 나무를 보았다. 
                                                   - 「밀주」 부분, 월간 『문학사상』 2012년 8월호. 

 견고한 무관심으로 형성된 ‘K’의 기이한 세계를 기억하는 독자라면 이 변화에 놀랄 수밖에 없으리라. 냉소와 위악, 이물감으로 넘실대던 세계는 ‘너’를 그리워하는 ‘나’가 ‘우리’를 염원하는 세계로 바뀐다. 최근 김중일의 시는 상실이 야기한 악몽에서 ‘우리’가 머무는 세계로 이행되는 과도기를 통과하는 중이다. 시간에 대한 인식 역시 이렇게 바뀐다. 

 내 몸속에 둥근 도르래가 돌아간다. 내 둥금 머리와 무릎은 나와 공중을 잇는 도르래. 내가 가슴 위로 끌어당겼던 마음들 모두 방향 바꿔 하늘 높이 멀어졌다. 빙글빙글 맴돌며 멀어지는 도르래의 날들. 누군가 저마자 간절히 끌어당겼던 숨결은 멀어지고 대신 우리가 여기 태어난 것이다.
                                              - 「도르래의 날들」 부분, 월간 『유심』 2013년 8월호.

 이 변화의 동인은 무엇이었을까.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바로 “무작정 읽어주는 애인”인, ‘너’가 ‘나’의 곁에 머무는 까닭이다. 마지막으로 시인이 적은 아름다운 편지를 읽는다. 이 편지는 악몽에서 마주친 시인의 페르소나 ‘K’가 아닌 시인 ‘K’의 언어로 적은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 고드름처럼 자라는 열매가 있었다. 그건 잠든 시인을 안고 있는 애인의 눈꺼풀에 매달린 눈물, 불현듯 시인의 정수리로 뚝뚝 떨어질 뾰족한 운석, 시인이 한숨 많은 애인을 끌어안자 가슴 가득, 울음 참는 들숨처럼 스며드는 한숨의 애인, 오늘도 시인은 애인에게 보여줄 시를 썼다, 시를 받아든 시인의 애인은 한숨을 폭 쉰다, 이 시는 당장 읽지 않으면 금세 녹아서 사라져 버리겠지, 두 손이 부재의 기억으로 끈적이고, 기도를 멈출 수 없게 완전히 달라붙어 버리겠지, 시인의 애인은 시인을 먼저 살다 간 사람, 이제 시인이 살고 갈 사람, 한달 전에도 백년 후에도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사람은 여기 있다, 오늘도 시인의 애인은 시인의 시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창밖에는 막대사탕 같이 꽂힌 세상 모든 꽃송이들을, 초여름의 태양이 혼자 다 녹여 먹으며, 한자 한자 시를 읽고 또 고심하는 시인의 애인을 본다, 있잖아 내내 묻고 싶었는데, 시는 왜 쓰지, 너처럼 무작정 읽어주는 애인 때문에, 백지장 같은 얼굴로 시인의 애인이 말한다. 자신도 그런 시, 네게 무작정 읽히는 시, 불가피한 시가 되고 싶다고, 시인의 애인은 잠든 시인의 그림자로 매일 밤 드나든다 시인의 꿈속, 구석구석 애인의 체온이, 어디를 가든 시인보다 먼저 시를 찾아 헤맸던 애인의 메모가 적혀 있다, 시인이 가진 고독의 주머니가 희생자의 주먹을 넣은 것처럼 불룩해졌으면 좋겠어, 코앞에 펼쳐놓은 공기 위에 한자 한자 새겨져 불가피하게 읽히는, 이해할 필요 없는 시들이 세상을 무작정 가득 채웠으면,
 좋겠어.
                                             - 「시인의 애인」 전문, 계간 『시인동네』 2014년 봄호. 


*이정현: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중앙대 국문과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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