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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호/소시집/박병두/삶의 그 싸움에서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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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집
박병두
삶의 그 싸움에서
1. 지하실의 추억
학생 시절, 지하실에 끌려가
턱을 발길질당한 경험이 있는 은사의
연구실에 마주앉아 우리는 웃는다
그러길래 왜 말썽을 피우셨어요, 순순히 살지
갈라진 살 틈으로 팬티가 파고들고
배어나온 적혈구와 백혈구는 접착제 노릇을 해
맞을 때보다는 그거 떼어내는 게 더
머리털 곤두세우더라는 이야기 속에서
2. 만학의 덫
웃는다, 열 둘에 고향을 떠나
강화도 양계장으로 팔려갔다가는
구로공단에서 손가락 넷을 날리고
기름밥, 가다밥 인생 이십 여 년
중검 고검 대검을 거쳐 마흔이 되어서야
대학생이 된 사나이, 나도 웃는다
재학하느라 산더미처럼 빚만 불었다며
앞은 깜깜하고 연일 쫓기는 꿈만 꾼다며
암것도 아닌 대학, 뭐에 미쳐서
기를 쓰고 들어왔는지 모르겠다고
엄지만 있는 오른손으로 머리를 긁으며
그가 거울처럼 웃을 때 나도 껄껄 웃었다
3. 거북이
지하도에서 종종 만나는 사람
단 한가지의 메시지를 지닌 사람
무릎과 팔굼치와 콧등을 땅에 대
뒷통수와 등과 엉덩이와 종아리
몸의 뒷면만 보여주는 사람
단 하나, 손바닥만은 앞면인 사람
등 위로 먼지와 싸늘한 시선이 덮여
하루하루 등껍질이 두꺼워지는 사람
지렛대로 훌떡 뒤집으면
등껍질 무게 때문에
버둥거리다 버둥거리다
맨바닥에서 익사할 것 같은 사람
용궁을 그리워 한다는 사람
4. 무릎꿇기
폴란드 묘지를 방문했던 빌리 브란트처럼
공무원 발치에서 무릎을 꿇은 적이 있다고
중소기업하는 큰처남이 털어 놓았을 때
나와 동서는 소주를 병째 들이키며 크윽 웃었다
마흔에 낳은 외아들은 공무원 시킬 거라고,
사관학교나 경찰대학 보낼 거라고, 반드시
고시를 시킬 거라고…… 최초의 고백을 이미
성공시킨 사람이 무슨 말은 더 못하리
개처럼 번 돈 어디 한 번 정승처럼 써보자구!
모범 택시 타고 난생 처음 룸싸롱으로 이동하면서도
웃음, 크윽 웃음, 소주병을 입에 넣으며
5. 귀가
아버지는 다섯 해째 앉은뱅이
아버지는 다섯 해째 실명 중
아버지는 다섯 해째 똥싸개
아버지는 다섯 해째 중풍 환자
아버지 저 왔어요
-큰형? 큰형이 오셨나? 어서 오세요
몸은 좀 어떠세요?
-여보, 술상 좀 봐
저녁은 잡수셨어요?
-비 떨어지는데 빨래는 왜 안 걷는겨?
약 드세요, 아버지
-근데 영감님은 뉘셔?
화성 안녕리에서
새벽이면 노인의 비질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슬을 밟으며 출근을 서두르곤 했었다
입춘대길을 붓으로 써서
대문에 커다랗게 붙여 놓던 한옥
노인이 부친에게서 물려 받았다는 집
나는 방 한 칸을 빌어 살았다
보증금 없이 월 오만원이었던가?
스무 해쯤 전
박스 공장에 나가던 때
바둑도 장기도
잡기는 일절 모르고
된장을 잘 빚고
일품이던 미싱 솜씨,
화났을 때도 낮은 목소리로 말하던 노인은
젊었을 때는 좌파였다
총 들고 산으로 간 건지
산으로 가 총을 든 건지 모르지만
파르티잔
만나기로 했단다 친구를
월출산에서 헤어진 동창을
처마가 맵시 있게 휘어진 한옥에서
살아 남으면 잊지 말고 꼭
지금은 신도시
밀집한 아파트
이슬이 밟히던 길은
어디 갔을까
비질 소리 썩썩대던 한옥이
있던 자리는 어디쯤일까
노인은 이제 어디서
옛친구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늘일까 하늘일까……
펭귄
혹한 아닌 때가 없고
얼음장 아닌 곳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물려받은 시간과 터전
그렇다고 온대나
적도 근처에 가 살 수는 없다
극이라 불리우는 이곳
씻은 눈 또 씻어도
극점이란
보이지 않는데
여기를 끝이라 정하고
정복을 빙자하여
기를 쓰고 오다가 죽는 이가 적지 않다
여기는 다만
냉골에 익숙해진 원주민이
새끼치며 살도록 되어 있는 곳
한 치짜리 다리일지언정
네 다리로는 걸은 적 없다
하늘과 바다와
폭설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는 빙산
눈을 들어 눈을 들어 바라본다
살아 있다는 것은
직립을 위한 고단한 버팀일지도 모른다.
지동에서
내가 머물렀던 곳들은 하나같이
빗물에 젖은 시멘트 푸대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잔뜩 분 바른 나이 든 여자가
질질 울고 난 뒤의 얼굴을 하고 있다
여기 머무르던 빛과 뜨거움은
몇 사람의 가슴에 두레박 없는 우물만 남기고
부활을 기다리는 고집장이에게
돌아오지 않아, 라고 말하고 싶어서
소주집을 찾아 가는 중인데
노란 머리 삐끼들이 자꾸 앞을 막는다.
홍도에서
몇 집이 또
서울과 서울 근처로 떠나기 위해
이사짐을 꾸리는 동안
일곱살짜리와 아홉살짜리는
은빛 킥보드를 타고
방파제 위에서 도시 생활을
예행 연습하고 있었다
바다에서 바람이 불어와
민박집 지붕 선라이트를
우드득 뜯어내는데
노을, 바다에 비치는
시울같은 선홍빛 노을
시작메모
해남 가는 길
해남은 해외 남쪽인가
해남 가는 길
푸르던 내 마음 붉은 꽃으로 피어난다
아니면 바다의 남쪽인가
해남 가는 길
소금꽃 끝없이 피어나는 가슴
낙타등 같은 하루를 두드리며
해남 가는 길
발바닥에 물집 잡히듯 잡히는 그리움
해남 가는 길
가면 갈수록 끝없이 목마른 그 길
시집, 『해남 가는 길』 고요아침, 2013
‘땅끝마을 해남’이다. 누구나 마음의 끝자락에는 고향이 자리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내 고향을 읽는다. ‘해남 가는 길’은 닿을 듯 닿지 않는 끝이며, 피어난 듯 다 피지 못한 화원이었고, 그리움이 만든 아물지 않는 물집이기도 하다. 10여년 만에 펴낸 시집 전편에 세상이라는 염전에 피어난 소금꽃 같은 어머니의 젖가슴이 보이고, 낙타 등 같은 굴곡 많은 가족사를 말했다. 푸른 마음이 붉은 꽃으로 피어나는데는 어쩌면 못 다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걸어왔던 목마른 시간의 흔적은 아니었을까. 해남 가는 길이 어찌 나만의 고향길이겠는가? 어머니와 사랑과 한 시절의 아픔을 일기장처럼 아프게 진술했다. 아픔으로 아픔을 치유하는 따뜻한 슬픔을 만나보고 싶었다.
시마다 그리움이 있다 오랫동안 외도하는 글쓰기 방향을 돌아본다. 열망과 갈증 투성이인 젊은 나이에서 빠져 나와 영혼이 치유되는 곳으로 가고 싶어진다. 슬프고 아름다운 가을이 깊어가고 겨울이 왔다. 가여운 일들이 주변에서 많이 일어난다. 모두 우리 탓인데 누구를 탓하겠냐고 말하고 싶다. 思索의 창 공간들을 오랫동안 응시하며 삶의 이정표를 이제부터라도 그려보아야겠다. 살아갈수록 자신의 삶이 비본질적인 것에 의해 잡식당하고 있다는 가벼운 피해의식, 의기소침해지는 그런 때, 내 마음에도 소리 없는 비가 내린다.
*박병두 : 64년 전남 해남에서 출생했다. 한신대 문예창작학과, 아주대 국문과, 원광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5년 T.V방송 드라마 데뷔 후,《월간문학》.《현대시학》.《열린시학》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산문집『흔들려도, 당신은 꽃』외 3권, 시집『해남 가는 길』외 4권, 장편소설 『그림자밟기』외 2권이 있고, 고산문학상, 이육사문학상, 전태일문학상, 전남시협상, 경기문학상, 경기예술대상, 수원시문화상, 경기방송 경기인 대상, DMZ국제다큐영화제상, 에거사 크리스티상 등을 수상했으며,『수원영화협회』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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