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56호/신작시/최서림/사람은 죽어서도 싸운다 외 1편
페이지 정보

본문
신작시
최서림
사람은 죽어서도 싸운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위해
무덤에서 불려나와 대신 싸운다.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의 말을 찾아내어 싸운다.
사람은 죽어 썩어져도 말은 죽지도 썩지도 못한다.
죽은 자의 말이 창이 되고 방패가 된다.
왕권이냐, 민본이냐 이방원과 정도전이
아직도 TV에서 싸우고 있다.
미국식 자본주의냐, 제3의 길이냐 이승만과 조봉암이
지금까지 역사책 속에서 싸우고 있다.
개발독재냐, 민주주의냐 박정희와 장준하가
프레스센터에서 살기 등등 핏대를 올리고 있다.
세상은 말들의 싸움터,
이긴 말이 패배한 말의 배를 밟고서 히히덕거린다.
까맣게들 잊고 있다가
선거철만 되면, 좌우 할 것 없이 죄다
상주라도 되는 양 검은 옷들을 걸쳐 입고서,
효창동 외진 김구 묘소를 찾는다.
어치도 동박새도 민망한지 쓸쓸히 내려다본다.
역사는 산 자의 전쟁터면서 죽은 자의 감옥이다.
연극은 끝나도 막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관객들이 박수치고 고함지르며 일어나지 않는다.
배우들이 퇴장하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다.
출판기념회 도시
- 서울 풍경 60
그 많던 아마존의 나무들은 어디로 갔나
느긋하고 정갈하게 가려서 먹는
식물성 도시 부다페스트와는 달리,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잡식성 도시
서울은 각종 출판기념회가 난무한다.
시가 코카콜라처럼 쏟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아픈 도시라는 것이다.
소설이 햄버거처럼 소비된다는 것은
꼬이고 꼬인 사회라는 것이다.
책이 아웃도어처럼 알록달록 꾸며진다는 것은
그 속에 지혜가 결핍되어있다는 것이다.
누가 쓴 지도 모르는 책을 명함처럼 돌리고
정치인스럽게 돈을 끌어 모으는 세상,
아픔을 아는 시인일수록 출판기념회와는 멀다.
그 많던 보르네오의 나무들은 어디로 갔나
궁형을 당하고도 정치는 역사를 이기지 못한다는 믿음으로
이빨이 부러지도록 앙다물고 쓴 책,
징용 갔다 도망쳐 나오다 일본도에 맞은 아버지 같은 소설,
변두리 아파트 경비 보는 형 같은 시를 쓰는 시인들은
출판기념회를 열지 않는다. 책도 돌리지 않는다.
남태평양이나 천산산맥 원주민 동네엔 신문도 책도 없다.
산호초 사이를 누비며 작살로 가오리 잡는 것이 시다.
토굴 같은 집에 수줍음 많은 아이들이 불후의 명작이다.
전해 듣는 소문이 차마고도를 넘어 교환해 온
소금 같은 뉴스며 지식이다.
뉴욕이나 서울 사람들은 문자를 더 믿는데
바누와투나 위구르에서는 사람의 말을 더 믿는다.
*최서림 : 1993년 『현대시』로 등단. 『구멍』 『물금』 『버들치』 등.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추천0
- 이전글56호/신작시/최성민/몸살 외 1편 15.07.09
- 다음글56호/신작시/윤대현/함락구두 외 1편 15.07.0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