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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호/신작시/유정임/화성에 다녀오다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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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유정임
火星에 다녀오다
나무그늘 벤치에 앉아
시집을 펼쳐 읽고 있다.
별안간 공기가 찢기는 날카로운 소리들이 났다
눈을 들어 보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놀이터에
작은 어린아이들이 열 댓 명 모여 있다.
어린이 놀이터에 태양이 멈춰있다.
우묵장성 뙤약볕은 눈에 띄는 것마다 화인火印을 찍고 있다,
열린 미끄럼틀, 달팽이 미끄럼틀, 지붕이 달린 사각대,
서로를 잇는 구멍이 듬성듬성 뚫린 관으로 된 통로,
어린 아이들은 그 사이사이로 뛰어 다니며
괴성을 지르고 높은 소리로 말한다.
알아들을 수가 없다.
아무리 귀를 기우려도 모를 소리다.
풀 한 포기 물 한 모금 없는 사막,
화인에 찍힌 놀이터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미끄럼틀들은 보라색 노란색 빨간색으로 이글이글 열을 뿜는다
아이들도 얼굴이 벌겋다,
머리는 땀에 젖어 한데 뭉쳐 이리저리 갈라지고
손도 발도 빨갛다.
발밑에 모래알은 하나하나가 빛을 발한다
읽던 시를 보니 글씨들도 열에 들떠 모두 줄줄 흘러내리고 있다
알아볼 수가 없다..
<火印>, 두 글자만 뚜렷이 보였다.
여전히 아이들은 주술에 걸린 듯 서로 스치며 뛰고 소리 지른다
아이들은 곧, 하나 둘 쓰러질 것이다.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
나도 죽을 것이다.
문득
날카롭게 지르는 괴성 사이에서 <엄마>라는 소리를 알아들은 듯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입이 크고 뚱뚱한 여인이
아이들을 모아 사라지고 있었다
놀이터가 텅 비어있다.
적요하다.
바람이 분다.
나무그림자가 일렁인다
읽던 시에 화인이란 글씨는 보이지 않았다.
책을 덮고 일어섰다.
엇질, 중심이 흔들렸다.
한 말씀
소심란 분에 꽃대 4대가 올라와 꽃이 피었다.
꽃을 피움으로 그는 절정이다
그에게 향기로운 한 말씀 일러 달라
머리 조아려 코를 들이민다.
그는 까딱도 않고 향을 피울 듯 말 듯 무심하다
몇 번을 부탁해도 그는 말을 삼간다
너도 그랬다
말하라 하면 먼 산을 봤다
일러 달라 하면 별 것 아닌 양 웃을 듯 말 듯
그렇게 몇 십 년을 함께 살았다.
군자는 어디 가셨는가
선비는 왜 입을 다무셨는가
허긴 너무 많은 소리에 귀먹은 적도 있었다
코 막힌 적도 있었다
무심한 오후, 문득
이 방, 저 방, 거실
어디를 가나 잔잔한 향기로운 한 말씀으로
걸음을 멈추게 한다
한 말씀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듣는 것이라 기억하게 한다
돌아본다
거기 부처 蘭 무심하다.
*유정임 : 2002년 리토피아 봄호 등단. 시집 ⌜봄나무에서는 비누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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