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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호/기획대담/임태훈∙장이지/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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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대담
임태훈/장이지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 미디어 · 도시 · 문학
■ ‘우애’ 이후
장이지(이하 장):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종종 보는 사이입니다만, 이렇게 또 마주 앉게 되는 일이 생겨서 더 반갑습니다. 임태훈 씨가 2년쯤 전이던가요, 『우애의 미디올로지』(갈무리, 2012)를 출간했을 때부터 이런 자리가 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것이 오늘에야 실현이 되었습니다.
‘미디어’의 사상에 대해 논하는 자리에 ‘우애’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하고 혼자 감탄을 한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책에는 ‘복사기’를 매개로 한 운동권의 기억 같은 것들이 세심하게 배치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데올로기가 주인공이던 시대를 뒤로 하면서, 임태훈 씨는 미디어를 주인공으로 하면서 그 미디어에 깃들여 있는 이데올로기의 기억을 곱씹고 있었다고 기억합니다. 헌 책의 물질성에 대한 이야기도 있어서, 제가 그 부분에 대해 아주 공감했다고 전에 말씀 드리지 않았어요?(웃음)
『우애의 미디올로지』에서 이제 2년이 흘렀고, 또 다음 책의 출간을 준비하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우애의 미디올로지』를 내놓고 그동안 어떻게 사셨는지 궁금합니다. 얼마 전에는 박사학위논문도 쓰셨잖아요?
임태훈(이하 임): 말씀하신 것처럼 ‘미디어’가 저의 화두입니다. 박사 논문까지 썼으니 이젠 빼도 박도 못할 단계에 이르렀네요.『우애의 미디올로지』를 내놓은 뒤에 몇 가지 변화를 겪었습니다. 십 년 연애 끝에 결혼했고, 신혼 생활의 개막과 함께 박사 논문을 썼습니다. 그냥 남편이랑 살아주는 것도 힘든데, 수험생 남편을 참아준 부인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많은 이들과 함께했던 변화는 인문학협동조합 설립입니다. 조합 설립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한 해가 2013년이었어요. 준비위 단계에서 제가 발기인 대표였고, 설립 이후엔 미디어기획위원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조합을 지속적으로 운영하는 일은 조합 설립보다 몇 배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헤쳐 나가야 할 일은 점점 더 어렵고 복잡해지고 있는데, 시간은 점점 더 빨리 흐르네요.
『우애의 미디올로지』 이후에 함께 쓴 책으로는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푸른역사, 2013), 『옥상의 정치』(갈무리, 2014), 『불순한 테크놀로지』(논형, 2014)가 있습니다. 인문학협동조합 조합원들과 기획한 책도 올해 하반기 중에 나올 예정입니다. 우리 시대의 ‘연애’를 주제로 한 책이지요. 저의 단독 저서로는 『(가제) 호모 익스펙트롤 : 빅데이터 시대의 인간』이라는 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11월 말쯤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책 제목은 바뀌게 될 것 같습니다. 호모 어쩌고 하는 책이 워낙 많아서요. 이 책은 정보자본주의 비판론이면서, 인문학적 통찰로 정보통신기술의 미래를 생각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장 선생님을 뵙게 되면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진심으로 오늘의 만남을 고대하며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선생님의 『라플란드 우체국』(실천문학, 2013), 『환대의 공간』(현실문화, 2013)은 비평적 사유와 창작의 양 트랙에서 웹 기반 사회, 데이터베이스 소비를 탐구한 보기 드문 시도였기 때문입니다. 『라플란드 우체국』의 ‘플랫’ 연작은 에드윈 애보트(Edwin Abbott)의 고전 SF 『플랫랜드Flatland: A Romance of Many Dimensions』를 생각나게 했습니다. 모든 것이 납작한 2차원 세상에 살던 주인공이 1차원과 3차원 세계를 여행하면서 느끼는 당혹감을 다룬 소설이지요. 우리의 일상도 디스플레이 화면에 비친 2차원 평면 세계(=플랫)에 실제의 삶이 끼워 맞춰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라플란드 우체국』의 ‘플랫’ 연작은 정보자본주의의 일상 세계를 예리하게 포착한 탁월한 임상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FRMS에 기록된 숫자에 맞춰 멀쩡한 공구를 망가뜨려야 하는 군발이의 업무, 문자 메시지로 해고 통지를 받는 우리 시대 불안정 노동자의 하루를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정보자본주의의 황량한 플랫랜드에서 어떻게 해야 차원 이동을 할 수 있을까. 저는 이 문제를 문학보다는 미디어에 기울어져 고민하고 있습니다. 문학은 저에게 존재 구속이면서, 제 기울어짐에 특이성을 부여하는 원심력 같은 무엇인가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문학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버리더라도 홀가분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습니다. 아마도 그런 일이 자의든 타의든 기어이 벌어지고야 말 텐데 말이죠. 언젠가 사석에서 장 선생님이 이런 말씀 하셨잖아요. “앞으로 계속 시 안 써도 괜찮아요.” 아주 홀가분하게 그런 말씀을 하셔서, 그 순간이 저는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도 언젠가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싶더라고요.
장: 언제나 느끼는 바지만, 임태훈 씨는 참 성실하게 읽고 또 쓰는 분인 듯합니다. 제 작품에 대한 관심, 고맙습니다. 애드윈 애보트의 작품은 언젠가 한번 찾아서 읽어보고 싶은 내용이로군요. 임태훈 씨랑 만나다 보면 재미있는 SF 작품에 대해 꼭 한두 가지씩은 얻어듣고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내심 기대를 하게 되지요(웃음).
‘미디어’라고 하면 넓은 의미에서는 ‘문자’도 미디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라면 ‘문학’도 미디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임태훈 씨가 하고 있는 작업은 ‘문학이라는 미디어’의 틀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문학이라는 미디어’의 바깥에 대해 사유하는 사람과 만난다는 것은 왠지 두근거리는 일입니다.
‘자본’이나 ‘자본주의’라는 말이 무섭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 말들은 어떤 말과도 잘 어울리니 말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사회의 모든 국면을 그 ‘자본’이라는 말로 재조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를 재조직하면서, ‘자본주의를 만들어냈고, 또 그것을 향유하고 있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고 있습니다. ‘정보자본주의’라는 말도 자본주의의 이 괴물스러움을 잘 보여주는 말 같습니다.
정보자본주의의 황량한 세계에서 벗어나는 ‘이동’이라고 하는 모험은 매력적으로 들립니다. 아마도 연말쯤 되면 독자들이 임태훈 씨의 그 모험을 따라가면서 읽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사실 그 모험의 귀결에 대해서 논하는 자리는 아니고, ‘근대의 몰락 이후’ 임태훈 씨가 ‘우애’라는 사상으로 돌파하고자 했던 세계로 되돌아가서 ‘도시’와 ‘시[문학]’에 대해 재론하는 자리가 되겠습니다. 좀 따분한 일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논의를 통해서 어쩌면 ‘우애의 사상’이 왜 다시 ‘정보자본주의의 세계’에 대면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에 대한 내적 필연성에 가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임: 오랜만에 장 선생님을 뵙는 자리라서, ‘문학’이 갈수록 어렵기만 하다고 어리광부리고 싶었는데 안 받아주시네요. (웃음)
첫 책의 핵심어로 ‘우애’를 내세웠을 때, 다들 좀 의아하다는 반응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절 지켜본 분들은, 이 인간의 취향은 ‘우애’ 따위의 착한 낱말일 리 없다는 걸 아셨으니까요. 『우애의 미디올로지』에서 말하는 ‘우애’는 원만하게 서로의 입장을 이해해주면서 어깨동무하며 살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딴 건 관심 없어요. 이 세계의 본디 혼돈 상태에 격렬히 접속하는 모든 극한의 시도에 붙이는 격투의 슬로건이 ‘우애’에요. 이질적인 성질들이 카오스모스를 이루며 얼마든지 얽히고 서로 파괴할 수조차 있는 근본적이고 철저한 포옹의 조건이지요. 영화 「파이트클럽」을 보면, 모처에 사내들이 모여 서로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패다가 종국에는 테러리스트 결사체로 성장하잖아요. 저는 그들이 서로의 몸을 다루는 방식이 좋았습니다. 전염을 통해 번식하는 뱀파이어나 늑대인간의 생식법에 비교할 만하지요. 제가 말하는 ‘우애’는 새로운 몸을 만들어내는 방법입니다. 이 시대엔 몸과 사물을 다루는 방식에 매뉴얼이 정해져 있어요. 이건 먹지 마라, 만지지 마라, 쳐다보지 마라, 듣지 마라, 가지 마라…… 열심히 돈 벌러 다녀라, 스펙 쌓아라, 뭐 그런 것들. 우리가 살아가는 체제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기본 매뉴얼이죠. 이걸 행동 능력의 차트에 쭉 적어보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한정된 목록일 겁니다. 이 굴레에서 벗어나는 일은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체제의 직선에서 튕겨 나갈 수 있도록 누군가/무엇인가에 계속 부딪히고 힘껏 때려줘야 해요. 함께 흥미진진한 고장(breakdown)을 일으키는 거죠. 정보자본주의는 이런 리스크를 절대로 허용하지 않습니다. 갈수록 인간은 예측 가능하고 탁월하게 통제 가능한 자원으로 관리 육성되고 있습니다. 그런 몸뚱이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워야 하며, 싸움의 무기를 발명/발견해야 한다는 것이 ‘우애의 미디올로지’입니다. 이 말이 연극 대사라면 지문에 이런 지시를 덧붙이고 싶네요. 험상궂은 표정으로 이죽거리며 발음할 것!
■ 시장의 논리에 포위된 도시에서 상상력을 말하다: ‘옥상과 파상력’
장: ‘우애’는 일종의 농담이면서, 농담에 그치는 것은 아닌 셈이네요. ‘우애’는 어깨동무는 아니지만, 모종의 화학적 결합을 통해 전혀 다른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니까요.
『옥상의 정치』(갈무리, 2014)라는 재미있는 책을 발견했습니다. 어떤 풍속사 같은 느낌을 주는 제목인데, 막상 읽어보니 시대의 토포스(topos)로서 ‘옥상’을 발견해내는 기획이더군요. 이 위상학적인 기획 아래 정치와 사회, 문학, 건축이나 미술 등의 영역을 가로지르는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책의 도입부에는 황경민이라는 분의 ‘옥상’과 관련된 시가 실려 있어서 상당히 놀랐습니다. 시가 시집이나 문예지를 벗어나 이렇게 인문사회 서적에도 실릴 수 있구나 하는 놀라움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 시들이 ‘옥상’에 관한 소박한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어서 좋았습니다. 고압적인 엘리트주의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임태훈 씨는 이 책의 기획에 대해 잘 알고 계실 것 같은데, 이 책과 관련하여 독자들에게 들려줄 만한 에피소드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임: 『옥상의 정치』 기획은 시 전문계간지 『신생』의 편집위원이자 <공감 힘>의 큐레이터인 김만석 선생님이 제안하셨습니다. 원래는 2013년 12월 부산에서 처음 기획된 전시 기획이었어요. 그런데 이 기획이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서울, 광주, 대구, 대전 등 5개 지역에서 같은 주제의 전시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출판 계획은 2월 초부터 본격적인 논의가 이뤄졌어요. 그리고 『옥상의 정치』가 3월 말에 출간된 거죠. 다른 기획이었다면, 이렇게 급하게 진행되는 일정에 참여하려 하지 않았을 겁니다. 박사 논문을 쓰던 시기라서 시간 여유가 없었어요. 하지만 김만석 선생님에게서 ‘옥상’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바로 이거다, 무릎을 쳤어요. 기획서도 감동적이었습니다. 기회를 놓치고 후회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옥상의 정치』에 실린 10편의 시는 황경민 시인의 작품입니다. 페이스북 하시는 분들 사이에선 ‘헤세이티 쥔장님(주인장님)’으로 유명하신 분이지요. 부산 ‘헤세이티’ 카페의 매니저이세요. 이분은 카페 입간판에 독특한 글쓰기를 해오고 있습니다. 페이스북에도 동시 게재되는 글이라서 매번 좇아 읽고 있습니다. 얼마 전엔 이런 글이 실렸습니다. “리얼리즘이든 초현실주의든 또 무슨무슨 경향이든 사진은 그 너머를 찍고, 그림은 그 너머를 그리고, 노래는 그 너머를 부르는 것이다. 현실을 쫓는 것은 예술이 아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살아내려는 고투 없이 ‘예술’을 입에 담을 일이 아니다.” 장 선생님이 말씀하신 고압적인 엘리트주의에 대한 비판이면서, 『옥상의 정치』에 참여하신 여러 선생님과 공유했던 ‘옥상’의 지향점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옥상의 정치』에 실린 황경민 시인의 작품에 대해선 솔직히 아쉬운 마음이 큽니다. 입간판 글쓰기에서 느껴졌던 강렬함이 덜 느껴졌으니까요. 집필에서 출판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워낙 속도전으로 이뤄진 탓에, 이 시인의 강점을 살릴 섬세한 시각적 편집이 부족했어요. 황경민 시인의 글은 칠판, 대자보 등에 육필로 적힌 상태로 봐야 더 크고 격렬한 목소리로 상상되거든요. 아날로그 글쓰기가 디지털 사진에 찍혀 페이스북에 공유되는 현상도 흥미롭습니다. 시를 어디에 쓰고, 어떻게 전달하고 공유할 것인가, 다시 말해 미디어 실천/실험의 문제는 무엇을 어떤 언어로 쓸 것인가 만큼 중요한 과제이니까요.
장: 현실을 따라가는 것은 예술이 아니고, 예술은 항상 그 너머를 노린다니 대단하군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네요. 황경민 씨는 예술을 진짜 사랑하는 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옥상의 정치』에 게재된 작품이 실력 발휘가 덜 된 작품이라고 해도,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좋은 작품들이 조금 더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옥상’이라는 공간은 2009년 이래로 용산 참사나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사태 등을 연상시키는 정치적 함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조정환 선생님도 지적하고 있으시지만, 원래 ‘옥상’은 상자 같은 근대적 건물의 외부에 존재하는 ‘잉여 공간’으로서 노동자들이 “노동에서 일시 벗어난 소비시간에는 자본가들보다 물리적으로 더 높은 곳에서 더 넓게, 더 멀리 볼 수 있는 조건을 창출”(「잉여로서의 옥상과 잉여정치학의 전망」)할 수 있는 상징적인 공간이었습니다. 그 전망을 ‘옥상 권력’이 폭력적으로 침해한 것이 앞에서 언급한 사건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정환 선생님은 ‘옥상 권력’에 의해 ‘옥상’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다시 지상으로 내려오는 길은 재포섭의 길이 아니면, 죽음으로의 추락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을 하고 계시더군요. 그러면서 제3의 길을 모색하는 형국이었습니다만.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그들 ‘옥상’으로 내몰린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생명’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들에게 ‘생존’이 아닌 ‘생명’을 돌려줄 정치는 무엇일까 하는 고민이었던 것 같습니다.
조정환 선생님은 우리 시대에 대해 미디어보다 몸이 더 필요한 시대라고도 하셨습니다. ‘희망버스’와 같은 실천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조정환 선생님의 ‘옥상의 정치학’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저는 어떤 쪽인가 하면, ‘옥상’을 대문자 ‘정치적’인 의미에만 묶어두는 것은 오히려 재미가 덜하다는 쪽입니다. 재미라는 말을 써서 좀 안됐습니다만.
임: 조정환 선생님이 「잉여로서의 옥상과 잉여정치학의 전망」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신다고 하셔서, ‘잉여’에 어떻게 접근 하시려나 궁금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잉여’는 독특한 뉘앙스의 단어잖아요. 손창섭 소설이나 맑스 경제학에서 말하는 ‘잉여(surplus)'와는 다르죠. ‘짜파구리(너구리 라면에 짜파게티 라면을 섞어 끓인 음식)’ 같은 양가성이 있는 말이죠. 소위 ‘잉여’들이란 자기 비하와 체념에 허우적거리는 부류이지만, 명랑한 감성과 출중한 유머 감각의 발신자들이기도 합니다. ‘잉여력’이라는 말도 재밌습니다. 취직이나 돈벌이에 도움이 안 되는 능력은 뭐든 ‘잉여력’ 취급을 받으니까요. 단언컨대 사회가 잘못된 거죠. 인간의 다양한 능력을 감당할 그릇이 안 되는 사회 따위는 ‘사회’라고 부를 가치도 없죠. ‘잉여력’ 충만한 작품 중에는 레전드급이라 할 만한 것들이 수두룩합니다. ‘잉여’, ‘잉여력’에 대해선 할 말이 아주 많지만, 조정환 선생님의 글에 대해 평하자면, 유머 감각이라곤 한 방울도 느낄 수 없어서 불만이었습니다. 운동권 문건처럼 읽히더군요. 미간에 힘을 주고 긴장해서 읽어야 했어요. 배우고 깨달아야 할 점이 많은 내용이었지만, ‘잉여’들이 호감을 느낄 글이 아니었습니다. 장 선생님은 “재미라는 말을 써서 좀 안 됐습니다만”이라고 하셨지만, 그건 정말 중요한 지적입니다. ‘용산’과 ‘쌍용차’가 내몰렸던 상황을 두고 ‘재미’를 논한다는 건 무척 불편한 일입니다만, ‘재미’, ‘웃음’이 포괄하는 감성, 감정의 영역은 폭이 넓습니다. 어쨌거나 조정환 선생님의 글에 변화를 바라기보다는, 우리 세대 중에 80년대 운동권 문건처럼 쓰는 글이 있다면 따끔하게 이건 아니지 않으냐고 말해주고 싶네요. 그게 도대체 누구 읽으라고 쓰는 글입니까? 특정 필자를 겨냥해 하는 말이라기보다, 저 자신의 글쓰기부터 무척 불만족스럽습니다. 제 글에는 ‘잉여력’과 ‘재미’가 충분치 않습니다. 내 글을 읽어줄 사람에 대한 실감, 디테일을 몰라서 그런 거지요. 그들은 나와 함께 2010년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더 많이 만나고 함께 웃고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지요. 물론 치고 박고 싸워도 봐야 하고. 미디어보다 몸이 중요하다는 말의 의미도 이런 점에서 되새겨보고 있습니다.
장: 임태훈 씨가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제도권 글쓰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지요. ‘잉여력’과 ‘재미’가 충분하지 않아 스스로 불만이라고 하셨지만, 그것에도 다양한 갈래가 있고 정도가 있을 겁니다. 임태훈 씨의 글에 저는 상당한 재미를 느끼고 있는데 말이지요(웃음).
아무튼 이 책에 임태훈 씨는 「옥상과 파상력」이라는 글을 실었더군요. ‘파상력(破想力)’이라는 조어는 조금 낯선데, 그것은 김홍중 선생님이 처음 쓰신 말인가요? “용산은 파상력, 즉 꿈에서 단호하게 깨어나는 힘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고 하는 대목에 밑줄을 그으며 읽었습니다. 임태훈 씨는 들뢰즈를 원용하면서 상상력에 대해서 어떤 의문을 표시하고 오히려 ‘파상력’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필요한 개념이라고 주장하고 있으십니다. 판타지에서 깨어나 ‘리얼’을 직시하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주의환기는 매우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 저는 ‘리얼’의 과잉에 조금 더 아쉬움을 느끼는 편입니다. 사람들은 문학이 더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많이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 스스로도 SNS를 통해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발신하고 있고 말이지요. ‘세월호 사건’ 때 확연히 문제가 되었습니다만, 어떤 의미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의 과잉이 혼란을 자초한 면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해 공론을 만들어간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문제들을 동어 반복적으로 환기하는 데 그친다면 그 의미는 반감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회적인 사건들에 대해 우리가 진짜 해야 할 일은 그 사건 옆에 어떤 ‘픽션’을 놓아보는 일이지 않을까요? ‘리얼리즘’과 ‘리얼’, 혹은 ‘리얼리즘’과 ‘일상’이 혼동되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이 ‘픽션’에서 오히려 리얼리즘의 가능성을 생각해보는 일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파상력’이라고는 하지만, 그것도 역시 또 다른 의미의 상상력이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현실에서 이상(理想)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 직시는 자칫 현실수리에 그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임: ‘파상력’은 김홍중 선생님이 벤야민적 사유의 핵심어로 제안한 신조어입니다. ‘상상력’과 ‘파상력’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는 좋은 예가 있습니다. 오손 웰즈의 미완성작 <돈키호테>의 미편집 시퀀스 6분입니다. 오랫동안 소문으로만 전해지다가 1990년 이탈리아에서 필름이 발견됐는데, 지금은 유튜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영상입니다. 아감벤의 『세속화 예찬』(난장, 2010)의 마지막 장인 「영화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6분」이라는 글에 이 영화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이런 장면입니다. 간단히 설명해볼게요. 돈키호테가 극장에서 영화를 봅니다. 스크린에는 무장한 기사들이 말을 달리고 있습니다. 그때 갑자기 어떤 여자가 나타나요. 스크린 속에서 말입니다. 그녀는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돈키호테는 갑자기 일어나서 검을 빼 들고 스크린으로 돌진합니다. 큰소리를 지르며 스크린을 마구 찢어요. 스크린에는 여자와 기사들이 보이지만, 검은 균열이 점차 커져 이미지들을 무참히 먹어치웁니다. 마침내 스크린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됩니다. 스크린을 떠받치는 판자만 보이게 됩니다. 관객들은 돈키호테를 마구 나무라며 극장을 떠나지만, 발코니에 있는 어린아이들은 돈키호테를 열렬히 응원합니다.
‘상상력’과 ‘파상력’은 대립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김홍중 선생님은 이 둘이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체험이라고 하셨지만, 아감벤은 상상력 그 자체를 파괴하고 속이게 되는 지점까지 상상력을 사랑하고 믿는 게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아감벤적 의미에서 ‘파상력’은 가장 격렬한 상상력인 거지요. 박근혜정부가 강조하는 ‘창조경제론’에서 ‘상상력’은 돈벌이에 도움이 되는 상상력에 한정됩니다. 영화를 보되 스크린(체제)을 찢어선 안 된다는 규칙입니다.
그런데 아감벤이나 김홍중 선생님의 논의와 별개로, ‘상상력’이라는 말이 사회적으로 몹시 오염돼 있어서 참아줄 수가 없네요. 신자유주의자들이 즐겨 쓰는 어휘는 다 피해 쓰고 싶습니다. 하지만 거의 모든 단어가 시장의 마케팅에 포위된 세상입니다. 우리 시대를 둘러싼 스크린 너머의 어둠을 응시할 신조어가 필요합니다. 스크린을 찢어낼 파상력의 칼날도 필요하구요. 다름 아닌 문학이 해야 할 일이지요.
장: 그렇군요. 왜 신조어를 내세우고 있는지 알겠습니다. ‘창조경제’라는 말을 들으면서 왜 ‘상상력’은 ‘돈’과 관련되어야 인정을 받을까 그 생각을 저도 했거든요.
임태훈 씨는 건축에도 관심이 있으신가요?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파크’(이하 DDP)에 대해 상당히 큰 저주를 보내고 있던데요(웃음). 아닌 게 아니라 건축의 세계적인 흐름은 “작은 도시, 저층, 저탄소, 낡음, 폐허의 저(低)”(구마 겐고×미우라 아쓰시, 『삼저주의』, 안그라픽스, 2012)라고 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주장도 있더군요. 박원순 시장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장’이 되겠다고 공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건축이야말로 명민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최종학문’ 비슷한 것이 되고 있다는 인상도 있습니다. 저는 건축이라기보다는 도시에 대해 관심이 큰 편입니다. 「사랑의 변주곡」에서 김수영(金洙暎)이 “욕망이여 입을 벌려라 / 거기서 사랑을 발견하겠다.”라고 한 것이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데, 그 시구에는 사실 매우 훌륭한 도시론이 개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시가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거기에 여러 욕망들이 혼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욕망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랑’은 관념에 그쳐버린다는 것이 김수영의 메시지라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는 서울이 딱히 좋은 도시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울이 무척 재미있는 도시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욕망들이 충돌하고 있고, 그것이 긴장감을 만들어내지요. 또 그것은 서울이 지닌 역동성의 동력인지도 모릅니다.
임: 아니요, 서울은 금욕적인 도시입니다. 여러 욕망이 혼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돈벌이의 욕망이 다른 모든 욕망을 짓누르고 있지요. 서울 어딜 가도 아파트 숲입니다. 아파트가 서울의 일상에 최적화된 주거 공간이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게 아닙니다. 재산 증식 수단이에요. 돈 넣고 뻥튀기는 장치를 빈 땅만 생기면 촘촘히 박아 넣은 겁니다. 박해천 선생님이 『콘크리트 유토피아』(자음과 모음, 2011),『아파트 게임』(휴머니스트, 2013)에서 분석하신 것처럼, 대한민국에서 아파트는 계급 상승의 에스컬레이터였습니다. 이 시스템이 유지되는 한 이 도시의 삶과 재미는 한계가 뻔합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이 시스템은 시효가 다했습니다. 선배 세대, 부모 세대가 했던 것처럼 아파트를 짊어지고 어떻게든 버티다 보면 중산층 되고, 부자 될 수 있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제가 DDP를 싫어하는 이유는, 끝나 버린 시스템이 다시 재개될 거라고 믿는 이들의 발악이 바로 이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DDP에 쏟아 부은 막대한 돈은 탈(脫) 아파트공화국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 사용해야 했습니다. 어떤 분야의 학문을 공부했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살아내려는 고투’를 준비하려는 이들이라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장소, 풍경, 건축을 예의주시해야 합니다. 가장 큰 돈이 휘몰아치는 곳이 가장 첨예한 싸움이 필요한 전선(戰線)입니다.
■ DDP의 정보사회학, 그리고 시의 정치
장: 임태훈 씨가 있는데도, 서울이 금욕적인 도시일까요?(웃음) DDP가 어떤 전선으로서 의미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반대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가령 DDP와 같은 건축물을 있게 한 사상과는 별개로, 그 곁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 풍경에서 전혀 다른 인상을 품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인상은 쉽게 계측할 수 없는 것이지요. 저는 그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물론 지나치게 관조적인 생각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큰 돈이 몰리는 곳에 전선이 생긴다고 하셨지만, 저는 돈이 안 몰리는 곳에서 임태훈 씨가 전선을 만들어 주리라고 믿고 있었거든요. 신나게 잉여력을 발산하면서요. 그렇다면 서울도 금욕적이라고는 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요?(웃음) 기왕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꺼낸 김에 아즈마 히로키(東浩紀) 이야기도 해봅시다.
아즈마 히로키라면 ‘DDP’야말로 일상과 이어져 있고, 그것이야말로 ‘리얼’이라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상지도(思想地圖)β』(Vol.1)의 「쇼핑물적 도시의 미래―도시와 테마파크의 사이」라는 좌담회에서 그는 대형 쇼핑몰이야말로 미국화하는 세계의 어떤 일상―그것을 글로벌리제이션이라고 해도 상관은 없겠습니다―과 이어져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그러한 아이디어에 대한 찬반을 떠나서 쇼핑몰의 공공성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의미가 아주 없지는 않다고 봅니다. 도시가 점점 테마파크처럼 변해가고 있으며, 그것도 아주 철저하게 테마파크화하고 있다는 것은 소름 돋는 일입니다.
임태훈 씨는 아즈마 히로키의 견해에 대해서는 쉽게 동의하실 것 같지 않습니다. ‘일상’을 소비주의의 측면에서 재구성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소비주의의 측면을 제거하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 일인가, 혹은 설사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소비주의의 양상이 거세된 현실도 일종의 환상에 그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난관도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임: ‘쇼핑물적 도시의 미래’는 솔직히 식상한 프레임입니다. 2000년대까지는 이 프레임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많겠지요. 하지만 2010년대 서울이 겪고 있는 변화를 포착하려면 다른 틀이 필요합니다. DDP와 서울의 문제를 두고 말한다면, 'BIM'이라는 정보화 기술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DDP에 큰 돈 들어갔다는 비판은 여기저기서 많이 들을 수 있지만, DDP의 BIM(Building Information Modeling)에 대해선 다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무심합니다.
다소 말이 길어지겠지만, BIM에 대해 설명을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네요. 일반 대중에겐 낯선 용어지만 세계 건축 업계에선 뜨거운 이슈입니다. 건축을 정보 집합체로 인식하고, 컴퓨터를 이용해 건축을 생산할 수 있다는 개념이 BIM을 통해 현실화됐습니다. BIM 기술은 대상물뿐 아니라 절차와 자원을 함께 고려합니다. 구조, 지반, 도로, 수자원 등의 설계에서 공정 관리, 시공 후 관리까지 건축에 관한 모든 정보를 통합하지요. 사용할 수 있는 자원에 대한 내용을 초기부터 고려할 수 있는 통합적인 틀이 제공되기 때문에, ‘CAD’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입체적인 정보 모델링이 가능합니다. 건축가의 스케치를 정확한 치수로 정리한 그림 수준이 CAD라면, 정보 모델링 기술을 사용하는 ‘BIM’에선 화면상의 선과 면은 중력을 지니고 물질화되며 실제 실현되는 현실로 이어집니다. 건축가가 입력 데이터의 관계를 일일이 설정하지 않더라도, 데이터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가치를 부여받아 스스로 ‘정보’가 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BIM을 건축가를 위한 만능 레고 블록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3차원 형상 데이터에 모든 건축정보가 담기고, 그 정보가 건축 프로세스의 각 단계와 분야에서 사용되는 도구와 공유됩니다. 이 과정을 거치며 추가된 정보는 다시 BIM 도구로 통합돼 겹겹의 입체적 정보 모델을 이루게 됩니다. 그런데 ‘BIM’이 실제 공사 현장에서도 적용될 수 있으려면, ‘BIM’에 입력된 정보와 현장의 정보가 정확히 일치해야 합니다. 정보화 사회의 불길한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현장의 모든 정보가 오차 없이 BIM에 상세하게 반영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실제 공사 현장 또한 BIM의 알고리즘에 맞춰져야 하는 거죠. 특히 후자의 문제는 건설 현장의 노동 강도와 속도, 리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일례로, DDP를 설계한 자하 하디드의 또 다른 대형 프로젝트인 카타르 월드컵 경기장 건설 현장에서는 이주 노동자들이 죽음의 행렬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2010년부터 올해까지 무려 974명이 사망했습니다. 카타르는 사실상 노예제도가 유지되고 있는 나라인데, 카타르 월드컵 건설 현장의 노동 환경과 인권 유린 실태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비교될 지경입니다. BIM 시스템에 이러한 인권의 문제를 입력할 수 있을까요? DDP 건설 과정에서 쫓겨난 영세 노점상의 눈물겨운 사연을 BIM에 반영할 수 있을까요? BIM은 이런 언어를 알지 못합니다.
디지털 정보를 교환하고 가상 구현하기 위해선 건설, 기계, 전기, 정보통신 영역이 융합하는 시장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영역간의 주도권 경쟁입니다. 상호 협력관계와 정보의 공유, 기술 공동 개발 등이 이루어지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당분간은 각각의 영역이 의도적인 경계를 이루며 정보 교환에 비협조적일 것입니다. 정부에선 억지로 이 벽을 뚫어버리려 하고 있죠. 이것도 ‘창조경제론’입니다. ‘BIM’과 같은 예의 시스템 통합 도구가 건설업계뿐만 아니라, IT 산업과 접목이 가속화되고 있는 자동차 산업을 비롯해 사회 영역별로 등장할 것입니다. 이것들이 한 데 연결되어 이루는 최종적인 통합 시스템의 구축은 각국 정부가 국가 비전으로 내세우고 있는 기획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BIM 건축의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받는 DDP는 다가올 사물 인터넷 시대를 예고하는 개선문이기도 합니다. 이 주제에 대해선 하반기에 나오게 될 새로운 책에서 본격적으로 다뤄볼 계획입니다.
장: 아즈마 히로키 이야기를 꺼낸 것은 ‘시와 정치’ 담론에 대해 반성해보고 싶어서입니다. 그 담론은 미래파 담론 이후에, 한국문학계에서 제법 이슈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명박정부의 실정과 ‘2013년체제’에 대한 열망과 함께 그 담론은 힘을 얻었습니다만, 내용에 있어서는 상당히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논의가 대문자 정치와는 거리를 두면서도, 종국에는 ‘정치’의 외연을 넓히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시와 정치’라고 하면 으레 촛불집회나 용산참사와 같은 ‘사건’들로 귀결됩니다. 방금 말씀하신 카타르 월드컵 경기장 건설 현장의 비극도 물론 가슴 아픈 사건이지만, 사건을 나열하는 방식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이면에는 BIM이라고 하는 일반인들은 아직 잘 모르는 정보화 시대의 개념도 끼어들고 있는 형국입니다.
‘시와 정치’는 ‘도시’라는 토대 위에서 그 관계를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소비주의로 점철된 ‘도시’든지, 혹은 정보관료에 의해 빈틈없이 통제되는 ‘도시’든지 말이지요. 이제 우리는 이 ‘도시의 철학’에 대해 동조할 것인지, 아니면 도시에 대한 ‘다른 철학’을 모색해야 할 것인지 결단해야 하는 시점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결단은 시의 내용적인 면에 변화를 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매우 중요한 변화가 될 수도 있겠지만, 더 시스템적인 문제에 주목할 필요도 있습니다.
임: 휴대폰에서 자동차, 건물, 인공위성, 냉장고 등등으로 연결된 네트워크를 질주하는 아톰 비트의 입장에서 모든 장소는 단 하나의 지평으로 융합하고 있습니다. 가장 무서운 일은 그 모든 연결을 내려다보는 권력의 출현이지요. 이런 세상에서 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시가 네트워크의 정상적인 작동을 방해하거나, 오류를 일으키는 ‘버그(bug)'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시‘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기대보다는, 그런 일을 일으킬 수 있는 프로그램 언어가 ’시‘로 발견/발명되길 바랍니다.
■ 발명된 ‘시’의 시간
장: 시가 이 자본주의 네트워크의 ‘버그’가 되어야 하리라는 생각에 동의합니다. 현재의 시는 대형 출판자본에 기생하고 있는 형국입니다만, 또 모르죠, 열심히 기생하다 보면 그것도 일종의 ‘충(虫)’ 역할을 할지도 말입니다. 그런데 ‘시’가 새롭게 ‘발견/발명’되어야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하상욱이라는 분이 웹에서 쓰던 글을 모아서 시집을 내는 것을 보고, 차라리 시집을 안 내는 것이 더 멋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 일이 있습니다. 저는 SNS에는 별로 기대를 하지 않는 편입니다만, 그 속에서도 어떤 시의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가능성이 다시 종이책으로 귀환한다면, ‘도로아미타불’인지도 모르지요.
제도권에 대한 유혹을 쉽게 뿌리치기는 어렵습니다. 아까 우리는 제도권 글쓰기에 대해서도 잠깐 웃으면서 언급한 셈입니다만, 자본주의의 포위망을 벗어나 제도권에서 탈출하려는 방식 중 ‘협동조합’ 같은 것도 있습니다. 연구자들이 연구실을 벗어나 전공과는 상관없는 시민들을 만난다는 것은 참 의미 있으면서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우애’의 한 방식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관념 속의 ‘우애’와 실제의 ‘만남’은 항상 일치하지만은 않지요. 임태훈 씨는 ‘인문학협동조합’이란 것도 만들어서 열심히 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역시 어려운 일이지요?
임: 100년 전, 식민지 지식인들은 근대적 문해 능력을 익히고 배웠습니다. 이 땅에서 근대문학이 태동할 수 있었던 장면들이기도 하지요. 오늘날엔 프로그래밍 교육을 정규 교과로 편입하는 나라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창조경제론’의 일각에서도 초등학교에서부터 ‘코딩(coding) 교육’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코딩 언어’가 제2의 세계 공용어가 될 테니, 국가적으로 준비해야 한다는 거죠. 제 생각에도 코딩 교육은 대단히 중요하고, 하루빨리 정규 교과로 편입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까지 힘주어 주장하지 않더라도, 머지않은 장래에 초등학교에선 가나다라, 구구단과 함께 컴퓨터 프로그래밍 방법을 배우게 될 겁니다. 이 아이들이 만들어갈 미래의 문학은 뭘까요? 그때까지도 SNS에 시를 쓰고, 그 시가 종이책으로 묶여 나오는 수준에 머물러 있진 않을 겁니다. 사서삼경이나 읊던 고루한 선비들이 근대 문학의 새로움에 충격 받았던 일을 가까운 미래에 우리도 겪게 될 겁니다. 인문학협동조합의 활동 역시 미디어 격변과 함께 닥치게 될 지식 생태계 변화에 대비하려 합니다.
장: 미래의 문학에 대해 상상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겠군요. 한편으로 저는 구한말의 시골노인 같은 기분에 빠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미래의 문학이 제 문학과 전혀 다른 그 무엇이 되리라는 예측 때문입니다. 왠지 그 미래의 문학이란 것이 제 손에 있는 것보다는 안 좋은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심술궂은 생각도 들긴 해요(웃음). 미래 문학으로의 이동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이미 시작된 셈입니다.
문학과 관련된 ‘팟 캐스트’나 각종 문학콘서트 들도 의미가 있는 움직임입니다. 그러한 것들도 제도권으로 회수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저는 조금 우려하고 있습니다. 일단 상품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대형 자본은 이것을 포섭하거나 도플갱어 같은 것을 만들어내 버리곤 합니다. 그러한 포섭도 의미가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대형 출판사의 매개 없이 ‘팟 캐스트’나 작은 문학콘서트가 동네마다 자리를 잡아가는 일이 더 좋은 일인지도 모릅니다. 얼마 전 문인들이 주축이 되어 기획한 심장병 어린이 돕기 플리 마켓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저는 이런 작은 행사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문학과 도시, 그리고 시와 정치에 대해 두서없이 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두서없는 진행이어서, 임태훈 씨에게 미안한 생각이 앞섭니다. 그러나 관심사가 다른 우리 두 사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문학과 도시와 관련하여 제법 흥미로운 지점이 부각되기도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시지 못한 이야기가 많이 있겠지만, 미진한 부분에 대해서는 임태훈 씨가 다른 지면에서 열심히 이야기해주시리라고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눈 이야기가 어떤 출발의 계기가 되었으면 하고 조심스럽게 기대해 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여쭤 봐도 될까요?
임: 탐욕적인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무려 서울에서요. (웃음)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시도는 해보려 합니다.
장: 긴 시간 좋은 이야기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임태훈: 문학박사. 미디어 연구자, 문학평론가, 인문학협동조합 미디어 기획 위원장. 주요 연구 분야는 로우테크 미시사, 사운드스케이프 문화론, 정보자본주의, 미디어 행동주의 등. 대표 저작으로『우애의 미디올로지 : 잉여력과 로우테크(low-tech)로 구상하는 미디어 운동』(갈무리, 2012),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공저, 푸른역사, 2013), 『옥상의 정치』(공저, 갈무리, 2014), 『불순한 테크놀로지』(공저, 논형, 2014) 등이 있음.
*장이지: 본지 편집위원. 2000년 『현대문학』신인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안국동울음상점』(랜덤하우스, 2007), 『연꽃의 입술』(문학동네, 2011), 『라플란드 우체국』(실천문학, 2013), 평론집으로 『환대의 공간』(현실문화, 2013) 등이 있음. 제2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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