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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호/책 크리틱/백인덕/교감하는 영혼의 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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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3
댓글 0건 조회 3,219회 작성일 15-07-08 16:02

본문

책 크리틱
백인덕

교감(交感)하는 영혼의 전율(戰慄)
- 박희진 시집 『영통(靈通)의 기쁨』, 강우식 연작장시집 『마추 픽추』


1.
시의 가치와 위의(威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시적 개념이나 시단 내부의 어떤 문제적 상황에 직면해서라기보다는 시를 쓰며 살고 있는,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한국어로 한국적 정서와 정신적 지향을 노래하고 있는 여기-지금의 순간이 위태롭고 지극히 위험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미국 시인 휘트먼은 “위대한 시는 아주 오래오래 공동의 것이고, 모든 계급과 얼굴색을, 모든 부문과 종파를, 남자만큼이나 여자를, 여자만큼이나 남자를 위한 것이다. 위대한 시는 남자나 여자에게 최후가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다.”라고 시의 존재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 ‘공동의 것으로서의 시’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향유(享有)하며 전파(傳播)하고 계승(繼承) 해야 할 시의 가치는 어떤 것들이어야 하는가. 되물어 본다. 현실비판도 좋고, 내면 탐구도 좋지만 결국 그것은 ‘시인의 영혼의 순례자’라는 측면에서 찾아내야 할 것이다. 사실 우리가 직면한 그 모든 생명경시 사태가 종국에는 메마른 영혼들의 비틀린 표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태풍이 몰려들기 직전의 광영(光榮)과도 같은 빗줄기 두어 차례를 여기-지금 만날 수 있다. 시작(詩作) 반세기를 전후로 하는 두 분, 박희진 시인과 강우식 시인의 새로운 시집들은 생의 비의(秘儀)로써, 또는 문명의 자양분으로써 ‘영혼의 교감’을 전율적으로 되살려내고 있다. 어쩌면 개인에게, 나아가 우리 공동체 전체에 던지는 가장 뼈아픈 진단과 처방일지도 모르는 시적 직관이 흘러넘침을 확인할 수 있다.

2.
박희진 시집 『영통의 기쁨』은 시인의 서른다섯 번째 시집이 된다. 이 사실로부터 미뤄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우선은 시인의 유려하고 끊임없는 창작 의지이지만, 나아가 이번 시집이 매우 다양한 형식들의 집합체일 것이라는 점의 확인이다. 실제 7부로 이루어진 시집은 때로는 소재를 따라서, 때로는 4행시, 17자시와 같은 형식적 실험을 따라서, 때로는 시적 교감의 발원 방향에 따라서 각기 다른 갈래로 묶여 공작의 오색 꼬리처럼 빛을 발한다. 하지만 그 꼬리들이 보는 방향과 광원(光源)에 따라 아무리 다르게 보일지라도 결국 공작의 한 몸(一如)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듯이, 시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말 그대로, ‘영혼의 교감’을 지향하고 있다.

어느 시인 말하기를
사람은 왜 이 세상에 왔는가?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
아니다, 아니다.
참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다.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을 만났을 때
사람은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된다.
온몸이 후들후들 기뻐서 떨게 된다.

영혼은 영혼과의 불꽃 튀기는 만남을 통해
둘이 하나 되는
백금白金의 불길로 활활 타오른다.
-「영통靈通의 기쁨」 전문 

시인은 이 표제작을 통해 이번 시집, 나아가 자서에서 ‘나의 사업’이라고 밝히고 있는 시작 전체를 일관하는 한 지론(持論),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을 만났을 때/사람은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된다.”는 일종의 감화론(感化論)을 보여준다. 이런 발언은 사실 시적 진술이라는 측면을 떠나 박희진 시인의 생활과 사유의 면면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더 큰 울림으로 들린다. 시적 현실과 시적 지향이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되어 있는 드문 경우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우리 사회의 여러 병폐를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자신의 문제처럼 인식한 사람들도 역시 큰 울림으로 떨게 할 것이다. 이는 단순한 당위적 발언이 아니라 근원적 진단과 처방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땅에 ‘혼의 울림’을 항시 불러 일으켜야 하는 시인은 어떠해야 하는가?

바람도 없는데
스스로 무르익어 떨어지는 도토리와
그것을 받쳐주는 너럭바위가 없다면
어떻게 톡! 소리가 나랴

흐르는 물 기운과
그것을 막는 바위들 없다면
물은 어떻게 희희낙락 환장하며
하얗게 속내를 드러낼 수 있으랴?
-「비의(秘儀) 6」 전문

여기서 보이는 ‘도토리/너럭바위’와 ‘물 기운/바위들’의 관계는 소위 ‘부귀영화’를 바라는 사람들이 파악하는 장애(障碍)의 모습이 아니다. 도토리가 바위에 떨어져 말라죽으면 후세대의 더 많은 열매를 기약할 수 없고, 물 기운이 바위에 막혀 흐름이 지체된다면 더 빨리 바다에 도달할 수 없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너무나 당연시 하도록 강제당한 경제적 인식의 한 단면일 뿐이다. 숲에서 들리는 ‘톡’하는 소리와 계곡물이 드러내는 ‘하얀 속내’야 말로 ‘참사람’으로서 우리가 향유해야 되는 진정한 교감의 순간들일지도 모른다. 우리 존재야 백 년 남짓 시간에 또 다시 형(形)이 바뀌고 말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연작의 다른 작품에서 박희진 시인은 “시인은 스스로의 영혼의 구조 따라/한 편 시를 낳을 수밖에,/왜 좋은 시엔 영성의 향기가 충만해 있는지/알 만하지 않겠는가”(「비의(秘儀)8」)고 되물으신다. 비록 ‘영성’라는 한 단어로 함축시켰지만, 시인의 ‘영혼의 구조’는 장애나 지체를 두려워하기 보다는 순간순간에 집중하는 직관에 의지하여 열려있어야 함을 두 편의 작품을 통해 보여준다. 이처럼 이번 시집에는 ‘미래의 시인들’에게 들려주는 노시인의 진정어린 충고가 해학과 잠언의 형태로 가득하다. 

3.
강우식 시인은 연작장시집, 『마추픽추』의 본문 마지막 편에 수록된 「여적(餘滴)-마추픽추를 쓰기까지」를 통하여 이번 시집을 쓰게 된 동기와 과정, 지향점, 또한 시인 스스로가 부여한 시적 성격 등에 대해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아마도 이번 시집과 같은 형태가 시인 개인적으로는 매우 드문 경우이고, 나아가 지금까지 시인이 진행해 왔던 ‘여행시’의 완결이라는 시 작업상의 감회가 남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작품에 앞서 그 부분을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한다. 

“이 시는 보다시피 마추와 픽추의 슬픈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써간 사랑 시다. 맞추와 픽추는 믿고 싶지 않은 당신과 나이기도 하지만 한편 누구나 내재된 욕망 속에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당신이고 나다. 시에서도 밝혔듯이 ”모든 꿈같은 만남이란/광활한 우주공간을 유영하다/도킹하는 우주선처럼 맺어지는 순간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사랑에는 그런 불가사의한 신비함과 시계보다 더 정확한 필연의 순간이 있기 때문에 문학의 영원한 테마이리라. 마추와 픽추는 그런 사랑을 살다가 간 사람이다. 나는 그러므로 이 시에서 사랑을 살다가 사랑을 못살아서 헤어진 사랑을 노래하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 황홀한 사랑의 극점을 살아가려한 자유인을 노래했다.”

이번 시집이 문명시라는 소재적 함축이나 여행시라는 분류상의 특질보다 ‘슬픈 사랑에 초점’이 맞추어진 ‘사랑 시’라는 주제적 특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인용문의 마지막 단락에 밝힌 바대로, “황홀한 사랑의 극점을 살아가려한 자유인”의 초상이 시집 곳곳에 투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자유인’이야말로 마추픽추를 여행했던 시인 강우식의 모습이면서 동시에 이번 시집을 여행하는 독자들의 모습일 것이다.

시간여행을 한다.
나는 마추픽추라는 지명이
성인동화 속 주인공 이름이라 상상한다.
마추픽추는 늙은 봉우리.
마추라는 이름의 늙은 총각과
픽추라는 꽃 봉우리 같은 처녀와의
사랑의 내력으로부터 따 온 이름이다.
-「3. 돌이 있어 꿈꾸었던」 부분

마추는 남자 거시기에 좋다는 마카를
남몰래 먹는 스물다섯의 노총각.
화성에 기적처럼 착륙한 우주탐사선이 듯
픽추의 땅에서 흙 맛은 좋은지
물은 있는지 산을 넘고 강을 건너는 잉카.
픽추는 이제 막 성인식을 치른
와나바나 잼 같은 열네 살 꽃 처녀.
라일락 꽃향기가 빗속에 물드는 저녁이면
그 빗물에 치렁한 머리를 감던 잉카 처녀.
-「3. 돌이 있어 꿈꾸었던」 부분

전체 16부로 이루어진 시집에서 「1. 서시 콘도르의 큰 날개가」와 「16. 에필로그 콘도르의 큰 날개가」를 제외한 14부를 서사의 구성 단계로 다시 정리해보면, 앞의 인용부분은 사건의 ‘전개’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 성인동화 속 주인공 이름이라 상상한다.”라는 전제를 통해서 이번 작품이 사실 정보보다는 시인의 상상에 의해 구조화된다는 것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인용 작품들의 ‘진하게’ 표기된 부분이 상상에 의한 서사 줄거리의 진행을 표시하고, 나머지 부분은 알려진, 혹은 오늘날 남은 잉카족 문명의 일반적인 정황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지리적으로 페루의 ‘마추픽추’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오지의 관광지다. 시인의 개인적 여행 동기와 경로 등은 자세히 나와 있지 않다. 아마도 중요하지 않다는 판단에 따른 결과일 것이다. 반면에 시인은 몇 개의 상징을 통해 끊임없이 ‘마추픽추’를 오늘의 우리 문명 가까이로 불러들이려 시도한다. 가령 에필로그와 프롤로그에 등장하는 ‘콘도르’의 경우를 보면, 일차적 정보로 잉카제국의 모든 황제를 총칭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콘로르킨가’라는 어휘에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은 잉카인들이 신성시했던 토템이지만 동시에 높은 곳에서 마추픽추 전체를 조망(眺望)하겠다는 시인의 태도를 표시한다. 나아가 깊이 숨겨진 의미 하나를 더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시인이 ‘마추’를 ‘스물다섯의 노총각’, 픽추를 ‘열네 살 꽃 처녀’로 설정한 이유와도 결부되는데, 시인은 한 문명에 대한 앎, 아니 정신적으로 황홀한 사랑의 극점과 같은 것은 문화, 제도, 관습의 이름으로 강제된 윤리적 표면 아래까지 파볼 수 있어야 그 전모가 드러난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시인은 “나는 나름대로 우리시에서 찾기 힘든 온갖 부도덕하고 배은적인 근친, 난교, 사드, 마조 등을 두루 섞었다”라고 이번 시집을 관통하는 ‘슬픈 사랑’의 모습에 대해 밝히고 있다. 우리 문학의 도덕적 엄숙주의는 아직도 이런 어휘 자체를 배척하고 백안시하지만. 문제는 왜 이런 장치들이 사용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깊은 고민과 이해의 자세 유무일 것이다.

사랑의 완성을 추구하는 미완이 아니었으면
한동안 뜨거운 활화산이었다가
한순간 배신의 냉정한 얼음이 아니었으면
어이 다시 피어날 수 있는 장미꽃이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을
항시 인간은 저지르면서도 사랑으로 뛰어넘는다. 
-「15. 마추와 픽추는」부분

이번 장시집 서사의 마무리에 해당하는 앞 인용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인이 여러 비윤리적인 장치들을 서사에 도입한 까닭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을/항시 인간은 저지르면서도 사랑으로 뛰어넘는다”는 어떤 진리, 어쩌면 역사적으로 반복된 사실을 좀 더 선명한 이야기로 들려주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박희진 시인은 열려 있는 ‘직관’을 통해, 아니 그 직관적 발견의 참된 소통을 통해 우리가 장애나 지체를 두려워하지 않는 참된 자세를 가져야 함을 보여주었고, 강우식 시인은 사실에 얽매이지 않는 활발한 ‘상상’을 통해, 문명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 행위의 깊은 곳에 파묻힌 본성의 본 모습을 이해함으로써 우리가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시적으로 형상화해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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