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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호/책 크리틱/박남희/부새의 날개로 새기는 육필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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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3
댓글 0건 조회 3,972회 작성일 15-07-08 16:03

본문

책 크리틱
 박남희

<박무웅 시집 『지상의 붕새』서평>

 붕새의 날개로 새기는 육필의 시


  1. 몸의 사유와 이목구비의 상상력

 시를 포함한 이 지상의 모든 글들은 인간의 사유를 먹고 자라는 ‘생각의 나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생각의 뿌리는 몸이기 때문에, 몸은 글의 중심이 되는 제재이면서 동시에 존재론적 발원지이기도 하다. 특히 시는 몸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장르이기 때문에 시의 언어는 대부분 몸의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그 몸은 다시 자아와 타자의 몸으로 나눌 수 있다. 시인은 자신의 몸의 눈을 통해서 타자를 바라보고 타자의 몸에서 자기동일성을 찾아내는 자들이다. 물론 시인은 자신의 몸에서 타자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러한 시인의 눈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거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시인은 새로운 발견과 깨달음에 이르기도 한다. 
  시인의 몸은 본질적으로 결핍의 몸이면서 충만을 지향하는 몸이다. 그러므로 결핍과 충만 사이에 시인의 언어가 존재한다. 시적 언어는 끊임없이 꿈을 꾸면서 무수히 좌절하는 언어이다. 시인은 꿈과 좌절 사이에 그물망을 걸어놓고 날개를 기다리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몸의 감각기관인 이목구비를 동원해서 날개의 푸드덕거림을 감지하는 자들이다. 여기서 시인을 거미로 비유한다면 거미줄은 시인의 언어인 셈이다. 거미는 공중에 거미줄을 걸어놓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지상의 존재이다. 시인 역시 공중과 지상을 아우르는 존재로서 현실과 이상이라는 두 기둥에 언어의 거미줄을 매달고 있다. 
  박무웅의 시집『지상의 붕새』는 제목만 보아도 시의 거처를 공중과 지상에 두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거미에게 배우다」에서 시인은 거미를 통해서 시인의 삶을 몸소 체득하고 있다. 시인은 처음에 “직조의 무늬가 있는 투명한 거미줄은/ 공중의 날개 같다”고 하여 이상적인 시관을 피력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온전한 시인의 길을 가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도시의 이쪽과 저쪽을 묶어놓고/거미줄에 스스로 걸려들”어 현실적 거미가 되는 길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거미가 된 시인은 위태롭게 출렁이는 거미줄에 매달려 시인의 길을 조망하면서 “내 속에서 나온 가느다란 길을 나는 믿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이라기보다는 천라지망天羅地網의 한계를 스스로 인식하고 힘겨운 시인의 길을 걸어가려는 자기다짐 같은 것이다.    

말은 눈에 보이지 않는 칼 
꼭 다문 입술을 방패로 갖고 있는 칼
가끔 안쪽의 어금니처럼 이빨 빠지는 칼
의중이라는 손잡이를 갖고 있는 칼

사람을 많이 만나본 사람은 
말의 칼을 지닌 검객을 안다  
비스듬히 날을 감추고 있는 칼집 같은 속내를 안다

검객은 말의 이치를 모르는 척 눈치를 보기도 하고 
모호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짐짓 바둑판을 어슬렁거리며
흰 돌과 검은 돌을 만지막거린다
딱! 단수를 치기도 하지만
천만의 말씀을
침묵의 제방에 가둘 줄 안다

말 한마디로 외줄을 타기도 하고
오랜 세월 몸을 만든 소나무 분재처럼
혀는 부드러운 침묵을 즐긴다

칼집 속 명검을 안은 검객처럼 
나는 지금 혀를 단속 중이다

                ―「검객」전문

  이 시에서 칼은 말의 은유이고 검객은 시인의 은유로 쓰였다. 여기서 ‘말’을 ‘시’로 본다면 시는 “꼭다문 입술을 방패로 갖고 있는 칼”이고, 시인은 “비스듬히 날을 감추고 있는 칼집 같은 속내”를 가지고 “천만 마디 말씀을/침묵의 제방에 가둘 줄” 아는 말의 검객인 것이다. 시인에 의하면 “칼집 속 명검을 안은 검객처럼” 시인은 스스로의 혀를 단속할 줄 알아야 한다. 
시인이 이 시에서 “검객은 말의 이치를 모르는 척 눈치를 보기도 하고/모호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고 한 것은 시학에서 말하는 ‘시치미 떼기’나 ‘모호성’을 지적한 것이다. 이처럼 시인은 이미 시적 언어의 속성을 간파하고 ‘이목구비’라는 감각의 혀로 ‘부드러운 침묵(시)’을 즐길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시인이 즐긴다는 것은 쾌락을 뜻하기보다는 온전한 시인의 삶을 기꺼이 사는 것을 의미한다. 천재나 노력하는 자가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시인은 이미 터득하고 있다. 시인의 이러한 열정은 시인으로 하여금 “붓 끝을 세울 줄도 모르면서/ 내 몸의 육필시를 써보겠다고 서예학원에”가게 한다(「붓끝을 세울 줄도 모르면서」). 여기서 ‘육필시’는 몸이 강조된 것이라는 점에서 시인의 시관을 엿볼 수 있다. 시인의 시 쓰기는 김수영 식으로 말하면 온 몸으로 밀고 나가는 시 쓰기인 셈이다. 

옹이를 보아라
지금껏 잘 살아 왔나 
여전히 잘 살아가고 있나 
내다보는 나무의 번쩍 뜬 눈이다

눈 감고 생각한 날들 소란스러웠다
들리는 곳마다
귀 하나씩 만들다보니
쓴맛의 열매들은 쉽게 익지 않았다
그때 어머니의 불호령 소리에
귀 하나를 뚝, 버렸다
그 곳에 눈 하나 생겼다

오랜 세월 한곳만 바라본 눈은
불현듯 다시 귀로 변한다
환한 말 듣는 귀로 변한다
그 힘으로 옹이에 새순이 돋는다

봐라, 어느 곳이든 오래 한곳을 바라보면
실핏줄 터져 나오듯
눈에서 새순과 이파리가 돋아 나온다

아직 눈 부릅뜨지 않는 옹이들
내 몸속에 궁리하는 눈 여럿 있다

          ―「번쩍 뜬 눈」전문

  옹이를 사전적으로 정의하자면 “나무줄기조직이 성장함에 따라 나무의 몸에 박힌 나뭇가지의 그루터기나 그것이 자란 자리”를 말한다. 하지만 시에서는 흔히 옹이를 나무의 상처와 연관시켜서 생각한다.  그런데 시인은 옹이를 나무의 눈으로 형상화해서 보여준다. 이 시에서는 그냥 평범한 나무의 눈이 아니라 ‘번쩍 뜬 눈’이다. 이 눈은 시인 스스로가 “지금껏 잘 살와왔나/여전히 잘 살아가고 있나”하는 자성의 눈이다. 시인에 의하면 “눈감고 생각한 날들”은 소란스러운 날들이었다. 자신의 주관적인 눈보다는 타자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온 삶은 ‘쓴맛의 열매’와 같은 시간들이었다. 이러한 삶의 자세를 바꾸게 해준 분은 시인의 어머니이시다. 시인은 어머니의 불호령으로 세상의 귀를 버리고 비로소 주관적인 눈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눈도 온전한 것은 아니다. 눈이 “오랜 세월 한곳만 바라본 눈”으로 고착화 될 때 그 눈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 눈은 “환한 말 듣는 귀로 변한다.” 여기서 귀가 눈이 되고 눈이 귀가 되는 것은 나무의 이파리나 줄기가 잘린 곳에 옹이가 생기고 옹이가 있던 자리에는 새순이 돋는 자연의 이치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의 삶도 크게는 자연의 범주 안에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시의 말미에서 시인이 “내 몸 속에 궁리하는 눈 여럿 있다”고 진술하고 있는데, 여기서 ‘궁리하는 눈’이야말로 세상을 다른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보고 싶어하는 시인의 눈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시인이 시를 쓰는 행위는 눈(目)이나 귀(耳)를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다. 박무웅 시인의 시에는 이처럼 이목구비의 상상력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그의 시「신세계 교향곡」에서 시인의 입과 귀와 눈은 ‘스마트폰’으로 요약된다. 여기서 ‘스마트폰’은 나와 세계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시인은 “문득 거울을 보니 얼굴이 사라졌다/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며 스마트폰이 웃는다”고 말한다. 보통 전통적 의미의 거울이 자기반성의 거울이라면 여기서의 스마트폰은 시인의 얼굴(이목구비)마저 지워버리는 욕망의 거울이다. 여기서 스마트폰은 나의 이목구비 뿐 아니라 팔과 다리와 심장까지 달라고 하는 무서운 존재이다.

  2. 허기와 욕망의 지형도
 
  인간은 먹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는 동물이다. 그런 점에서 가난이나 허기는 인간에게 잊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기도 한다. 특히 해방 전후에 태어나 6.25 전란을 몸소 겪은 시인의 삶에서 가난은 필연적인 삶의 조건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박무웅 시인의 시 도처에 가난이나 허기가 등장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밥이야말로 박무웅 시인에게는 생존의 필수 덕목인 셈이다. 시인은 “한 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온몸은 날카롭게 진화해 왔다/밥이 대(代)를 이었고 가족을 만들었다/눈빛이 칼날이다/지도에도 없는 길을 발이 부르트도록 달려간다/한 끼 밥을 차지하지 못하면/아득한 허기의 별들 속으로 떠오른다”(「밥속의 생(生)」)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허기의 시대는 이미 지나가 버렸다. 지금은 오히려 밥의 과잉 시대이다. 시인은 같은 시에서 “체중을 줄이라는 의사의 말을 들으며/밥의 의미를 다시 적는다/밥이 내 인생을 먹고 있었다/숟가락을 너무 많이 썼다”고 고백한다. 시인의 이러한 고백은 밥이 허기의 가치를 잃어버릴 때에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해 준다. 밥의 부족은 허기를 낳지만 밥의 과잉은 욕망을 낳는다. 박무웅의 시에서 이처럼 허기와 욕망의 지형도가 발견되는 것은 보편적인 것이다. 
  시인의 허기는 고통스러운 것이기는 했지만 그 자체는 순수한 것이다. 시인은 야생의 다규멘터리를 보면서 호랑이가 들소를 쫓고 독수리가 토끼를 낚아채려는 것을 단순히 야만으로 보지 않고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순환과정으로 보고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눈 덮인 산등성이를 헤치고 민가까지 찾은/ 멧돼지의 눈빛에서/빈 젖으로 새끼들 앞에 돌아가야 하는(「야생의 다큐멘터리」)” 모성의 안타까움을 읽는다. 이러한 멧돼지의 모습에서 시인은 30년 전 가난으로 안타까웠을 어머니의 모성을 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허기와는 달리 인간의 욕망은 제동장치가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파탄의 길로 치닫게 된다. 따라서 삶의 벼랑길에서 시인은 욕망을 버리고 무욕의 길을 모색하게 된다. 이러한 일은 시인에게 있어서 훼손되지 않은 유년의 지도를 찾는 일이거나 욕망의 육신을 벗어버리는 육탈의 행위로 나타난다. 

나무를 통과하지 않은 계절은 없다
얼어붙은 계곡물들은 
비스듬히 서있는 나무들의 몸속에
얼지 않는 물씨를 맡겨놓는다 
한겨울 얼지 않는 곳은
겨울나무들의 목리(木理)뿐이다
내게 붙어있는 해묵은 옹이들 
아직도 붙어있는 바스락거리는 이름들을 
나뭇가지에 얹힌 늦가을 바람 털어내듯
스스로 흔들려 스스로 떼어내듯 
모두 떨구고 겨울을 맞았으면 좋겠다
수런거렸던 올해의 말은 다 버리고
돌아올 파란 말들도 생각 안 하고 
폭설의 학기를 듣는 나무들
푸른 한때를 지나온 겨울 풍경들 
돋는 이파리들은 순간을 보여주지 않지만 
떨어지는 것들은 그 순간을 열어 보여준다
육탈로 보여주는 나무들의 말씀이다

                          ―「육탈」전문

  시인은 현대문명이 “바다를 매립해 도시를 늘리고/산맥을 뚫어 고산도로를 만들고/북극의 빙하가 슬픔의 지형도”(「유년의 지도」)를 그릴 때에도 훼손되지 않는 ‘유년의 지도’를 갖기를 원하지만, 그것은 한낱 꿈일 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도가 어쩌면 “측량의 점선 무수히 지나간 늙은 지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시인에게 있어서 순수성의 회복은 쉽지 않은 일인데 나무와 같은 자연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박무웅의 시「육탈」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내려 놓음으로써 진정한 육탈에 이르는 겨울나무를 통해서 인간의 순수성 회복을 소원하고 있다. 겨울나무는 자신의 몸에 붙어있던 ‘해묵은 옹이들’이나 끝내 떨어지지 않던 ‘바스락거리는 이름들’을 “나뭇가지에 얹힌 늦가을 바람 털어내듯” 털어내지만 그의 빈 몸에는 여전히 ‘얼지 않는 불씨’가 남아있어 새로운 계절을 기약하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돋는 이파리들은 순간을 보여주지 않지만/떨어지는 것들은 그 순간을 열어 보여준다”고 하여 육탈의 위대함을 설파하고 있다. 

  3. 붕새의 날개와 거울의 상상력

  새가 하늘을 날고 물고기가 바다를 헤엄쳐도 그들의 자유를 가로막는 한계는 늘 존재한다. 이러한 상황을 시인은 「천라지망(天羅地網)」이라는 시를 통해서 보여주는데, 이러한 한계상황은 새, 즉 초월적 존재가 되고 싶은 인간이 결국 새가 되지 못하고 지상적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암시해준다. 시인은 이러한 한계상황 속에서 『장자(莊子)』의〈소요유편〉에 나오는 상상 속의 새인 ‘붕새’를 등장시켜서 이상적인 시인의 초상을 그려내고 있다. 

그날. 백목련이 
한 마리 새처럼 날개를 폈다 
구만리장천으로 날아가려는 붕새처럼 날개를 폈다 

새벽보다 먼저 하늘을 열고 
횐 불꽃으로 날아올랐다 
천지사방이 새의 불꽃으로 환해졌다   

한 덩어리의 지혜처럼 시(詩)처럼 
날아다니는 
저 흰 깃털의 불꽃 

그날. 내가 본 백목련은 
바람에 날리는 흰 깃발이며 
붕새의 부리가 토해놓은 시(詩)였다 

깃털을 들어 올리지 못하는 것은 죽은 새이다 
날지 못하는 것은 생(生)이 아니다 
이른 봄 가장 먼저 날개를 펴는 새처럼
지상의 나를 버리고
붕새가 되고 싶었다 

그날. 나는 백목련 앞에서 날개를 펴고
흰 깃털로 구만리장천을 긴 울음과 함께 날아오르는 
한 마리 붕새가 되고 싶었다 
말의 첫 머리를 가장 먼저 피워내는
흰 백목련 같은
지상의 붕새같은 시(詩)를 토하고 싶었다
        
                           ―「지상의 붕새」전문

  시인은 봄에 화사하게 피어나는 백목련을 보면서 구만리장천을 날아가는 붕새를 떠올린다. 장자에 나오는 ‘붕새’는 사실상 초월적인 존재이지만 시인이 꿈꾸는 붕새는 ‘지상의 붕새’라는 점에서 현실적인 존재이다. 여기서 ‘지상의 붕새’ 단적으로 말하면 시인의 은유이다. 따라서 구만리장천을 날아다니는 붕새는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를 넘나드는 시인을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 시인이 본 백목련은 “바람에 날리는 흰 깃발이며/붕새의 부리가 토해놓은 시(詩).”인 것이다. 결국 시인이 지상의 붕새가 되고 싶은 것은 “말의 첫 머리를 가장 먼저 피워내는/흰 백목련 같은/지상의 붕새 같은 시(詩)를 토하고 싶”은 바람 때문이다. 여기서 시인이 장자에 기대고 있는 것은 인위의 세상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붕새가 지상을 날아다니는 행위는 인위를 넘어선 무위의 경지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시인에게 시를 쓰는 행위가 인간의 욕망을 넘어서는 행위라는 것을 암시해준다. 
  하지만 시인의 이러한 꿈은 그리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시인의 내면에 쉽게 씻기지 않는 죄의식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심장 속의 “안개를 천천히 걷으면 거기/오래된 내 죄가 한 덩어리 있을 것 같다”(「심장 모니터」)고 말하고 있다. 시인은 이처럼 죄를 인식하지만 그 죄를 씻어내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같은 시에서 시인은 “산다는 것은/폐허의 사막에서 다시 숲 한 자락을 가꾸는 것/내 죄를 스스로 오래 돌보는 것/죄를 울먹거리게 만드는 것이다”고 진술하고 있다. 시인의 이러한 진술은 시인 스스로가 양심이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는 일과 다른 것이 아니다. 
  박무웅 시인의 시 「거울 생각」은 넥타이를 매고 거울을 볼 때와, 하루의 일을 마치고 거울을 볼 때와, 운동을 하고 여자를 만나고 술을 마시고 거울을 볼 때 자신이 다 다르게 보이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있다. 이처럼 시인에게 있어서 거울은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그에게 거울은 벌레를 막아주는 방충망처럼 시인의 “불안한 인생을 지켜주는 방충망”이 될 수 있다는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마흔 인 아들 역시 “형체가 없는 행간 속의 무게”를 지니고 있는 시처럼 인식되는 거울이다. 무엇보다도 시인에게 있어서 가장 확실한 반성의 거울은 시라고 말할 수 있다. 그가 꿈꾸는 시는 지상의 붕새가 날아다니다가 만나게 되는 맑은 물 같은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물을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에서 찾고 있다. 물처럼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야말로 시인에게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삶의 방식이다.  그는「상선약수(上善若水)」에서 “세상의 명약들이 다 모이면/맑고 시원한 물이 된다/물처럼 흘러가면 길 하나를 만들 수 있다/물을 들여다보면 눈이 맑아져/가장 빛나던 눈물과 만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가장 빛나던 눈물’이야말로 그가 추구하는 시일 것이다. 아마도 그 눈물은 이미 ‘지상의 붕새’의 마음속에 고여서 출렁이고 있을 것이다.  


*박남희 :1996년 경인일보,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폐차장 근처』,『이불 속의 쥐』,『고장난 아침』이 있고, 평론집으로 『존재와 거울의 시학』이 있으며, 현재 고려대, 숭실대 강사, 계간 《시산맥》주간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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