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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호/책 크리틱/김규진/우주적 상상력의 다양한 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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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크리틱
김규진
우주적 상상력의 다양한 현현
- 이명의 『벌레문법』, 박해연의 『붉은 활주로』
1. 일상에서 길어올린 우주적 상상력 - 이명의 『벌레문법』
벽에 못을 박고 바다를 걸었다
바다는 벽이 되었다
벽에 걸린 바지가 방금 걷어 올린 미역 한 줄기처럼 후줄근하다
나는 전마선처럼 벽과 벽 사이에 떠 있다
한 줌의 바다가 벽을 허물고 나를 끌고 간다
천정으로 펼쳐지는 파도는 한 폭의 두루마리다
만조 시간에 두루마리는 가장 둥글게 펴진다
두루마리 위에 수없이 뜨고 지고를 반복하는 별을 나는 읽고 있다
시작도 끝도 없는 혼돈,
크면 멀리 가고 멀리 가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되돌아오는
지금은 당신을 읽는 시간,
한 줄의 북명 바다가
정맥을 타고 몸 속 깊숙이 흘러들고 있다
「카오스 병동」
시인은 벽에 바다를 거는 사람이다. 시인 덕분에 벽은 바다가 되고 바지는 미역이 되고 천정에는 파도가 치며 두루마리를 펼치고 두루마리 위에 별이 뜨고 진다. 시인은 그것들을 읽어내는 사람이다. 시인은 질서를 지워주는 사람이 아니라 외려 혼돈을 만든다. 근대의 직선적 시간관이 시작과 끝을 상정한다면 시인은 시작도 끝도 없는 생성, 소멸, 재생성의 순환적 시간관에 의탁한다. “크면 멀리 가고 멀리 가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되돌아오는” 자연적 대상은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모습이다. 그 연결고리를 “읽는” 일은 자타(自他)의 분별심, 인간과 자연을 가르는 이분법을 지우는 일이다. 이제 먼 북쪽 있다고 하는 바다, “북명北溟”은 혈관 속으로 들어와 시인의 피가 되고 살이 된다. 그런데 시인이 “지금” “당신을 읽는” 시간은 혼돈의 시간이고, 장소는 “병동”이다. 일상적 인식을 낯설게 하는 일이 시인의 ‘주업무’라는 데 생각이 닿으면 “카오스 병동”은 혼돈과 상상을 즐겁게 향유하는 시인의 역설적인 발언이라 사료된다. “저 몸에 붓뚜껑 모자를 씌워 / 다 닳아 토막 날 때까지 함께 뒹굴며 / 다시 한 번 구성지게 한세상 풀어내고 싶다 / 블랙홀 속으로 빠져들고 싶다”(「4B 연필」)에서 재차 확인할 수 있듯이 시인은 세상을 혼돈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문제는 그러한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자세이다. 「카오스 병동」에서 우리는 혼돈을 만들고 그 혼돈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시인을 목도할 수 있으며 「4B 연필」에서는 예정된 결말 대신 “한세상” 모르지만 구성지게 풀어내고 싶다 고백하는 능동적인 시인을 만날 수 있다.
장마철 오락가락하던 먹구름 둘둘 말아 빨랫줄에 널었다
빨랫줄을 받치고 있던 서어나무 기둥이 기울고 빨랫줄이 축 처졌다.
당신의 잠자리가 축축할까 봐 고르게 펴서 널었다
오전 나절 무더위에 먹구름이 뽀얗게 말라갔다
뽀송뽀송해진 구름
후 불어온 바람 한 줄기에 가볍게 날아올랐다
푸른 하늘 아득히 깔린 솜털구름
이제 당신에게 나의 하루를 보낸다
「근황」
이명 시인은 일상에서 길어낸 소재를 우주적 상상력으로 펼치는 데 특장이 있는 듯하다. 위 시편을 읽으면 우리는 ‘님’을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황진이와 만해의 작품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님’이 오실 날을 예비하는 정서가 상투적으로 흐르지 않은 까닭은 어조에 힘입은 바 크다. 시편 전체에서 청량감을 맛볼 수 있는 이유 역시 어조와 관련이 있다. 자신의 일상을 고백하는 어조는 결코 부산스럽거나 조급하지 않다. 다만 담담히 “먹구름”을 “빨랫줄”에 “고르게 펴서 널”어 당신이 오실 날을 기다릴 뿐이다. 준비를 모두 끝낸 후 화자는 “이제 당신에게 나의 하루를 보낸다”. 이 마지막 연에 실린 여운은 마치 수묵화의 여백처럼 그립다거나 기다린다는 백 마디 말을 대신하고도 남는다. 시인은 ‘무대’에 오르지 않는 법이며 시를 통해 말하지 않고도 하고자 하는 말의 일획도 남김없이 아니 오히려 더욱 풍부하게 전하는 사람이라면 위의 시편이야말로 그 좋은 예라 여겨진다.
날달걀 하나를
펄펄 끓는 콩나물 해장국에 터뜨려 넣자
이내 달이 떠올랐다
순식간에 콩나물 위로 하얗게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만월이었다
물결에 달빛이 출렁이고
새우들이 빠르게 솟아올랐다 사라졌다
뚝배기는 달빛을 데워내고 그 사이사이
노란 음표들이 문풍지처럼 엷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내 속에서 뭉글뭉글 부풀어 솟구치는 것들을
나는 입김으로 불고 취기로 흥얼대며
몇 개의 음표들을 건져 올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빠른 템포로 달빛을 휘저으며 사라져 갔다
한 모금의 달빛을 마시면서
나는 공연히 폴더를 열었다 닫았다
그리운 얼굴들이 물결 위로 떠올랐다 사라졌다
뜨거움을 식혀가며 종점도 없는 문자들을
어둠 속으로 후후 날려 보냈다
「베토벤이 올라온 포구」
위의 시편은 「근황」에서 보인 일상적 소재의 우주적 확장이라는 시인의 특장이 유머러스하게 잘 구현된 작품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고독한 존재의 짙은 페이소스 역시 배면에 흐르고 있다. 시인은 아마도 혼자서 콩나물 해장국을 먹고 있는가 보다. 화자가 “콩나물 해장국”에 터뜨린 “날달걀”을 “만월”로 인식하는 순간 달걀의 흰자는 “달빛”이 되고 “콩나물”은 “노란 음표”가 된다. 만월의 하얀 달빛에 물결이 호응하여 출렁이고 새우는 빠르게 움직이며 콩나물 역시 이들의 움직임에 조응한다. 화자의 마음 속에서 “뭉글뭉글 부풀어 솟구치는 것들”은 대상들의 혼융에 동참하고자 하는 열망의 표현이다. 이에 반해 “사람들은 빠른 템포로 달빛을 휘저으며 사라”진다. 화자가 콩나물 해장국에서 대상들의 조응을 발견한다면 “사람들”은 “빠른 템포”로 그저 움직일 뿐이다. 화자는 이제 고독함을 느낀다. 공연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리며 그리워한다. 하지만 이러한 그리움은 “종점도 없는 문자”이고 결국 “어둠 속”으로 날려 보내는 화자의 행위와 만나 짙은 페이소스를 만들고 있다.
2. 별을 좇는 아이 혹은 엄마의 노래 - 박해연의 『붉은 활주로』
이명의 시편이 일상적 소재를 우주적 상상력으로 풀어간다는 특징이 있다면 박해연의 시편은 우리가 겪는 삶의 결핍은 어떤 불합리한 현재에서 기인하며 이를 벗어나기 위해 별과 별자리, 바다 등으로 대표되는 원초적 고향을 그리고 기린다는 데 특징이 있는 듯하다.
삶이 라면박스 안에 갇힌 병아리라는 생각이 들어요. 벽 너머 꿈을 생각할 때면 하루에 한 번씩 죽어요. 그렇다고 너무 큰 걱정은 말아요. 아직까지 정말 죽어 본 적은 없으니까요. 단지 라면박스 위로 보이는 하늘이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 어머니가 누구인지 기억할 수 없다는 사실, 나를 품었던 것이 뜨거운 형광 불빛이었는지 따뜻한 문장이었는지는 알 수 없어요. 가끔 손바닥만 한 하늘이지만 내 별자리를 찾아요. 불꽃이 쏟아지는 사자자리, 영원히 마르지 않는 물병자리, 고집불통 전갈자리까지 멀리서 빛나는 하늘, 눈이 작아서일까요, 내 별자리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요. 나를 인공 수정시킨 차가운 피를 모조리 뽑아버리고 싶은 밤, 안드로메다 공주를 태우고 힘차게 달리는 검은 말 페가수스가 되고 싶어요. 그런 밤 혼자서 뜨거운 별 하나 낳아요.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깃털 자꾸 겨드랑이를 간지럽혀요 어머니, 붉은 하늘을 베고 나를 다시 기록해 주세요.
-「나의 별자리」
화자는 “삶”을 “라면박스 안에 갇힌 병아리”로 인식하며 “벽 너머 꿈을 생각할 때”마다 “하루에 한 번씩 죽”는다 고백한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진술을 통해 그 죽음은 일종의 ‘의사 죽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화자에게 죽음에 가까운 극한의 절망감을 안겨주는 동인動因은 화자가 바라보는 하늘이 우주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고 어머니가 누구인지 기억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어머니를 대신하여 “나”를 품은 것을 화자는 두 가지로 제시하는데 하나는 “뜨거운 형광 불빛”이고 다른 하나는 “따뜻한 문장”이다. 전자인 “형광 불빛”은 라면박스의 병아리를 생각해 보면 인공적이고 부정적인 것, 그래서 화자로 하여금 “차가운 피를 모조리 뽑아버리고” 싶게 하는 대상임을 알 수 있다. 그에 비해 “따뜻한 문장”은 화자가 지향하는 “별자리”, “페가수스”, “다시 기록”한 “나”를 가리킨다고 보인다. 하지만 화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자신의 별자리는 아직 찾을 길이 요원하기만 하다. 위 시편의 변주라고 할 수 있는 「바다, 별자리·2」를 보면 “박스에 갇힌 병아리 대신” “우리 안에 갇힌 양식 도다리”가, 라면박스 위의 하늘이 전부가 아니듯 양식우리 역시 바다의 전부가 아니며, 어머니를 기억할 수 없는 슬픔은 시인의 지향인 별자리를 찾게 하는 등 몇몇 소재가 바뀌었을 뿐이지 발상과 시적 전개가 동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시인을 별과 별자리를 좇고 나아가 별을 품고 키워 별자리를 만드는 사람, ‘별의 후예’라 여겨도 좋지 않을까. 하지만 시인의 다른 시편인 「거기가 그립다」을 보면 별과 별자리에 관한 시인의 동경은 절망감과 육체적 고통을 동반하는 일이다. 시인은 “눈 속에서 별빛이 사라지지” 않는 “눈이 깊은 아이”처럼 “까르르 까르르” 웃으며 “많은 별을 품”고 “깊은 하늘의 끝을 올려다” 보며 살고 싶다. 문제는 이런 행위들이 “죄”가 되고 그에 대한 ‘벌’로 혈관이 터지고 언젠가 “내 몸에 담은 별을 모두 돌려보내야” 할 시간과 “깊이 박힌 별을 뽑아낼 손”을 예비해야만 하는 현재의 상황이다. 하지만 화자는 “거기”를 그리워한다. “거기”는 “들여다 볼 수도” “만져볼 수도” 없는 곳이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내가 태어나고 내가 죽는” 곳이며, “내 몸 안에도 있고 내 몸 밖에도 있는” 궁극적으로 이미 “내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거기”는 ‘자연성’ 혹은 ‘자연의 모성성’이 아닐까? 너무나 ‘자연스러운’ 바람과 동경이 ‘죄’가 되고 마는 우리가 발딛고 사는 세상은 ‘눈 맑은’ 시인에게 너무나 고통스럽지 않나.
뜨거운 바다에서 열꽃이 터져.
나는 자궁 깊숙이 숨은 빈 방에서 나팔을 불어.
양생의 단전을 지나 뜨거운 나의 아래
낮고 넓은 골반에 뿌리 내린 꽃숨 끌어올려
얼굴 발개지도록 나팔을 불어.
기억하지, 내 몸에서 처음 꽃이 터지던 날
어머니 그 꽃잎 곱게 받아
두툼한 책갈피 사이에 모셔 두었지.
딸아, 꽃 피웠으니 너도 꽃밭이다.
꽃씨 받아 싹튀울 귀하디귀한 꽃밭이다.
축복의 주술로 어머니
내 꽃밭 오래오래 쓸어 주셨지.
나는 꽃씨였다가 꽃이었다가
풍성한 꽃밭을 꿈꾸는 바다였다가,
밀물 들면 꿈의 해수면이 차오르고
썰물 지면 보름달을 품는 여수바다였다가,
내 꽃밭에 처음 꽃이 피던 그 날
나는 신의 나팔소리 들었어.
내 몸에서 터져 나오는 나팔소리 들었어.
맞울림 하는 내 몸 안에 바다가 있어.
그래, 나는 바다야.
나팔소리 울려 퍼질 때마다
만선의 붉은 깃발 단 배가 귀항하는
꽃밭이야, 꽃밭.
「바다, 여수바다」
위 시편에서 “꽃씨”와 “꽃”, “꽃밭”, “바다”로 확장되어 가는 자아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를 통해 시인이 구가하는 것이 ‘자연’ 또는 ‘여성이 지닌 자연성’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여성과 꽃밭과 바다는 대상을 만나 아니 대상과 하나가 되어 새로운 대상을 품고 그 대상이 태어나게 한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나팔소리”는 생명의 약동을 불러일으키는 신호로 작용하는데 그 “나팔”을 “얼굴 발개지도록” 부는 화자의 행위는 매우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표현되고 있어 우리의 관심을 끈다. 그리고 “나팔소리 울려 퍼질 때마다 / 만선의 붉은 깃발 단 배가 귀항하는 / 꽃밭이야, 꽃밭.”이라는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화자는 ‘자연성’을 발현하는 대상의 모든 것들을 희망으로 가득한 눈빛으로 따뜻하게 품으려 한다. 이러한 화자의 인식이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기저基底가 된다면 비록 현재의 삶이 “라면박스”와 “양식우리”에 갇힌 암울한 나날이라도 그 자신이 별이 되고 자신이 뿌린 것들과 함께 별자리가 되는 그날을 예비하는 시인의 삶은 고통스러우면서도 즐거운 축제의 나날일 것이다.
*김규진 : 시인, 2010년 계간 『서시』로 등단, 현재 가천대 글로벌교양대학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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