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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호/미니서사/김혜정/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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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3
댓글 0건 조회 2,997회 작성일 15-07-08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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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서사
김혜정

약속


  미안해. 나 먼저 간다. 어젯밤 그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을 때 또 술을 마셨군, 했다. 물론 답신은 보내지 않았다. 내일 봐. 잠시 후 다시 들어온 메시지에는 은근히 반가웠다. 십오 년을 살을 맞대고 살았는데 두 달 전 그는 집을 나갔다. 처음 한동안은 술을 마시고 전화를 해대더니 점점 뜸해졌다. 최근 며칠은 아예 연락이 없었다. 다른 여자를 사귀는 느낌이 들었다. 서운하지 않았다면 그것도 거짓일 것이다. 하지만 인연이 그만큼밖에 안 되는 것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당신, 나 사랑해? 사랑하는 거지? 끝없이 사랑을 갈구하는 그와 사랑을 믿지 않는 내가 끝까지 갈 수 없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다툼이 잦아졌다. 다툼의 끝은 한 마디로 더러웠다. 조금이라도 좋은 감정이 남아 있을 때 결별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의 등을 떠밀었다. 거기에 아들 민우가 가세했다. 아들을 탓할 수도 없었다. 저도 부모가 이혼한 후 엄마가 집으로 끌어들인 남자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줄곧 아들의 방황을 묵인한 것도 그런 자책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십오 년을 한 지붕 아래서 저를 친아들로 받아들이고 살아온 사람인데, 하대를 하며 나가라, 며 윽박지를 때는 아들에게 내심 서운했다. 
  십오 년 전, 남편이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린 것을 오래 알아차리지 못했다. 뒤늦게 그걸 알고는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머리칼을 자르고 이불이며 옷가지를 찢고 가재도구를 부수었다. 강물에 몸을 던져도 보고 달리는 차에 뛰어들기도 했다. 어떤 짓을 해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남편이 내연녀와 운영하다가 일이 뒤틀리자 손을 떼고 나가버린 주점에 나갔다. 처음에는 장사가 구실이었지만 결국 장사는 뒷전이고 술을 마시고 포악을 떨었다. 그때 그는 그곳을 찾아와 술을 마시고 가는 몇 안 되는 손님 중의 하나였다. 태어날 때부터 줄곧 혼자였어. 일본인인 어머니는 그를 낳고 일본으로 가버렸고 아버지는 열 살 때 잃었다고 했다. 동거하던 여자도 떠나고 이복형제들이 있지만 거의 왕래가 없다고. 하지만 이제 당신을 만났으니까 됐어. 그의 깊은 외로움과 대면하다 보면 남편에 대한 분노도 가라앉곤 했다. 그렇게 그와 만났다. 
  잘 생각해. 홧김에 한 서방질 오래 못 가. 주변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분노를 삭여주고 외로움을 달래줄 누군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민우에게 좋은 아빠가 될게. 내가 아무리 함부로 대해도 괜찮을 거라 믿었다. 그도 더는 참을 수 없는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나도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그가 집을 떠나고 나서야 나는 그가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언제까지나 내 곁에 있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어젯밤만 해도 그는 내일 보자고 했다.
  그는 끝내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다. 나에게 돌아온 게 사실이니까.   
  당신이 나한테 어떻게 이래? 내가 당신을 죽인 거네? 
  영정 속에서 그는 웃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설핏 든 잠 속으로 그가 나를 찾아왔다.
  아냐, 당신을 만나서 이만큼이나 살 수 있었던 거야. 
  
  
*김혜정 : 여수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을 졸업. 199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단편「비디오가게 남자」당선. 소설집 『복어가 배를 부풀리는 까닭은』『바람의 집』『수상한 이웃』장편소설『달의 문(門)』『독립명랑소녀』‘제15회 서라벌문학상 신인상’ ‘간행물윤리위원회 우수청소년 저작상’ ‘송순문학상’ ‘2013 아르코창작지원금 수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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