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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호/연재 산문/이경림/5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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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3
댓글 0건 조회 3,131회 작성일 15-07-08 16:10

본문

연재 산문 
이경림

50일


* 비행                                                 

 마흔이 넘어서야 비로소 나는 지상에서 두 발을 떼고 날 수 있었다. 그것은 설렘이었고 공포였다. 어떤 不可知 속으로 훌쩍 날아드는 듯한 알 수 없는 황홀이었고 사십년간 발바닥에 철썩 붙어있던 지구를 뚝 떼어내는 듯한 후련함이었다. 한 마디로 그것은 기분 좋은 충격이었다. 그러나 처음 맛보는 기내에서의 달콤한 몇 시간이 지나고 슬그머니 피로가 엄습해 올 때 쯤 나는 문득 내가 앉은 의자 밑 컴컴한 바닥에 흐트러진 신발짝처럼 함부로 던져져 있는 나의 발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더럽혀진 바닥을 반쯤 보이고 있는 그것은 비행기의 몸체를 덮은 잿빛 카펫 위에 놓여있었다, 지구대신 한 쇳덩이가 만들고 있는 가공의 바닥에 나의 발은, 아니 나는 놓여 있었다. 나는 날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서재에 앉아 글을 쓸 때와 다를 것 없는 조건 속에서 전속력으로 날아가는 한 기계 속에서 전속력으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새들의 비행을 부러워 한 적은 있지만 경이롭게 본 적은 없다. 그러나 스스로 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진정한 비행은 제 어깨에 솟은 날개를 스스로 푸득여 제 몸을 저 광대무변의 속으로 띄어 올리는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첫 비행 전의 그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은 (미지에 대한 호기심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남의 날개로 날지 않으면 안되는 운명이 가져다주는 본능적 불안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 뼘 남짓의, 단지 몇 그램에 불과한 깃털로 구만리장천을 밀고 가는 새들은 공포를 모른다. 첫사랑, 첫 이별, 첫 등교 첫 결혼......처럼 그것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다가온 운명적 두근거림이며 본능의 부딪침이기 때문이리라. 
   

* 슬픔
 
사흘 전 나는 17 시간의 비행여정을 거쳐 이곳 켈리포니아의 스튜디오 시티에 도착했다. 低價航空의 조악한 스케줄이 주는 피로가 며칠이 지나도 풀리지 않는다. 올 때 마다 느끼는 것은 이곳이 언제나 처음인 듯한 생뚱맞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생각해 보니 켈리포니아와의 첫 조우는 우연이었지만 잊을 수 없는 슬픔이기도 했다. 생각지도 못한 이혼으로 혼란에 빠져있던 a와 어느 날 문득 자신들의 반경에서 사라져 버린 아비를 이해하지 못하는 여섯 살, 세살의 두 아이를 보는 일은 슬픔을 넘어서는 먹먹함이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나라에 던져진 a의 막막함이 첫 해외여행에 대한 나의 모든 기대와 호기심을 지워버렸다. 
 그 몇 개월.......a가 없는 시간을 나는 마치 무인도에 던져진 로빈슨 크루소처럼 무료하고도 힘겨운 일상과 싸우게 되었다. 처음 경험하는 이국 생활은 순간순간이 도전이었고 공포였다. 아이들을 데리고 하릴없이 찾아가던 집 앞 공원은 깊고 음울했다. 그 때 그것은 말할 수 없이 크고 검은 한 마리 짐승처럼,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자꾸 나를 밀어냈다. 나는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놀이터 벤치에 앉아, 세 살짜리 사내아이가 모래장난을 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큰 아이는 보드를 타고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난 오솔길로 사라지곤 했다. 켈리포니아의 한 낮은 불볕이었지만 숲은 서늘했다. 놀이터에 아이 두엇이 엄마와 놀다 가면 모래장난에도 지친 아이는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숲으로 들어간 아이는 좀처럼 나올 줄 몰랐다. 나는 주춤주춤 아이를 찾아 숲으로 들어갔다. 인적하나 없는 대낮의 숲에는 갈색 바탕에 검은 줄무늬를 한 다람쥐와 오소리 같은 것들이 어떤 경계심도 없이 발 앞을 가로질렀다. 이따금 스컹크가 쓰레기통을 뒤지는 것이 눈에 띄기도 했다. 
 어느 날 부턴가는 흰 구레나룻의 마치 책에선 본 톨스토이같이 생긴 노인이 아름드리나무 밑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때로 먹물 같은 피부를 가진 흑인이 흰자위를 번득이며 걸어오기도 했다. 해가 많이 기울고 공원에 인적이 거의 끊어질 때쯤에야 , 아이는 영문 모르고 받아 안은 제 슬픔처럼 깊고 어두운 그 숲을 다 돌아 반대편 오솔길에서 한 마리 작은 짐승처럼 나타나곤 했다. 
 
 아이는 집에 돌아가길 싫어했다. 학교 운동장을 둘러싸고 있는 철조망 구석에 조그맣게 뚫린 구멍으로 다시 학교로 들어가서는 운동장 구석에 있는 펀치 볼을 미친 듯 때렸다. 그 때 성난 그 아이를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 사람은 일학년 담임이라는 젊은 백인 남자선생 뿐이었다. 그가 웃으며 아이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 잠시 펀치 볼을 같이 해주고 굿바이 허그를 하고 피리어드 찍듯 이마에 뽀뽀를 해 주면 아이는 거짓말처럼 순해져 ‘이제 집에 가도 좋아’ 라고 말했다.    
 그 후에도 몇 번 나는 켈리포니아에 왔고 몇 달씩 머무르다 돌아갔지만 나의 기억은 그 슬픔의 반경으로부터 멀리가지 못했다.  
  

* 꿈

 지난 사흘 동안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긴 꿈 이었다. 아니 짧은 꿈들의 긴 조합이었다. 어떤 꿈은 선명한 색채와 형태로 마치 생시처럼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꿈에서 깨면 언재나 새것인 시간이 표현할 길 없는 낯선 공기로 어른거리곤 했다. 복도를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 두런거리는 이국의 언어들.......스산하고도 호기심을 끄는 이질적인 시간 속에 나는 누워 있었다. 그 사흘, 그렇게 잠들고 깨어나면서, 나는 어쩌면 저쪽 어떤 근원적인 곳에서 부터 지니고 온 <나> 혹은 <나>라고 불리던 그 누군가의 꿈에 도달하려 끙끙거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꿈들은 과연 내 것이었을까? 그 때 나는 누가 내 꿈에 커다란 열쇠를 들이밀고 철컥 열어 버릴 것 같은 조바심으로 전전 긍긍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면? 꿈은 순식간에 흩어지고 모티브를 잃은 연극처럼 혼란스러워 지리라. 생시처럼 선명하던 장면들 혹은 어렴풋하던 실루엣들, 그 속에서 내가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角木 같은 현실이 텅 빈 방 귀퉁이에 우두커니 서 있으리라. 그 속에서 내가 사랑하던 영웅들은 너무 일찍 죽어버리고 애인은 어처구니없게도 아버지가 되어 곰방대를 두드리고 빚쟁이는 어린 아들이 되어 젖가슴을 파고들고 내가 그리던 톨레도의 어느 골목은 순식간에 인천의 산곡동이 되어 백운역 앞 고가도로 밑 고바우 약국 앞에 나를 세워 놓으리라. 
     

*  유리

 
 이번 여행을 나는 산책을 위한 여행이란 사치스런 이름을 붙여 보았다.  수없이 이곳을 오가면서도 나 자신을 위한 어떤 스케줄도 가져보지 못한 나를 위한 나 자신의 보상심리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여섯 살의 분노로 나를 슬픔에 빠뜨렸던 아이는 이제 열여덟 살의 우람한 청년이 되었고. 모래장난에 지쳐 칭얼거리던 세 살 꼬마는 중학교 졸업을 두 달 앞둔 매력적인 악동이 되어 있다. 귀엽고도 매혹적이던 a의 얼굴에도 그간의 새월을 말해 주듯 거뭇거뭇 잡티가 생기고 희고 고운 피부는 남국의 햇빛에 시달려 가무잡잡해 졌다. 
 a는 얼마 전 이곳 할리우드 부근 스튜디오시티로 이사했다. 이 도시는 이름이 말해주듯 할리우드의 부속도시답게 뭔가 映畵的인 냄새가 난다. 영화 세트 같은 집들이 줄지어 있는 이 숲속 마을에는 실재로 할리우드에 일자리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한다. 
 무슨 아트 인스티튜드니 덴싱 아카데미니 필름스쿨 같은 것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그러나 생각 외로 조용하고 사색적인 분위기를 가진 도시이다. 이곳 역시 대부분의 미국 마을들처럼 스트릿과 에비뉴가 잘라내는 반듯반듯한 두부 판 모양을 하고 있다. 
 a의 집은 irvine 에비뉴와 moor park 스트릿이 만나는 꼭지점에 있다. 주황색의 삼층 condo 건물의 이층에 a는 살고 있다. condo는 원룸보다 조금 큰 규모로 투 룸 스리 룸 등의 크기를 필요로 하는 가구들이 살게 되어 있는 아파트형 복합건물이다. 건물은 목조로 내부가 호텔 형으로 되어 있어 잿빛 카펫이 깔린 좁고 기다란 복도를 따라 양쪽으로 문들이 있다.
  거실 카펫에 귀를 대고 가만히 누워 문 밖을 지나가는 발자국을 따라간다. 발자국을 따라 몸이 흔들린다. 신기하다. 저 문밖을 지나가는 미지의 존재와 내가 어떤 파장으로 연결되어
잠시 같이 흔들리다 툭 끊어진다. 그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 들린다. 나흘째 아침이다. 

 a와 아이들이 뿔뿔이 나가고 난 뒤 집은 다시 물속 같은 고요 속으로 가라앉는다. 時差와 방전된 체력이 가져다 준 혼몽은 좀체 끝날 줄 모른다. 이곳의 해는 유난히 짧다. 산책을 시작하기로 한 날. 서둘러 집을 나선다. 문 앞에 조그만 소포 뭉치가 있다. 누군가 a에게 보낸 것이리라. 뭘까? 중요한 것은 지난 이십 년, a가 이곳에서 누군가와 끊임없이 저렇게 이어지고 있었다는 점이리라. 다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태평양의 저편에서 가슴 졸이던 존재들은 사실 a에게 어떤 관념에 불과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누군가의 마음이 이렇게 소포로 배달되고 또 누군가와 이따금 만나 차를 마시고 어깨를 비비며 함께 거리를 걷고 하는 시간만이 그의 현재며 실존이기도 하리라.  
 
* 산책 

 남국의 햇살이 안경알을 찌른다. 밤에 도착해서 미쳐보지 못했던 팜 트리 일곱 그루가 집을 에워싸고 있다. 맞은편 길에 조그만 리꿔 스토아가 보인다. 대각선으로 보이는 사거리에 피자 하우스, 주유소, 바버 숍, 플라워 디자인 숍들이 줄지어 있다.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방향을 가늠한다. moor park 스트리트가 동서를 가로 지르고 있다. 남북으로는 irvine 에비뉴가 지나가고 있다. 자, 어떤 이름을 따라 걸을까? 
 
 무어파크 스트릿은 차들이 많이 다니는 조금 번잡한 길이다. 나는 숲이 우거진 주택가 속으로 난 irvine avenue를 따라 걷기로 한다. 이따금 귀가하는 차들 외에는 거의 차가 다니지 않은 길. 아름드리나무들이 한 두 그루 씩 서 있는 집들이 줄지어 있다. 어느 국립공원의 보호수가 되어도 좋을 고목들이 여염집의 정원마다 서 있는 풍경은 놀랍다. 그 나무를 중심으로 각양각색의 주제를 가지고 잘 꾸며진 정원들이 마치 정원 박람회라도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온통 하늘을 덮은 가지들 사이로 저녁 햇살이 유리부스러기처럼 흩어지고 있다. 그것들 사이를 걷는다. 천천히, 아무 생각도 없이, 몸이 아니 정신이 아니 내가 알 수 없는 수세기의 어떤 習이, 어디론가 나를 데려가도록 버려둔다. 오렌지나무들의 정원, 사보텐의 정원, 들찔레의 정원, 부켄베리아의 정원, 사나운 갈대의 정원, 극락조의 정원.......들이 슬로비디오로 지나간다. 극락조의 정원 앞에 문득 나의 발이 멈춘다. 머리에 선명한 붉은 벼슬을 단 한 무리의 극락조들이 막 지기 시작한 노을 쪽으로 시푸른 날개를 펼쳐들고 있다. 飛翔의 직전이다. 그러나 다리가 물고기인 인어처럼 그들의 발은 하나같이 땅에 묻혀 있다. 비상의 직전, 저들의 발을 잔인하게 땅에 묻은 자는 누구인가. 
  
 直前 ....直前...... 어쩌면 極樂이란 저렇게 직전의 쾌락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저들이 한꺼번에 날아올라 극락이라 생각한 곳에 도달했다 해도 그곳이 과연 극락일까?  
極.樂. 시푸른 날개를 펼쳐들고 막 날아오르기 직전의 彼岸, 아니 차안. 
 
 어디서 왔는지 작은 잿빛 토끼 한 마리가 불현 생겨나 귀를 쫑긋거리더니 흐드러진 부켄베리아의 터널로 사라진다. 부켄베리아라는 붉은 꽃터널이 문인 집으로. 없는 문이 없는 경계를 짓고 있는 집으로. 모든 경계는 꽃핀다고 어느 시인은 말했던가.  

 나는 걸어간다 온갖 이름의 정원을 따라. 일 미터 남짓 높이의 흰 목책이 마당 끝을 따라 반쯤 서 있는 길을 따라. 이 빽빽한 나무들의 마을에서는 나무 한그루 없는 이 집이 의외의 아름다움을 준다. 깔끔하다. 그래, 이따금 어떤 無心은 조작된 많은 상징들을 뒤집으며 여름 산처럼 솟아오른다. 나무 한 그루 없이, 풀 한포기 없이 푸른 잔디만 고즈넉한 저 집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처럼.   
 
 조금 더 가니 길은 끝나고 한 저택의 앞에 ‘the end’ 라고 적힌 작은 팻말이 서 있고 화살표가 동쪽을 가리키고 있다. 그 옆에 woodbridge St. 라고 쓰인 거리 안내판이 있다. 여기가 이 길의 끝인가? 그러나 자세히 보라. 길은 휘어질 뿐 끝나지 않는다. 내가 잡고 온 북쪽을 오른 쪽으로 완강하게 휘니 동쪽이 되지 않는가. 나는 걸어간다. 동쪽으로. 

  구십 살도 더 돼 보이는 노인부부가 보행용 보조기구를 앞세우고 가다가 나를 보고는 
 ‘have a nice walking!' 하며 손을 흔든다. 저기 한 유구한 유적들의 산책이 있다. 저 웅장한 저택들의 뒤에서 소리 없이 흐르는 로스엔젤리스 리버처럼. 나는 걸어간다. 보이지 않는 강이 들려주는 들리지 않는 물소리를 따라. 북쪽이며 동시에 동쪽인 우드부리지 스트리트를 따라. 아니 없는 나무다리를 따라. 한 발씩 뒷걸음치는 햇살을 따라. 
문득 사위가 서늘하다.

 시간

 나흘째의 아침 햇살이 다시 방안을 빗금치고 있다. 직진의 빛이 비스듬한 블라인드의 틈새에서 어떻게 굴절되고 또 어떻게 변형되어 저리도 번득이는 유리칼이 되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 이름 지어진 시간들이 만들어 내는 온갖 幻影들 중 하나가 <나>라고, 아니 지금이라고 짐작할 뿐, 그 또한 사실 五里霧中 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무한하고 정교한 책략인 이 시간들을 대체 누가 모른 척할 수 있단 말인가. 
 오늘 아침, 나는 마흔 세 살의 내가 동동거리며 두 아이의 도시락을 챙겨 보내고는 지친 얼굴로 차를 몰고 일터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등에 대고 ‘운전 조심해라. 천천히 다녀, 점심 잘 챙겨먹고......’ 아무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 말투로 중얼거리는 예순 여섯 살의 나를 보았다. 방금까지 눈앞에서 어른거리던 마흔 세 살의 내가 현관문을 꽝! 닫는 순간,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것을 보았고 그녀가 도시락을 챙겨주던 열여덟 살의 나와 열다섯 살의 나 역시 눈 깜빡할 사이에 문 뒤로 사라지는 장관을 보았다. 잠시 전까지 거실에 혹은 식탁에 同時多發로 존재하던 예순여섯 살 노파인 나와 마흔 세 살 중늙은이인 나와 열여덟 살 떠꺼머리인 나와 열다섯 살 철부지 나...... 그들은 지금 없다. 
 빈 거실에는 언제나처럼 <처음>인 햇빛이 유리칼로 허공을 빗금 치고 있다. 이것이 지금이며 이것이 현재다. 마른 빵 한 조각에 딸기 잼을 발라 먹으려고 식탁 앞에 구부정히 앉아 있는 이 노파만이 현재다. 식탁 위에 컵으로 눌러 놓은 쪽지 하나가 보인다. a다. 
 
‘엄마, 미안해 매일 이렇게 바빠서....... 오늘 어디 여행사에라도 알아볼까? 멕시코는 어때?
 한 시간이면 가는데, 부담도 없고......생각 있으면 전화해’ 

 뻐꾸기시계가 호들갑을 떨며 열 한번을 운다. 초침이 정신없이 돌고 있다. 거실 책꽂이에 버지니아 울프의 ‘The True Beliver’ 란 책이 보인다. 그걸 꺼내 뒤적거린다. 미처 소화되지 않은 음식처럼 몇몇의 낱말들이 속에서 덜거덕 거리기 시작한다. 그것들을 가만히 옮겨 적는다.   
‘glance, tragedy, lack, unstale angina factory, instane, street murders, torment.......’
 낱말 자체로 아픔인 말들이 그녀의 갈피에서 신음하고 있다. 대체 어떤 카르마가 그녀를 이리도 아프게 했을까? 갈피에서 그녀가 속삭인다  
 ‘So is life one whole tragerdy, or not?’  
 
식탁 밑에 놓인 노파의 발등으로 햇살 하나가 지나간다, 뱀처럼. 
문득 발등이 시리다. 뱀은 어디로 갔나. 
   
 
 *이경림 : 1989년 《문학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토씨찾기》, 《그 곳에도 사거리는 있다》,  《시절하나 온다, 잡아먹자》, 《상자들》, 《내 몸 속에 푸른 호랑이가 있다》, 시 산문집 《나만 아는 정원이 있다》, 산문집    《언제부턴가 우는 것을 잊어버렸다》 . 비평집    <사유의 깊이 관찰의 깊이>. 한국문학 번역원 선정 영어권 번역시집 <A New Season Approaching, Devour it>. 2011: 제 6회 지리산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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