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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호/신작시/박장호/선명한 가족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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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박장호
선명한 가족
침대 위에 깔린 잔디밭에 누웠지요
햇살이 눈부셔 손수건을 얼굴에 덮었지요
길 잃은 바람이 자꾸만 손수건을 들추고
내 귓속에 들어와 갈 곳을 물었지요
내가 바람과 함께 떠날까 염려되어
당신은 손수건 위에 안경을 씌워 주었지요
감은 눈이 응시하는 안경 밖의 밀림이 선명했지요
내게 든 바람으로 밀림 속에 휘파람을 불어
바람의 길을 열어 주었지요
그것은 바람이 열어 주는 내 눈의 길이기도 했지요
아기 원숭이들이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놀이를 다녔지요
원숭이들과 놀고 싶어 나무를 기어오르는 악어들도 있었지요
해먹에 누운 코끼리는 떨어진 열매를 코로 주워
나무 위의 새끼들에게 던져 주고요
새끼들은 코끼리의 던지기가 재미있어
받은 열매를 바닥에 되던지기도 했지요
그러다 열매가 깨지면
그 속에서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랐지요
어둠이 두려운 손수건 밑의 내가 세상이 갑자기 까매졌어 하면
당신은 드문드문 자란 내 흰 머리카락을 뽑으며
그저 지나가는 구름일 뿐이야 했지요
한바탕 비가 내리자 코끼리가 커다란 귀로
열매를 깨뜨린 새끼를 떨지 않을 때까지 감싸 주었지요
악어는 깨진 열매를 맛있게 핥아먹고요
손수건에 덮인 얼굴에 꽃이 만발하였지요
생기지 않은 우리의 아이가 아장아장 꽃밭에서 해맑게 웃어
귀를 빠져나가는 바람에도 나는 날아가지 않았지요
유리 위에 그은 선분
입김이 지워진 자리
지렁이 한 마리가 꿈틀거린다.
개방된 기억 속엔
고개를 돌린 얼굴
돌아보지 않는 뒷모습만 간직한
선분에 갇힌 짐승이지만
다리 없는 이 포복의 짐승이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임을
나는 안다.
*박장호 : 2003년 『시와세계』로 등단. 시집 『나는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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