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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호/책 크리틱/장인수/도요새를 요리하는 호모 노마드의 음식을 함께 드시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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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3
댓글 0건 조회 3,616회 작성일 15-07-07 12:55

본문

책 크리틱
장인수

도요새를 요리하는 호모 노마드의 음식을 함께 드시려는가?
-최광임 시인의 『도요새 요리』를 읽고
  

 바다는 목표도 없이 태생적 파동으로 출렁인다. 계획도 없이 대륙과 섬의 경계선을 때리고, 핥고, 애무한다. 바다는 횡단하고자 하는 생을 받아서 함께 미친 듯이 출렁인다. 바다는 지독한 낭만주의적 성품을 지녔다. 최광임 시인의 이름에는 미친 바다의 풍경이 들어있다. ‘바다’라는 불치병을 앓고 있다. 그녀의 첫 시집 제목이 『내 몸에 바다를 들이고』였다. 그녀는 이미 바다를 들였다. 그녀는 태생이 전북 부안 변산 출생이다. 이른 봄이나 늦가을이면 수만 마리 도요새가 군무를 추며 서해 바다를 밀고 당기며 지나는 모습을 여러 번 보며 자랐을 것이다. 김수영 시인은 「사랑의 변주곡」을 통해 사랑을 무한히 변주하였다. 최광임 시인은 「도요새 요리」를 통해 바다의 이미지와 속성을 다양하게 변주하고 있다. 어떻게?  

1. 인어
  ‘바다’는 무한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녀에게 바다는 ‘차마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곳이다.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은 그녀에게 영혼의 국경선이며 심장의 악기다. 전설바다에 전설처럼 ‘인어’가 산다.
 『도요새 요리』의 첫 작품은 「인어」다. 대청댐을 한 바퀴 돌면서 쓴 작품이다. 그녀는 시도 때도 없이 대청댐 주변을 드라이브 하고 맴돈다. 고불고불 산 허릿길을 끊임없이 휘돌 수 있다. 물안개를 볼 수 있다. 물빛이 연하(煙霞)에 반짝인다. 반짝이는 산 빛, 안개 빛은 고기비늘을 닮았다. 물빛은 물비늘이다. 몽환적이고 신화적이다. 전설의 한 대목에 들어간 느낌이다. 그녀는 무당의 기질이 있다. 어느 작품에서 그녀는 곡비가 되고 싶다고도 했다. 그녀는 신비로운 대청댐의 풍광에서 자신의 ‘생의 근간’(「인어」)을 호명한다. 혼신으로 호명한다. 그곳에서 반인반수(半人半獸), 반인반어(半人半魚)의 어머니가 호명된다. 늑대인간, 사자인간, 물고기인간..... 반은 사람이요 반은 동물인 이형(異形)은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고자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필사적으로 야성 본능을 추구하고 있기도 하다. 인어는 전세계적으로 흩어져 있는 민담이고 전설이다. 마술과 예언의 힘을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존재였다. 인어는 음악을 좋아했고 노래를 잘 불렀다. 많은 민담들에서 인어와 사람의 결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대부분의 경우 남자가 여자 인어의 모자·허리띠·빗·거울을 훔쳐다 감추어놓은 동안 인어는 그 남자와 같이 살게 된다. 그러나 인어가 그 물건을 찾아내면 즉시 바다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결혼 전에 서로 동의한 조건이 지켜지면 결혼이 유지되나 그 조건이 깨지면 결혼도 끝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인어가 감정이 상하면 홍수를 비롯한 재난을 일으키기도 한다. 인어는 바다와 육지를 오가는 양가성을 지닌 존재다. 이런 속성들이 최광임 시인의 색깔을 규정하고 있다.

2. 두루미
 『도요새 요리』의 두 번 째 작품이 「우거지다」이다. 버드나무 군락지에 방 한 칸 마련하고  ‘잘 닦인 수면과 그것을 경계로 나는 두루미’와 함께 살아간다. 버드나무 뿌리 그늘과 재두루미 그림자와 조각보 같은 여러 겹의 하늘과 높은 산이 서로 우거져 있다. 아마 이 시도 대청댐에서 씌여졌을 것이다. 우거짐은 어우러짐이다. ‘강가 높은 산이 자꾸 깊어지는 것도 겨우내 견뎌온 제 마른 몸 추스르며 물질하는 것’이다. 하늘도 물질을 하고 산도 물질을 하고 버드나무와 재두루미도 물질을 한다. 물가를 서성이거나 물속에 몸을 담그고 살아가는 존재들이 발산하는 느낌이 이 시집을 휘감고 있다. 『도요새 요리』는 액체의 시집이다. 인어에서 두루미로, 두루미에서 도요새로 옮겨가며 변주되는 액체의 속성.

3. 도요새

 『도요새 요리』의 세 번 째 작품이 「도요새 요리」이다. ‘세상은 온통 흐르는 것이다’. 세상은 흐르지 않는 것이 없다. 강물과 바다의 속성은 ‘흐르는 것’. 그리하여 그녀는 ‘나의 조상도 흐르고 흐르던 유목민’이었다고 규정한다. 상상력은 증폭되어 그녀는 ‘멕시코만 근처 요리를 잘 하는 여자’가 되고, 당신은 ‘아라비안나이트의 저명한 산술가’가 된다. 그녀는 당신을 위해 강 하구에서 잡아 온 도요새를 요리한다. 감각의 칼질을 하고, 감각의 양념을 바른다. 도요새 요리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도요새 무리는 오늘도 대륙을 횡단한다. 
 나는 도요새가 무척 궁금해졌다. 정광태의 노래 <도요새의 비밀>은 내가 이미 익히 알고 있는 노래였다. 도요새를 이만큼 잘 노래한 작품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다. 그래서 여기에 옮긴다. 도요새의 이런 속성은 최광임 시인의 시를 해독하는 데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1절)
너희들은 모르지 우리가 얼마만큼 높이 나는지/ 저 푸른 소나무 보다 높이/ 저 뜨거운 태양 보다 높이/ 저 무궁한 창공 보다 더 높이/ 
너희들은 모르지 우리가 얼마만큼 높이 오르는지/ 저 말없는 솔개 보다 높이/ 저 볕 사이 참새 보다 높이/ 저 꿈꾸는 비둘기 보다 더 높이/
도요새~도요새~ 그 몸은 비록 작지만/ 도요새~도요새~ 가장 멀리 꿈꾸는 새 

(2절) 
너희들은 모르지 우리가 얼마만큼 멀리 나는지/ 저 밑 없는 절벽을 건너서/ 저 목 타는 사막을 지나서/ 저 길 없는 광야를 날아서/
너희들은 모르지 우리가 얼마만큼 빨리 나는지/ 저 검푸른 바다를 건너서/ 저 춤추는 숲을 지나서/ 저 성난 비구름을 뚫고서/
도요새~ 도요새~ 그 몸은 비록 작지만~/ 도요새~ 도요새~ 가장 멀리 나는 새 
도요새~ 도요새~ 가장 높이 꿈꾸는 새/ 도요새~ 도요새~ 가장 멀리 나는 새~


 <한국의 철새 가운데 가장 멀리 나는 새는 무슨 새일까? 도요새이다. 지구의 남반부(뉴질랜드, 호주)에서 북반부(알래스카, 캄차카반도 등 러시아 북부)까지 3만㎞를 날아간다. 산란철에 잠깐 머물 뿐 평생을 이동하면서 살아간다. 뉴질랜드에서 알래스카까지 3만여 킬로미터를 비행하는 도요새이다. 몇날 며칠, 바닷길을 한 번도 쉬지 않고 날아 이동하는 이 새는 갯벌에 도착해 쉬면서도 하루에 두 번 씩 어김없이 찾아오는 밀물을 피해야만 한다. 오랫동안 쉼 없이 날아야 하기에 쉬지도 못하고 끊임없이 허기진 배를 채운다. 3월~5월, 9월~10월에 우리나라에 온다.( 브리태니커 및 다음 백과사전을 참고)>

  왜 철새는 먼 길을 떠날까. 소설가 김훈은 "철새는 천체가 보내는 신호에 따라 방향을 가늠하는데 인간의 몸엔 그 같은 축복이 없다"고 했다. 시인 이해리는 "철새는 그리움의 힘으로 날아간다"고 했다. 빙하기 때부터 새들이 이동하기 시작했다고도 하고, 대륙이 맨틀 위를 둥둥 떠다닌 뒤로 새들이 고향 땅을 찾는다고도 했다. 알맞은 기온과 먹이를 찾아가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근본적으로 이동하지 않는 동물은 없다. 새는 더 멀리, 더 높이 이동하기 위해 태어난 피조물이다. 특히 도요새는 그 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이고 궁극적인 비행을 한다. 남극 근처부터 북극 근처까지 이동한다. 이동 거리가 가장 길다. 천수만 군무의 주범은 청둥오리가 아니면 도요새인 것이다. 도요새는 바다를 건너고 대륙을 건넌다. 가장 긴 강물보다 더 긴 생애의 이동경로를 지닌다. 이쯤 되면 왜 최광임 시인이 도요새를 노래했는지, 왜 도요새로 요리를 해서 먹고 싶은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최광임 시인은 바다이면서 철새다. 바다와 철새는 속성이 유사하다. 흐르는 삶을 살아간다. 최광임 시인은 철새를 몸 안에 들이기 위해 도요새 요리를 한다. 철새는 유목조(遊牧鳥)다. 최광임 시인은 유목민이다. 호모 노마드다. 홈리스다. 떠나기 위해 존재한다. 바다는 떠나는 자들을 위해 존재한다. 강물은 흐른다. 바다는 흐른다. 다시 한 번 반복하자면 ‘세상은 온통 흐르는 것이다’. 세상은 흐르지 않는 것이 없다. 강물과 바다의 속성은 ‘흐르는 것’. 
 
4. 호모 노마드의 근원적 특징들 ① - 눈물의 배후와 발바닥
 『도요새 요리』의 네 번 째 작품이 「눈물의 배후」이다. 이 작품도 새를 노래하고 있다. 다시 말해 ‘도요새의 배후는 눈물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는 작품이다. 더 멀리, 더 높이 날기 위해 새는 몸피를 줄인다. ‘한 계절에 닿기 위해’ 새는 몸피를 줄인다. ‘허공의 심장을 관통하여 가기 위함이다.’ 더 멀리, 더 깊이 날아가기 위해서는 에너지를 충전해야 한다. 밥을 먹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머무는 곳에서 일을 해야 한다. 이승은 영원으로 날아가기 위해 잠시 지구의 대한민국의 어느 지점에 머물러야 하는 곳이다. 그런데 잠시 머물러 있는 이곳, 이승과 현실이 녹록치가 않다. 먹고 살기 바쁘다. 사랑하기 바쁘다. 눈물이 가득하다. ‘부엌으로 달려가 양푼에 밥을 비벼’ 먹어야 한다. 희한하게도 삶의 아이러니는 ‘막무가내로 뒤집어지는 매운 밥의 본능’을 먹어야 하는 데 있다. 그렇게 해서 에너지를 비축해야 ‘한 세월 건너가는 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양푼 가득 눈물이 차오른다. 밥 말리의 노래 가사를 차용하자면 ‘No woman no cry’, 즉 ‘여자 없이는 눈물도 없다’! 최광임 시인에게 부엌과 양푼도 바다의 액체와 대청댐의 액체로 가득 차 있다. 액체 중에서 가장 순수하고 뜨거운 액체인 눈물로 가득 차 있다. 그리하여 호모 노마드는 배후에 눈물이 흐른다. 
 그녀는 도요새가 되고 싶다. 하지만 날개가 없다. 하여 열심히 밥을 먹고 먼동 트기 전 세상 한복판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야 하는 삶이다. 하여 ‘내 발굽에 편자나 박아주시라’라고 말한다. 새가 날개를 젓듯이 그녀는 두 발로 이 세상을 걸어보겠다는 것이다. 이런 연장선에 돼지 족이 출현한다.
 『도요새 요리』의 다섯 번 째 작품이 「발바닥이 따스하다」이다. 돼지 족을 사다가 족발을 만든다. 도요새 요리에 이어 돼지 족 요리를 한다. 돼지 족 요리를 하면서도 ‘떠남’, ‘흐름’, ‘유목’을 그녀는 생각한다. ‘드넓은 세상으로의 이탈, 저 발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뜨거운 세상을 얼마나 또 걷고 걸었는지 
다갈색으로 그을린 발등의 살점들 우둘투둘하다. 
관절마다 건강한 촌부의 마디처럼 굽어 있다, 울컥
굳은살에 도는 기운
발바닥이 따스한다.
   -「발바닥이 따스하다」부분

 그러니까 돼지들도 유목을 꿈꾼다. 이탈을 꿈꾼다. 걷고 또 걸어서 다른 세상에 닿기를 꿈꾼다. 도요새처럼 날개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네 발로 걷고 걸어서 관절마다 울컥 굳은살이 돋는 촌부가 되고 싶은 것이다. 돼지 족을 삶으면서도 유목민의 삶을 뽑아내는 그녀는 뼛속까지 흐르는 삶을 사는 여인이다.

수심 깊은 강은 그저 물만 모여서 된 것은 아니예요. 속으로 속으로 견뎌 근심이 되고, 위장병이 된 지병같은 여자의 굵은 주름이예요. (중략) 굵어진 주름으로 흐르는 강 같은 여자, 어머니가 젖고 있네요. 강물이 깊어진 것은 오래도록 함께 흐르지 못한 것들의 독한 상처 탓일텐데요. 
   -「상처가 흐르는 것은」부분

 눈물은 상처다. 눈물은 주름이다. 눈물을 흘릴 때 우리의 얼굴과 심장의 근육은 떨린다. 눈물은 주름이면서 떨림이다. 세상의 상처는 주름을 타고 흐른다. 달빛의 눈물이 진주라고 했던가? 인어의 눈물이 진주라고 했던가? 바다는 눈물이 가득하다. 눈물이 가득한 바다는 늘 엉엉 운다. 바다는 갓 태어난 간난아이처럼 온몸이 주름투성이다. 뱃길따라 또 다른 주름이 접히고 펴진다. 파도의 이랑. 파도의 고랑. 파도의 능선. 파도가 파도를 가르고 접고 펼쳐진다. 들뢰즈의 표현을 빌면 경계 너머의 탈영토. 아장스망(Agencement), 리좀(Rhizome). 출렁임은 주름이다. 전율, 출렁임, 감동, 흐느낌. 주름은 무늬. 무늬는 결. 바위도, 해변도, 절벽도 무늬와 결로 가득 차 있다. 무늬와 결 그 자체다. 곡률이다. 연속체의 미로다. 끝없이 연결된 미로. 모래와 모래가 모여 유선을 이룬다. 토요일을 지나 일요일로 바다 안개가 흘러가고 파도소리가 흘러갔다. 감각의 방향으로 파도는 흐르지. 파도는 60억년을 쉬지 않고 출렁이고 있다. 지구의 생성과 함께 했다. 그리하여 시간은 파도처럼 흐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덧칠하고 지우고 또 덧칠하는 파도 얼룩의 아른거림. 그곳에는 슬픔과 아픔이 녹아 있다. 갈매빛 슬픔의 깊이를 다 담고 있는 파도.

5. 호모 노마드의 근원적 특징들 ② - 무목적의 아름다움
  수천 미터 심해가 뒤집히고 수평선이 아우성치는 해류의 몸짓. 광란의 몸짓으로 몇 개 나라를 온통 들썩이게 만드는 파도의 몸살. 끝없이 연결된 미로처럼 달빛은 지구의 구름을 지나 해변으로 스며들어 파도의 성분이 되고 있다. 연속체의 곡률을 이루며 철썩이는 비릿한 해조음이 목덜미를 휘감고 뼛속까지 녹아든다. 바다는 근원적으로 흐른다. 흐르는 것들은 바다로 모인다. 최광임 시인은 바다다. 호모 노마드다. 홈리스다. 떠도는 영혼이다. 
 호모 노마드에게는 근원적인 특징이 몇 가지 있다. 무엇일까? 
떠남과 정박에 대한 끝없는 몽상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작품 속에서는 가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단어나 어구가 많이 나온다. 최광임 시인이 실제로 도요새를 잡아서 요리를 했겠는가?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몽상의 결과물이다. 그녀가 멕시코만 근처에 가 보았겠는가? 아니다. 그녀의 애인이 아라비안나이트의 저명한 산술가였겠는가? 아니다. 또한 떠남과 정박의 DNA가 토해낸 어휘들은 동사가 많다. ‘흐르다’, ‘떠나다’, ‘걸어가다’, 가로지르다‘, ’횡단하다‘, 들이친다’, ‘끓인다’, ‘차오른다’, ‘스며든다’라는 용어를 빼버리면 그녀의 시는 죽어버린다. 동사와 동사가 만난다. 동사와 동사가 헤어진다. 그 사이에 명사가 있다. 
 또 어떤 특징이 있을까? 그녀가 진정, 거짓이 아닌, 뼛속까지 호모 노마드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면 그녀만의 특징은 무엇인가? ‘무목적’의 가치관도 호모 노마드의 특징일 수 있다.

그러니까 너와 나의 만남에는 목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헤어짐에도 이유가 없다
우리는 오래 전 떠나온 이승의 유목민
오던 길 가던 길로 그냥 가면 된다, 그래야만 비로소
너와 나 들꽃이 되는 것이다
달이 부분 가을 들판을 가로질러 가면
구절초밭 꽃잎들 제 스스로 삭이는 밤은 또 얼마나 깊은지,
다만 그곳에 났으므로 그곳에 있을 뿐,
가벼운 짐은 먼 길을 간다
   -「이름 뒤에 숨은 것들」부분

 정주(定住)하는 사람들은 목적의식이 강하다. 어떤 뚜렷한 가치와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것이 정주하는 삶의 형태다. 얽매이는 삶이다. 무목적은 이와 대비된다. 흐르면 흐르는 대로 삶을 맡긴다. 떠도는 삶에는 특별한 목적이 동반되지 않는다. 만남과 헤어짐도 흐름의 한 방식일 뿐이다. 만나서 함께 살림을 꾸리고 평생 같이 살자는 약속 따위는 필요 없다. 어떤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해 사는 것보다는 그냥 살면 된다. 살아지니까 사는 데까지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들꽃이 그렇게 살고 있다. 구절초의 삶에 ‘지구를 아름답고 향기롭게 만들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없다. 그냥 이유를 묻지 않고, 뜻을 헤아리지도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삶은 집요한 게 아니다. 삶은 필사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이 호모 노마드의 삶의 양식일 것이다.
 바다는 어떤 목적이 있어서 흐르는 것은 아니다. 어떤 목적이 없다. 만남에도 목적이 없고 떠남에도 이유가 없다. 인간은 바람을 잔뜩 머금고 전진을 하는 파도에게 과속 범칙금이나 신호 위반 딱지를 뗄 수는 없다. 밀물과 썰물에게 갓길에 정차하라고 명령을 내릴 수는 없다. 아득한 수평선에게 전방 주시 부주의 범칙금을 물릴 수는 없다. 방파제와 추돌하며 정박 중인 어선에게 타박상을 입히고 도망치는 포말을 뺑소니로 처벌할 수는 없다. 60억 년을 외톨이로 살아온 섬이여, 제자리걸음을 하는 너에게 주차위반 딱지를 뗄 수는 없다. 바다는 호모 노마드이기 때문이다. 지구는 끝없는 우주에서 왔기 때문이다. 가파른 섬의 절벽에서 뛰어내리며 연애하는 갈매기를 풍기문란으로 단속할 수는 없다. 여객선을 따라다니며 새우깡을 먹는다고 해서 식품위생법위반죄로 갈매기를 처벌할 수는 없다. 호모 노마드의 속성은 인간의 문법 이전에 존재한다. 태어나서 어떤 목적과 성취욕과 욕망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삶은 호모 노마드의 근원적 삶과는 거리가 멀다. ‘옥천 영동 지나 그만 추풍령을 넘었다/ 예상에 없던 김천까지, 되짚어 국도를 달린다’(「오래 전부터 그 길을 다니고」)처럼 불쑥, 그냥, 예상에 없던 길로 접어든다. 무목적이다. 되돌아보는(look back) 행위와 내다보는(look forward) 행위를 반복하고 있는 파도. 아득한 거리를 순식간에 눈동자의 도달 가능성의 거리로 환산시키는 존재. 액션-상황-액션-이동-액션-상황-이동의 반복성. 극한의 소진 상태로 밀고 나아가는 존재. 그 끊임없는 운동성과 역동성이 슬프고 아름답고 고독한 존재. 그리하여 파도보다 더 큰 이유는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잣대로는 그 이유를 알기 어려운 파도의 몸짓. 무목적성의 쓸쓸함과 아름다움과 이상한 울림은 그곳에서 태어난다.

6. 호모 노마드의 근원적 특징들 ③ - 야성의 격렬한 사랑
 야성성이 없이 호모 노마드의 삶은 불가능한지도 모른다. 격렬한 사랑에 대한 열망이 없이는 유목민의 삶은 무미건조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녀는 아파트라는 정주의 공간에서 앞산의 나무와 숲과 새와 꽃들을 바라보면서 관조의 자세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떠남을 위한 휴식이나 에너지의 재충전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그녀의 삶은 머뭄이기보다는 떠남이고 흐름이다. 

아세요, 팥죽 끓이다 보면
새알심 다글다글 끓어 넘치는
정점의 온도
(중략)
새알심이 우박처럼 끓어 넘쳐요
무심코 숙인 얼굴로 쏟아지는 비
빗방울 튀듯 끓어 넘치는데요
   -「팥죽을 끓이며」부분

 그녀는 조용히 사물을 관조하거나 음식을 만들다가도 어느 임계점에 도달하면 끓어 넘친다. 요즘 팥죽을 끓이는 여자가 몇이나 될까? 그녀는 족발도 집에서 해 먹는다. 팥죽도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는다. 요리 솜씨가 대단한가 보다. 요리를 통해서, 요리의 재료를 통해서 그녀는 펄펄 끓는 거친 바다의 출렁임을 본다. 흐름과 주름과 파도침과 끓어오르는 역동적인 에너지를 본다. 바다가 지니고 있는 미칠 듯한 야성의, 격렬한 사랑을 본다. 

나 다 내어주고서 그대 안의 찰방찰방 물이고 싶었네 무겁게 지고 갔던 가슴의 겨울산과 건드리면 문드러질 것 같은 속내 내려놓고 얼마나 안녕한지 어떻게 안녕한지 보고 싶었던 그대, 그대에게로 그대에게로 깊숙이 자맥질하였네 강심을 것질러 오르면 거기 물 속 버드나무 군락 숨소리 분주했네 의지할 데 없는 것들 죄다 쓸려와 뿌리 내리고 사는 곳 수초 사이 살아있는 것들의 한바탕 정사
    -「버드나무」부분

 물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버드나무를 노래하고 있다. 버드나무는 군락을 이루고 있다. 그곳은 수초와 물고기들의 은신처이며 서식처다. 붕어와 잉어의 산란철을 보라. 수초를 마구 헤집으며 격렬하게 산란을 하는 물고기들의 미친 정사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물속에 사는 것들은 몸짓에 충실하다. 감성과 자아도취의 예술적인 몸짓으로 살아간다. 
벤치 위의 남자에게서 사향내가 난다
사랑이 묵으면 짐승이 되는 것일까

이집트의 벽화에서 걸어 나온
가시돌기의 혓바닥과
몰약(沒藥)에 굳어진 몸속에서도 
솟구치던 발정기
   -「고양이」부분

 몰약은 유향과 함께 좋은 향료중의 하나에 해당한다. 수컷 고양이를 통해 남자의 향기를 느낀다. 꽃보다 진한 사향을 풍기는 사내를 감지한다. 외로움의 냄새가 진동하는 남자를 읽어낸다. 남자가 발정기를 느꼈다는 것은 여자가 암내를 풍겼다는 것일 것이다. 그녀는 암내를 풍기는 외로운 여자이고 싶은 것이다. 

자동차가 가로수가 벙어리 빌딩들이 사람들이
천막 속에서 이상한 몸짓의 소리를 내며
이곳저곳으로 뛰어들거나 뛰쳐나오곤 했다.

몇몇의 연인들은 산란기의 물고기처럼
은밀한 곳으로 헤엄쳐 가기도 했으며
육지에 오른 바다와 한통 속 된 연인들
꼬리에서 정액이 난분분 흩날렸다
   -「폭설」부분

 폭설도 액체다. 쏟아지고, 뛰어들고, 분출하고, 사정하고, 흐르는 존재다. 
 좋은 시와 그렇지 않은 시를 구분하는 나만의 삐딱한 기준이 있다면 그 중의 하나가 자기 검열이나 윤리의 검열로 재단하지 않고 정제되지 않은 무의식을 솔직하게 쏟아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다고 할 것이다. 폭발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판가름이기도 하다. 촤충우돌의 에너지가 느껴지느냐 아니냐의 기준이기도 하다. 정련된 언어와 정확한 어휘보다는 살 떨림의 감각과 솔직한 발성이 때로는 더 멋진 시로 다가온다. 엄청난 체험의 중압감에 시달리지 않으면서 체험을 요리하고 맛볼 줄 아는 능력! 한 숟가락 입에 넣으면 감전이 오는 요리! 솔직함! 짜릿하고 통쾌함! 간혹 미친년의 모습이 드러나는 시! 그러면서도 생명성이 넘실거리는 시! 찌질하지 않은 시! 신파의 애절함과 슬픔과 비애에 풍덩 빠지지 않는 시! 우울하지 않은 시! 아픈 상처가 많을지라도 우울한 내상보다는 격렬한 여성성을 홍어찜처럼 드러내는 시! 폭설의 생력(生力)과 물고기의 율력(律力)이 느껴지는 시! 물고기의 산란을 꿈꾸는 반인반어(半人半魚)의 에코-페미니즘의 시! 그것이 액체의 수력(水力)으로 삶을 요리하는 최광임 시의 특장이다.

겨울바다에 가려거든
바람 부는 날 가십시다
사랑도 불처럼 뜨거운 것이라야
가슴 데이듯
하얗게 이빨 드러내놓고
미친 소리로 외쳐대며 퍽퍽
까무러치는 모습
보아야 할 거 아니오

바다와 툭 터놓은 이야기 한 판
끝나거든 가슴 헤쳐 놓고
사랑 한 알
미움 한 알
소주잔에 타서 마십시다
생애 굽이굽이 꿈틀거리는
접시 위 낙지의
비애를 떠올려 보기도 하고
고무다라 위 좌판 벌여놓은
석화같이 버짐 핀 아낙의 매운 삶을
엿보거나 그렇게
사랑도 미움도
갈팡진 우리의 내일도
소주 한 잔에 섞어 마시고 오십시다

겨울바다에 가려거든 부디
바다가 요동치는 날 가십시다
   -「겨울바다에 가려거든」전문
 
 이 시를 읽으면서 슬픔이 느껴지는가? 미움이 느껴지는가? 아니다. 경쾌하다. ‘쿵, 하면 짝, 하는 트롯처럼’(「폭스트롯처럼」) 경쾌하다. 격렬하다. 시원하다. 막힌 것이 확 뚫린다. 아픔과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법을 터득했다. 더 이상 눈물을 찔찔 짜면서, 가슴을 쥐어짜면서 아파하지 않는다. 
 미치도록 외쳐대며 술을 마시자. 바다는 다 받아준다. 가슴 헤쳐 놓고 까무라치며 소주 한 잔 하자. 바다는 다 받아준다. 다 ‘받아’주니까 ‘바다’인 것이다. 사랑도, 미움도, 외로움도, 비애도 다 털어마시자. ‘바다’는 다 ‘받아’들인다. 바람부는 겨울바다. ‘바람’은 모든 인간의 ‘바램’을 다 ‘받아’들인다. 요동치는 겨울바다처럼 소주 한두 잔에 우리의 마음도 요동친다. 흐른다. 출렁인다. 주름이 인다. 굴곡이 생긴다. 다시 한 번 반복하자면, 들뢰즈의 표현을 빌면 경계 너머의 탈영토. 아장스망(Agencement), 리좀(Rhizome). 출렁임은 주름이다. 전율, 출렁임, 감동, 흐느낌. 주름은 무늬. 무늬는 결. 바위도, 해변도, 절벽도 무늬와 결로 가득 차 있다. 무늬와 결 그 자체다. 곡률이다. 춤이다. 드넓은 바다와 함께 춤을 춘다. 도요새의 날개짓도 춤이다. 최광임 시인은 바다를 들이고 바다가 된다. 


*장인수 : 충북 진천 출생. <시인세계> 등단, 시집 『유리창』, 『온순한 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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