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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호/책 크리틱/최광임/부조리의 세계와 우화 혹은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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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크리틱
최광임
부조리의 세계와 우화 혹은 신화
세월호 참사는 총체적으로 부조리한 우리 사회의 자화상임을 확인시켰다. 우리는 집단 죄의식과 자기비하에 빠졌으며 슬픔과 우울과 분노의 도가니 속에서 일상을 제대로 꾸리지 못하고 있다. 이런 집단적 슬픔은 한두 달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전쟁이 잃어난 것도 아니며 나라에 왜적 떼가 든 것도 아니다. 인간의 잘못과 무능으로 눈 버젓이 뜨고 삼백 여명의 산 생명이 물속에 수장되는 상황을 실시간으로 목도하지 않았는가. 그것도 꽃 같은 어린 학생들 수 백여 명이 죽어가는 상황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본 후임에랴 슬픔과 분노가 쉽게 가실 리 만무하다.
나 역시 일상이 손에 잡히지 않는 날들 속에서 시집 페이지를 몇 번씩이나 반복하여 넘겼는지 모른다. 물리적 세계의 부조리는 그만큼 사람의 자유로운 정신을 결박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어느 날 읽고 있던 시집이 눈에 들어오는 때가 있다. 마치 필연적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시 붙들기는 물리적 세계의 부조리가 사라져서가 아니다. 내 손에 들려있던 시의 문장에도 부조리한 세계가 내재해 있다는 것과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의식의 발로가 발동하기 때문인 것이다. 하여, 먼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처럼 김유석의 시집 『놀이의 방식』과 이초우의 시집 『웜홀 여행법』을 새로운 마음으로 만난다.
무리로부터 거리 두기 혹은 실존 – 놀이의 방식
그렇다. 어쩌면 인간이 선하다는 것은 이 부조리로부터 스스로를 정화시키고자 하는 자발적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나를, 이 사회를 부조리하게 만드는 것들과의 불협화음에 대한 관찰자 혹은 관조자가 됨으로서 비로소 거리두기를 할 수 있다는 점, 그것을 발견하고부터는 시가 위안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부조리한 세계로부터 탈피나 절망 내지 외면이 아니라 부조리한 세계와의 고투 그리고 관조, 그 길에 시인이 소망하는 세계가 있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부조리한 지금으로부터 우리가 벗어날 수 있는 내일이 되는 것이다. 김유석의 두 번째 시집 『놀이의 방식』 또한 내게 그 범주로 읽히는 이유다.
부조리는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또 다른 부조리를 낳는다
그런 삶에 관한
나는 서투른 시니시스트일 것이다.
- 「자서」
199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상처에 대하여』 첫 시집에 이은 김유석의 두 번째 시집 자서이다.
세계가 부조리할수록 우리의 슬픔과 분노는 크다. 동시에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정신은 자정작용이라는 기제를 작동시킨다. 즉, 그 부조리로부터 자유롭거나 안전할 수 있는 전략적 방법을 모색하는데 집중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내 모든 관점이 세상의 ‘부조리’라는 사회적 행태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이번 세월호 참사와 무관치 않다고 한다면 김유석이 느끼는 부조리함 또한 삶의 방식으로써 사회적 관계가 양산해 낸 부조리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다만, 김유석이 택하는 방식은 절대 강자가 되려 하거나 다수가 소망하는 어떤 입장을 고수하려기보다 그것들로부터 멀리 있는 이른바 냉담자적 자세를 견지한다. 세월호를 중심으로 한 총체적 부조리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절대 강자였던 선박직 직원들의 비인간성이 빚어낸 참극이었기에 (물론 2차, 3차적 책임은 사회 전반의 조직에 걸친 집단의 이기성에 있는 것이지만) 시민들의 슬픔과 분노가 크고 오래 가는 것이며 해결의 실마리에 끝이 보이지 않는 상태이다. 여기엔 기득권층이라는 이들의 난무한 권모와 그들에게 책임을 묻고 난제를 타개하려는 시민들 간의 첨예화된 갈등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김유석은 그러한 고질적인 관계망들로부터 결사적인 강자되기를 포기하며 과감한 거리두기를 한다. 그럼으로써 비극으로 치달을 수 있는 극단적 위험을 제거해내는 것이며 삶의 방식을 이 사회가 추종하는 것과는 반대적인 것, 주변이면서 약한 것에 집중하며 스스로가 바보를 자처하는 삶으로 바꿔 살고자 한다.
가령 이런 것이다. “점점 느리게 기는 쪽으로 진화해가는 중이다”(「달팽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속도로 대변되는 이 사회의 갑인 것들의 반대방향으로 ‘진화’해간다는 의지를 표명한다. 또 “무리를 짓는다는 것은 어리석음의 증거이다”, “개미는 졸라매기에 충분한 허리로 진화하기 시작했다”(「놀이의 방식」) 라고 진술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김유석이 차용한 ‘진화’가 갖는 의미이다. 진화는 기존의 것으로부터 퇴행이 아니라 진행이며 발전이다. 그러므로 달팽이는 좀 더 빠르게 길 수 있도록 진화해 가는 중이어야 옳다. 또한 사람의 속성은 사회적이며 개미의 속성은 무리 짓는 것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무리를 짓는다는 것은 어리석음의 증거’라고 진술한다는 점이다.
이는 김유석 만의 삶의 방식이며 그 방식을 자연 속 생명을 가진 것들의 생존방식으로 대비시킨다. 우화이다. 사람의 일도 우화로 받아들이게 되면 어떤 치열한 생존방식도 놀이로 간주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기 마련이다. 관조의 힘인 작용한 탓이다. 김유석은 그런 삶의 방식을 선택한 자신을 일러 어설픈 냉소주의자에 가깝다고 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누구나 지금의 나와는 다른 혹은 앞으로는 다른 나를 꿈꾸며 산다고들 하지만 가장 냉철한 기준은 ‘지금의 내가 가장 나다운 나’라고 보는 것, 그것이 명확하고 대체적인 진단이인 셈이다. 지금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말하는 것보다 그간의 내가 살아온 모습 혹은 사는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다는 말이다.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해 왔기에 지금의 나로 있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달리 말해 지금의 나는 자신이 가장 잘 살아낼 수 있는 길을 택해 살아온 실존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김유석 또한 그 점을 익히 인정하기에 자신을 ‘어설픈 시니시스트’일 것이라고 말한다. “무리를 짓지 않는 어떤 새가”(「孤高」)처럼 이 사회에서 주류인 것들의 부류를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그것들과 부딪치며 살고자 하지 않았다는 반증인 셈이다. 그럼으로써 스스로 중심으로 살아가겠다는 의지가 표출된다. “깡통을 깡통으로만 아는 순 깡통들,”(「깡통」)은 자신이 중심인 줄 알았으나 ‘순 깡통들’이었으며 무리 짓지 않은 ‘깡통’은 비로소 진정한 깡통이라고 역설하는 것이다.
이러한 김유석의 시집에서 보이는 전반적 의식은 세상이라는 무리와 ‘거리두기’라는 외형적 혐의가 짙지만 반어적으로 가장 김유석 다운 삶을 살아왔다는 의지의 발로로 읽어내면 무방할 듯하다. 다시 말해 세상의 중심, 무리의 중심으로부터 자신은 한 발 거리를 둠으로써 중심이 되는 탈개념성이 농후하다 하겠다. 김유석은 그것들을 이렇게 표현한다. “두 마리의 염소가 뜯은 풀밭은 둥그렇다/ 말뚝은 그 중심에서 나온 것” 또 “세 마리의 염소 중 선택권을 가진 건/ 그중 가장 연약한 놈이다”(「우화」)라는 것이다.
중심인 것, 강한 것과의 거리 두기는 김유석만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생존 방식인 셈이다. 이 생존 방식은 그 어떤 삶의 방식보다 치열하다. 온전히 살아내기 위한 것으로서 치열성이라는 점 또한 의미심장하다. 무리에 휩쓸리지 않고도 자신의 삶을 온전히 지켜낼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해 가는 것을 치열하게 보여주는 셈이다.
3.
젖을 물리고 달리는 동안 어미는
새끼들에게 불안을 수유하다가
그것이 극에 이르기 직전
매몰차게 새끼들을 털어낸다.
뒷다리에 매달린 곡선이 풀리는 그 순간
뜨이는 새끼들의 눈 속으로 사라지는 어미의 모습이
용케 살아남아 다시 어미가 되는
들쥐의 모성(母性) 속에서 익숙하게 뛰쳐나와
감쪽같이 직선으로 바꾸어 놓는다
- 「직선으로 만들어진 곡선-들쥐의 학습법」 부분
이런 필사의 생존방식이 또 있을까. 고양이라는 절대 강자들로부터 작은 것들이 살아남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목숨을 건 불안한 학습법만큼 치열한 것이 또 있을까. 그럼으로써 작고 나약한 들쥐새끼 하나 잡지 못한 절대 강자인 숨은 고양이는 약자가 되며 강한 고양이에게 잡아먹히지 않고 살아남아 어미들쥐가 되는 것만큼 강한 것은 없는 법이다. 실존 그 자체이다. 바로 쇼펜하우어가 말한 절망의 저변엔 실존에 대한 강한 갈망들의 반어가 깔려있었듯 김유석의 시니시스는 열망하는 생의 실존이란 몸부림과 자웅동체인 것이다.
실화와 신화 사이의 모성회귀 -웜홀 여행법
여기라는 전제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혹은 저쪽에서 이쪽으로라는 유동성을 담보로 한다. 그 사이에 인간의 사유가 있고 상상력이 있다. 상상력이란 인간이 끊임없이 생각한다는 것이며 그 생각은 움직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강구하는 답은 존재치 않으며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롭다. 자유롭기 때문에 나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거나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도 있다. 신에 대한 믿음과 부정 사이에 시간이 존재한다. 우리가 여기 산다는 것은 신의 자취를 찾아가는 시간여행이 되기도 하는 것이며 나를 찾아가는 시간여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이쪽으로든 저쪽으로든 움직인다는 것은 내가 신을 찾아 시간을 소급해 간다는 것이거나 여기 나에게로 신의 시간을 소환해 온다는 것이기도 하다. 확실한 것은 어떻게 흐르고 움직이든 나는 여기 존재한다는 것이며 이초우의 첫 시집 『웜홀 여행법』은 신의 시간을 여기로 소환해 오는 후자에 가깝다 하겠다. 그 중 특이점이라면 유독 물이라는 정령과 여성 신과의 조우를 가시화 한다는 것인데 이때 화자는 정복하고자 하는 강인한 남성성의 발로가 아니라 안온과 돌봄 혹은 정화의 기제로 삼고자 하는 입장에 있다는 점이다.
남루한 옷이라도 의복은 욕심의 근원이다 좌절감에 빠져들어 웅크리고 있는 시엔의 알몸,
파열되기 직전의 네 영혼이 가장 영롱하고 슬프다
깨지는 것은 물의 산란, 갠지스 강 발원지 고묵에 가서 얼음물에 첨벙대며 내가 목욕을 한다 물의 여신에게 치르는 성스러운 의식, 너의 증발은 분명 환생의 씨뿌리기이다
-「연잎 위의 물방울」 후반부
하지만 난 너무 지쳤습니다 의식은 혼미해 자욱한 안개 속을 비틀비틀 뛰고 있었지요 그러면서도 나는 또 다른 나를 앞질러 가기 위해 사력을 다해 뛰었습니다 반환점이었어요 반질반질 윤기 나는 투명 물주머니 하나가 보였어요 나는 그 동그랗게 생긴 물주머니를 보자마자 머리로 힘껏 들이받아 막을 찢고 뛰쳐 들어갔지요 물주머니 안의 물을 울컥울컥 들이켠 나는 갑자기 둥둥 떠 있는 무의식의 황홀함을 느꼈어요 이젠 이전의 내가 아니었어요 그렇게 많았던 나는 죄다 어디로 갔는지, 돌아 내려오는 내 발길 참 부드럽고 여유로웠습니다 불그스레한 연어 알 같은 내 몸을 쉴 새 없이 굴리며, 나는 강이 도달하는 호숫가에 머물기 위해 하구 쪽으로 자꾸만 미끄러져 내려갔어요 호숫가 작은 집, 나는 그 집을 자꾸만 키워 호수를 가득 메우게 했지요 어느 날 내가 모래톱을 부수고 기어 나가 아장아장 안뜰을 걷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 호숫가에 머물기 위해」후반부
물의 환경은 여성의 환경이다. 물은 잉태와 생명과 탄생 그리고 풍요의 상징이다. 물은 세계 역사 속에 등장하는 각 나라의 건국 신화엔 물의 여시조나 물의 왕비가 등장한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창조신화에 나오는 물의 여신 쑨퀴 그리고 고구려의 여시조인 동명왕의 어머니 유화는 용심연 출신이며 개성대정이란 우물여인인 고려의 여시조 용녀가 그렇다. 뿐만 아니라 신라 박혁거세의 왕비였던 알영도 알영정이라는 물에서 왔다.
반면에 홍수 설화거나 치수 설화에 등장하는 물신은 남성성과 권력을 상징한다. 물을 다스리는 용왕신과 바다신들을 다스리는 포세이돈, 예언의 힘을 가졌던 바다 신 네레우스 등이 그렇다. 이 밖에도 물과 관련된 신화나 설화는 민족별, 대륙별, 국가별, 지역별로 구체적이고도 다양하게 분포되어 우리 일상의 삶과 함께 해 오고 있다.
특히 물이 생명수라는 과학적 사실을 떠나 우리는 유독 물과 친숙한 신화나 설화를 지니고 있다. 바다로 둘러싸인 제주도를 지키는 선문대할망 설화나 서해 바다를 지키고 있는 변산의 개양할매 설화도 있다.
이는 모두 탄생의 신이며 보호의 시인이며 여성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이초우의 물에 대한 정념은 이러한 연원에 닿아있음이기도 하다. 이때의 물은 자아를 재탄생하게 하거나 환생하게 하는 기제이다. 귀결점은 어머니인 것인데 곧 ‘물에 씻는다’라는 정화의식을 거쳐 종내는 ‘환생’ ‘탄생’이라는 모성의 신에게로의 귀의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셈이다.
“얼음물에 첨벙대며 내가 목욕을 한다 물의 여신에게 치르는 성스러운 의식”(「연잎 위의 물방울」)이라는 것이다. 목욕을 하는 것은 “환생이 씨뿌리기”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자아를 물의 정령에 의해 정화시키는 이유는 환생하거나 탄생을 염두에 둔 일차적 의식인 셈이다. ‘지치고 의식은 혼미해’진 상태에서도, ‘또 다른 나를 앞질러 가기 위해 사력을 다해 뛰’어 가는 상황에서도 이초우는 방주를 만들고 물살을 가르는 신과 같은 존재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둥글고 부드러운 물주머니를 만남으로써 반환점을 맞는 것이다. 경쟁과 사투하는 의식과 같은 발걸음이 아니라 둥둥 떠 있는 황홀감과 부드럽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변하여 미끄러지듯 호숫가로 가게 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초우가 말하는 “아장아장 안뜰을 걷기 위해서 말입니다”라는 대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아장아장’은 아이의 걸음인 것이다. 경쟁과 권력을 상징하는 강한 남성성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 정화와 탄생에 염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화자가 악전고투해 왔던 것은 그 호숫가에 오랫동안 머물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리하여 영혼이 순수하고 어린 아이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 열망을 표현한 의지라고 할 수 있겠다.
선재동자가 거울 같은 물방울을 올려다보고
두 손 모아 간절히 길을 묻는다
약간의 어둠이 뿌옇게 내려앉은 대낮의 차창
.
.
또 다른 내가 길을 틔우려 휙, 또르르 뛰어내린다
아직도 선재동자가
저 아기집 속 보살 제 자신인 줄 모르고
엎드려 경배하고
젖은 눈물방울로 간절히 길을 묻고 있다
-「물방울」 부분
이초우는 물방울에서 자아의 정화를 위한 구도의 길을 본다. 그것도 ‘아기집’에 든 순수하고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한 길을 여행함으로써 다자로 흩어진 자아들 중 진정한 자아를 만나는 것이다. ‘둥글다’가 상징하는 물방울들은 다시 의미가 확장되어 모성으로 귀결됨에 주시할 필요가 있다. 부조리한 사람의 세계에서 가장 덜 부조리한 것은 바로 모성이라는 이름 아래 관계 맺은 모(母)와 자(子)의 관계이다. 그 어떤 남성도 어머니 앞에선 작은 아이가 된다. 이초우가 ‘아장아장’ ‘첨벙첨벙’ ‘아기집’등을 표현하는 이유라 하겠다.
더욱이 이제 고대의 신화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부활했다. 그것은 신성불가침한 정령의 세계에서 대중의 물신주의적 세속화를 지향함으로써 천상에서 천하로 하강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증적 세계관을 보여줘야만 하는 현대의 신화는 장엄과 위엄 신성함을 버리고 강장음료 이름으로 부활하고 자동차 모델명으로도 부활한다. 기꺼이 신통, 신기록, 신기함을 상징하는 수사적 존재로 가치를 유예시킨다.
이러한 현실을 이초우는 감각한 것이다. “가이아 신의 피부에 빗금 소리 상처를 내며 휘청거리는 킬힐, 그럴 땐 킬힐을 버리고 웨지힐로 여신의 어깨를 위무해야 하리라// 분명 힐은 여자에게만 주어진 신의 악기이다”(「신의 악기」) 라고 말하는 것은 이 시대의 변화양상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일이라 하겠다.
이초우는 현대의 물신으로 환생한 신들에 대한 의미를 부정도 긍정도 아닌 일상의 삶으로 환치시킨다. 그럼에도 자아의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물의 정령을 통한 탄생을 열망한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 한 방편으로 ‘많은 나‘라는 말을 즐겨 쓴다. 내가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사회의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패러다임 때문이며 우리는 그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부조리한 사회에 존재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자아는 사회의 변화와 함께 경쟁하고 욕심내야만 한다는 강박증과 함께 나의 분열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나, 이러기도 하는 나, 그렇지 않은 나 등등. 이렇듯 분열된 자아와 최초의 순수자아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을 이초우는 물의 신을 통해 최초의 시간으로 되돌아가 다시 삶을 시작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출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최광임 : 전북 부안 출생. 2002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내 몸에 바다를 들이고』, 『도요새 요리』. 현재 《디카시》 주간, 《시와경계》 부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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