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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호/특집1/현대시와 방/김종태/유랑의 공간과 성찰의 시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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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1 현대시와 방
김종태
유랑의 공간과 성찰의 시정신
-일제강점기 시에 나타난 방(房)의 형이상학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에서 태어나서 방에서 죽어간다. 그 곳이 병실이든 자신의 집이든 우리는 방을 떠난 곳에서 삶과 죽음의 서사를 만들어내기 어렵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방으로 들어가거나 방에서 나오곤 한다. 방문을 열고 대문을 열고 집을 나서면 길이 나타나고 그 길을 따라서 걷다보면 다시금 들어가야 하는 방을 지닌 집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의 시간은 언제나 방과 길과 집의 공간을 기억할 것이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겠으나 방은 우리의 인생이 지닌 시간 중의 많은 부분과 결합한다. 즉 방안에서의 시간을 완전히 거부한 인생은 존재할 수 없다.
시인에게 방은 어떤 공간일까! 시인들은 자신이 머물고 있는 방에서 깊은 생각에 잠기고 그 생각을 가다듬어 시를 쓸 것이다. 시인들이 과거에 머물렀고 현재 머물고 있으며 미래에 머물게 될 방은 그들의 시세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매개체가 될 것이다. 시대를 초월하여 방은 시의 공간의식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다. 민족의 이산과 해체가 심화하고 유랑하는 삶이 늘어가던 일제강점기 시인들 역시 방의 공간을 주요 소재로 삼아 거기에서 얻은 사유를 형상화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 중에서도 만주 일대를 유랑하며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 「흰 바람벽이 있어」 등 방의 공간의식을 보여준 작품을 여러 편 남긴 백석이 먼저 떠오른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셔츠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메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서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인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쨤”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넬․마리아․릴케”가 그러하듯이
-「흰 바람벽이 있어」 전문
이 시의 방 속에는 생의 비극성이 꿈틀거린다. 그가 지닌 비극적 세계관은 지식인 시인의 포즈가 아니라 궁핍한 시대를 횡단하면서 유랑의 삶을 살아야 했던 자의현실 인식의 방법이었다. 공동체적 세계에 애정을 가졌던 시인은 원형적 삶의 붕괴를 극복하면서 존재의 의미를 성찰해 나갔다. 그의 허무주의가 아름다운 서정시의 품격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비극적 세계관을 내면화하여 다시 그것을 승화시키고자 했던 시인 자신의 처절한 의식 투쟁의 결과에 이유가 있겠다. 화자는 추운 겨울의 어느 저녁 작은 방안에 홀로 앉아 바람벽을 바라보고 있다. 바람을 막아 주는 바람벽은 내면에 드리운 의식을 끄집어내는 존재의 거울이다. 바람벽은 흡사 영화관의 은막(銀幕)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데 화자는 그것을 통하여 내면의 풍경으로 만들어낸 영화 한 편을 보고 있다. 바람벽이 시인에게 뚜렷이 환기시켜 주는 것은 존재의 쓸쓸함이다. 화자는 흰 바람벽을 통하여 헤어진 어머니와 애인의 모습도 떠올린다. 어머니는 이미 가난하게 늙어 버렸으며 이렇게 추운 날에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애인 역시 영영 멀어진 사람이 되어 버렸다. 화자의 내면 공간을 비추는 흰 바람벽은 극도의 슬픔과 외로움을 전해 준다. 이 모든 것은 화자 스스로가 행하는 사고 과정의 결과이다. 스스로 자신의 의식을 비극의 중심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그런데”에서 시상은 반전된다. 화자는 흰 바람벽에서 존재의 비극성을 해명해 주는 진술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절망을 운명의 영역으로 돌리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것은 운명에 대한 사랑이다. 그는 세상의 가장 귀한 것들은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살아가야 하는 숙명을 타고났다고 생각함으로써, 고독과 가난을 겪는 자신을 지고지순한 가치를 지닌 존재로 받아들인다. 여기에 백석 시가 지닌 자기 긍정의 아름다움이 자리 잡는다. 이 시는 허름한 바람벽으로 둘러싸인 방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아 비극을 내면화하여 승화시키고 있는 감동을 선사한다.(「흰 바람벽이 있어」에 관한 논의는 김종태, 한국현대시와 서정성, 보고사, 2004, 116-119쪽을 인용하고 참조하였다.)
백석이 고향 평북 정주를 떠나 만주 일대를 유랑한 시인이라면 동시대 시인인 정지용은 고향 충북 옥천을 떠나 교토와 서울을 유랑한 시인이다. 백석 시와 마찬가지로 정지용 시에는 비애와 고독과 고통이 배어 있다. 그가 일본 유학을 마치고 조국으로 돌아와 바쁘게 살아가던 서울의 방을 소재로 한 「시계를 죽이다」는 이 무렵 정지용의 내면의식을 구체적으로 부여주고 있다. 정지용에게 서울은 행복을 추구하는 안식의 공간이 아니라 근대 문명과 처절히 맞서야 하는 고난의 공간이었다.
한밤에 벽시계(壁時計)는 불길(不吉)한 탁목조(啄木鳥)!
나의 뇌수(腦髓)를 미신바늘처럼 쫏다.
일어나 쫑알거리는 「시간(時間)」을 비틀어 죽이다.
잔인(殘忍)한 손아귀에 감기는 간열핀 모가지여!
오늘은 열 시간 일하였노라.
피로(疲勞)한 이지(理智)는 그대로 치차(齒車)를 돌리다.
나의 생활(生活)은 일절 분노(憤怒)를 잊었노라.
유리(琉璃) 안에 설레는 검은 곰인 양 하품하다.
꿈과 같은 이야기는 꿈에도 아니 하련다.
필요(必要)하다면 눈물도 제조(製造)할 뿐!
어쨌든 정각(定刻)에 꼭 수명(睡眠)하는 것이
고상(高尙)한 무표정(無表情)이오 한 취미(趣味)로 하노라!
명일(明日)!(日字가 아니어도 좋은 永遠한 婚禮!)
소리 없이 옮겨가는 나의 백금(白金)체펠린의 유유(悠悠)한 야간항로(夜間航路)여!
-「시계를 죽임」 전문
이 시의 공간적 배경은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시계가 있는 도시의 방이다. 이 방에는 바쁜 일상을 고달프게 살아가야 하는 근대인의 고뇌가 있다. 근대 도시는 정지용에게 기계적인 삶의 형식을 강요했다. 정지용은 도시적 체험에 어려움을 느낀 나머지 협소한 공간 속으로 더욱 자주 침강해 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근대적 시간의 노예로 전락하고 있는 지식인의 자의식을 형상화하고 있는 이 시의 공간적 배경인 방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화자는 열 시간의 고된 노동을 한 후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 공간이 자신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 줄 수 있는 안락한 공간이 되어 줄 것을 희망하였다. 그러나 그 공간 역시 근대적 삶의 위험성이 관여하는 공간이었다. 지금의 방은 유년의 화자가 체험한 고향집의 방과는 전혀 다른 곳이다. 이곳에는 생존을 위한 기계적인 노동만을 강요하는 무서운 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서민은 하루의 노동이 끝나면 시계의 방으로 돌아와야 한다. 근대 공간은 원형적 체험이 속(俗)의 세계에 묻혀버린 공간이며 원형적 공간으로의 도피는 생존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일이므로 도시인은 그곳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고독과 고난을 감내해야만 한다. 휴식을 하거나 수면을 취하는 동안에도 바늘 소리를 내며 움직여야만 하는 시계를 “불길한 탁목조”로 표현한 비유나, 그 바늘이 자신의 뇌수를 찌른다는 시의식에서 근대적 삶으로 인한 고통은 극대화한다. 시계바늘을 뽑아 버림으로써 화자는 시계의 소리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나 시계를 멈추게 하였다고 시간이 멈추는 것은 아니다. “피로한 이지는 그대로 치차(齒車)를 돌리다”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 화자는 도시 공간에 대한 염증을 극복할 수 없었으며 마침내 그러한 극복 의지를 포기한다. 시계의 방을 지배하는 것은 합리주의이다. 근대는 합리적인 계몽성을 내세워 인간을 교육시키고, 병든 인간을 치유할 과학적인 방법을 창출해 내고자 하였다. 이 때 시간은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철저히 계량화된다. 속도와 편리에 기여하지 않는 시간은 합리성이 결여되었다는 이유로 배제되었다. 더 많은 편리와 더 증가한 속도를 위하여 근대의 시간은 전근대의 시간과 속히 분리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문명의 발달에 비례하여 행복 수치가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근대적 환경에 적응을 하지 못한 사람들은 시계의 방안에서 불안해 한다. 이 시에 나타난 우울과 불안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시계를 죽임」에 관한 논의는 김종태, 「정지용 시 연구-공간의식을 중심으로」, 고려대 박사학위 논문, 2002, 66-68쪽을 인용하고 참조하였다.)
정지용의 영향을 받은 시인 중 한 명으로 윤동주를 들 수 있다. 정지용의 인품과 시세계를 존경한 윤동주는 교토에서 유학한 정지용의 뒤를 이어 일본으로 떠난다. 윤동주는 릿쿄대학(1942년 입학)을 거쳐 정지용이 수학한 동지사대학(1942년 편입학)에 진학한다. 이곳 동지사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윤동주의 시세계는 더욱 깊어졌다. 그러나 그만큼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외로움과 서러움 또한 커져갔다. 윤동주가 교토에서 거처하던 일본식 다다미방은 회한과 반성으로 가득 차 있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를/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 「쉽게 씌어진 시」 전문
밤비 소리가 들려오는 이국의 육첩방(六疊房)에서 화자는 시인이라는 천명(天命)을 생각한다. 시인의 삶은 현실에 대한 투쟁을 할 수 있는 삶이기 전에 시라는 언어예술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하는 삶이다. 예술은 직접적으로 세계를 변혁시키기가 쉽지 않다. 시인의 소박한 삶을 알기에 화자는 그 운명을 “슬픈 천명”이라고 표현한다. 시는 자신의 운명이기에 화자는 언제든 시를 쓸 수밖에 없지만 그 시가 현실과의 괴리에 빠져들 때가 많을 것이다. 부모님이 보내준 사랑을 늙은 교수의 무의미한 강의에 쏟아 부어야 하는 삶은 “침전”이라고 표현된다. 그 침전 과정 속에서 쓰인 작품은 인생의 파란만장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화자는 괴로워한다. 역사적 현실과 거리를 둔 시는 모두 쉽게 쓰인 시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대처럼 올 아침”이 소중한 것은 그때야말로 비로소 자신의 반성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방황하는 ‘현실의 나’와 반성을 통해서 완성될 ‘최후의 나’가 “최초의 악수”를 통해서 만나는 마지막 연에서 윤동주가 보여준 미래지향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윤동주 시인은 이국의 방안에서 반성과 회의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소박한 긍정에 도달하고 있다.(「쉽게 씌어진 시」에 관한 논의는 김종태, 「윤동주 시에 나타난 절망과 극복 양상」, 한국문예비평연구 40집, 2013, 42-43쪽을 인용하고 참조하였다.)
이상에서 백석 정지용 윤동주 등의 시를 살펴본 바와 같이 시인에게 방은 다양한 각도로 해석되고 비유되었다. 특히 유랑의 삶을 경험했던 일제강점기의 시인들에게 방은 유랑의 정거장인 동시에 성찰의 공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의 작품들이 안겨준 방의 형이상학은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특수성에서 기인한 동시에 방의 공간의식이 주는 보편성과도 맞물려 있다. 즉 방을 매개로 한 유랑과 성찰은 비단 일제강점기 시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자본주의적 유목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시인들에게도 연결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평생 동안 수많은 공간을 체험하면서 살아갈 우리 시대의 시인들은 오늘도 여전히 방의 상징과 비유를 탐색하여 그들만의 상상력을 다양한 방법론으로 형상화해 나갈 것이다.
*김종태 :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떠나온 것들의 밤길 오각의 방, 평론집 문학의 미로 자연과 동심의 시학 등이 있음. 청마문학연구상, 시와표현작품상 수상. 현재 호서대 문화콘텐츠창작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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