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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호/특집2/제 1회 전국계간지작품상/김나영/수상장 '욱'/심사평/수상소감/신장 '길가에 널리고 널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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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
제 1회 전국계간지작품상
김나영
욱
오랫동안 나를 떠나지 않는 이름 하나 있지
죄와 벌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무렵이었던가
푸른 눈의 혁명가 이마에 키스를 할 무렵이었던가
그 도서관에서 우리는 눈을 맞췄지
때마침 화단의 맨드라미는 미친 듯 타올랐고
청춘을 장전(裝塡)한 우리는 두려울 게 없었지
사랑과 혁명을 도모하기에 우리는 충분히 위험했지
그때 ‘종욱’이었던가 ‘진욱’이었던가 ‘동욱’이었던가
혈기왕성하던 다혈질의 나와 함께
청춘백서를 필사하던 ‘욱’
체크남방 안에서 키우던 근육은 어디로 갔을까
지금쯤 착한 여자 만나 조용히 잘 살고 있을까
그를 이제 내 품에서 해방시켜줘야 할텐데
뾰족하던 그의 정신에도 둥글둥글 살이 붙어
적금통장 부풀리는 일에 전력질주하고 있을지 모를 일인데
사회적 동물이란 말을 그리 실천하고 있을지 모를 일인데
TV를 켜거나 신문을 뒤적거리다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흑백에서 칼라로
옷만 바꿔 입었을 뿐이라고
그가 내게서 와락! 돋아난다
푸른 주먹을 불끈! 쥔다
겉이 아니라 속을 바꿔야 한다고
내 안에서 수없이 종주먹을 꺼낸다
세상을 향해 ‘욱’ 어퍼컷을 날린다
- <시인광장>(2013, 10월호) 발표
심사평
<다층>에서 접수한 시들 중에서 김나영, 박이정, 송진, 임재정 시인 등의 시가 눈길을 끌었다. 그 중에 김나영 시인의 「욱」을 선정한다. 김나영의 「욱」은 지나친 수사 없이 아주 담박하고 울림이 있는 시이다. 시간을 관통하는 사유의 힘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사유는 체험에 기반하며 관념의 외피를 입지 않는다. 우리의 생(生)이 늘 ‘지금, 여기’에 귀속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욱」은 지난하게 이어져온 삶의 세목들을 씨줄과 날줄 삼아 다시 우리를 귀환시킨다. 열정의 수사와 꾸밈이 탈각되고 남은 우리들의 ‘사랑과 혁명’, 언어의 현란함보다는 담박하지만 묵직한 직방의 ‘욱’이라는 말이 참 뻐근하다.
소감
* 시작메모
시에 깃들어 산 시간이 16년째다. 이 정도 세월이면 시에 익숙해질 법도 한데, 하루라도 시에 소홀하다 싶으면 시를 읽는 것도 쓰는 것도 낯설어지는 게 내가 겪은 시의 야멸찬 얼굴이다. 고백컨대 시가 내게 온 후 모든 우상 포기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시는 좀처럼 나와 타협을 하지 않는다. 시는 내게 우상이었다가, 폭군이었다가, 연인이었다가, 시시때때로 변하는 팔색조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러나 시를 쓸 때 시의 얼굴은 언제나 무사로 변한다. 그때마다 나는 무사와 대결을 벌이는 듯한 기분에 휩싸인다. 시의 칼날을 대척하고 가로지르고 마음을 베이고, 베이고, 또 베이지만 그 순간 나는 이 세상과 결별한다. 그 무엇이 나를 세상으로부터 자유하게 할 수 있을까. 시가 만들어 준 진공의 상태, 그때 비로소 내가 내게 주인이 된다. 그렇게 한편의 시가 만들어지고 나면 온몸의 기운이 소진한다. 너덜너덜한 만신창이가 되어 있지만 그 피로감 뒤에 오는 한 줄기 쾌감이란, 이 누적된 감정의 습관이 내 몸에 온전히 깃들 때까지 나는.
수상자 신작
길 가에 널리고 널린 이야기
테니스장 담장 틈
이름 모를 꽃 한 송이
잉여처럼 피어 있다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규칙과 승부와 환호작약과 먼
세상 물정으로부터 먼
그늘진 사각지대에 꽃이 무심히
핀 줄도 모르고 피어 있다
수백 근의 적막 평일처럼 견디고 있다
별들의 기울기에 눈빛을 맞추려고
온몸 혹독하게 뒤척였겠다
테니스공에서 튕겨져 나온 햇살도 젖을 빨듯 끌어 당겼겠다
비바람과 천둥이 건달처럼 다녀갔겠다
화려함도 향기가 부실해도
사람들 눈길이 닿거나 말거나
누가 이름을 불러주거나 말거나
제가 주인인 줄도 모르는 꽃이
최선을 다해 피어 있다
저기 저, 목울대 힘껏 뽑아 올리고
아파트로 진입하는 확성기 소리
*김나영 : 1998년 《예술세계》 등단. 한양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졸업. 2005년,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시집, 왼손의 쓸모(2006, 천년의 시작), 수작(2010, 애지) -2011년 우수문학도서 선정. 현재 한양대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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