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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호/특집2/제 1회 전국계간지작품상/고명자/수상작 '헝겊인형'/심사평/수상소감/신작 '멧돼지가 출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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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
제 1회 전국계간지작품상
고명자
수상작
헝겊인형
무엇이 너의 끄나풀이었는지
겹겹으로 빨강을 껴입고 엉거주춤 서 있지
입술이 뒷꼭지까지 돌아가도록
웃음을 비틀면서
가로수를 붙들고 쫑알거리지
기댈 담벼락도 없는 바람찬 거리에서
눈총 따위 손가락질 따위 발끝으로 쓱쓱 뭉개고있지
겨울이 매연처럼 고약해서 입을 틀어막고 눈썹을 찡그린 것 아니지
얇은 남방에 꽂힌 역겨운 꽃 냄새, 그러나
망가진 코사지만으로도 너는
아름답게 버려진 저녁이다
순서 없이 껴입은 붉은 겨울은 짧거나 구겨졌거나 얇거나
미쳐서 아름다워 보인다는 험한 말이 내 목구멍을 넘어오고 말았다
누더기인 네 입술이, 눈빛이 겨울 저녁을 뜨겁게 달궈놓는다
하마터면 손 내밀 뻔했다, 다 버리고 붉음 한가지만을 기억하는
너의 집착을 데리고 집으로 올 뻔 했다
손발을 냄새를 씻기고 머리 빗겨 밥 떠먹여줄 뻔 했다
사십쯤 아니 사백 살쯤에서 멈춘 네 이름을 불러줄 뻔 했다
- 2014년 봄 계간 『예술가』 발표
선정 이유
그동안 고명자 시인은 2005년 『시와정신』 봄호로 등단한 후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쳐왔으며 2013년에 첫 시집 『술병들의 묘지』를 펴냈다. 이번에 당선작으로 결정한 「헝겊인형」은 발랄함과 재치 속에 있는 날카로운 인식이 이 작품의 특색이다. 또한 거기에는 평범 속에 내재된 아픔 또한 간직되어 있다. 그것을 감각적으로 다가올 듯 풀어내는 것이 고명자 시의 강점이라 하겠다. 뿐만 아니라 일상에는 보상받지 못하는 아픈 흔적들이 도처에 널려있는데, 그 아픔이 시인의 내면에 자리한 어둠이고 진실이기도 하다.
그 어두운 기억 저편에서 꿈꾸는 것이 밝음에 대한 미학적 승화인데, 동일화되지 않았던 트라우마 등을 묘혈의 깊이에 가두려는 노력을 고명자 시인은 끊임없이 시도해 온 것이다. 그 치열한 여정이 앞으로도 고명자 시인의 작품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주기에 기꺼이 당선작으로 선정하는 것이다.
-심사위원 : 『시와정신』 편집위원 일동
수상 소감
白旗를 들을 땐 웃어야하는데
낭만적인 글쓰기는 끝난 것 같다. 무분별함과 무모함과 분노가 뒤엉켜 나를 풀어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끄적대던 그 짜릿한 고통의 시간은 가버린 것 같다. 염천에 책상과의 한판 승부에서 나는 졌다. 어루만지고 새침을 떨어도 무뚝뚝한, 무덤덤한 애인처럼 책상은 영 시큰둥하다. 내리치고 걷어차도 멀뚱하니 딴청만 부리는 것 같다. 왜? 내가 시시한가? 내 詩가 시시한가? 그래, 내가 좀 시시하긴 하지 그러니 내 詩도 시시할밖에... 백기를 들을 땐 무조건 웃어야하는데 그 것이 마지막 전략이며 적에 대한 예의인데 아뿔싸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부끄러운 고백이다. 올 여름 나는 책상 앞에서 허리병이 생겼고 온 몸에 땀띠가 돋아 몇 년 만에 병원이란 곳을 찾았다.
서서히 알게 되었다. 詩란 짐승이 얼마나 위험한 생명체인지를...아마 나를, 내 몸뚱이를 먼지처럼 흩어놓으려 할 것이다. 흩어놓고 말 것이리라.
신작
멧돼지가 출몰했다
그 때, 경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입에 갇힌 독설처럼 표독스러웠다
산그늘 내려오는 백담 돌탑 사이에서
우린 다만 쌍심지를 돋우었다
콧구멍을 벌름거리고 송곳니를 드러냈다
모처럼 맞장 뜨기 좋은 시간
수신교 건너시는 스님께서는
집 찾아오는 분이시냐
집을 버리고 오는 분이시냐
열두 채 마음이 길을 헤매는 것이냐
섬뜩한 혓바닥들
함부로 말을 뱉고 있었다
차가운 계곡물에 발목이 잘리고
낯이 칠흙으로 변해갈 때
눈앞에서 우리를 빤히 바라고 있는 것은
훈수 두시러온 불목하니실까
설악에서 굴러온 커다란 바위덩일까
덜컥 숨이 멎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돌멩이를 치켜들었다
*고명자 : 2005년 『시와정신』 봄호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술병들의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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