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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호/집중조명/김근/이사 외 4편/해설/김현/불화하는 신체와 불가능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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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조명
김근
이사
당신이 들어와 살았어요. 나는 결코 세 준 적 없는데, 집안의 스멀거리는 어둠쯤에서 당신은 사는 모양이어서, 밝은 쪽에서는 결코 당신을 볼 수 없었지요. 어둠에서 어둠으로 어둠을 타고 재빠르게 건너가는 기술을 당신은 보유한 게 틀림없어요. 어느 날 아침 밤사이 당신이 흘려놓은 흔적들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나는 당신의 존재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으니까요. 해도, 그런 속수무책의 아침이 여러 번 지나자 이내 익숙해지더군요. 익숙해지자, 이번에는 문득 당신이 비로소 어둠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어요. 아직 어둠 쪽이어서 당신의 얼굴 알아보기는 힘들었지요. 나는 제법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죠. 당황한 눈빛을 깜박거리며 당신은 금세 다시 숨어버렸는데, 그때부터 나는 마음 좋은 주인 행세나 하기로 마음먹었어요. 먹었는데, 세도 안 받고 당신을 살게 놔두고, 했는데, 때때로 나는 당신이 고개를 내밀기만 기다리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죠. 아침이면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당신이 흘려놓았을 흔적들을 찾기도 했답니다. 점점 나는 당신이 살고 있는 집의 주인도 아니게 되었어요. 당신이 사는 거기는 어떤 빛깔의 조각보 같은 햇빛들이 스미나요. 거기 어떤 바람이 기억의 수많은 골목들을 거느리고 불어오나요. 이파리 가득 빗방울 매달고 어떤 식물들이 서식하나요. 어떤 계절이 나도 당신도 모르는 사이 붉고 푸른 낯빛으로 돌아오나요. 반복되나요. 흥얼도 거리면서, 점점 나는 당신을 기다리는 자에서 당신의 감시자가 되어 갔죠. 행여 당신이 내 집에서 도망이라도 칠까 전전긍긍하면서, 나는 당신의 어둠을 단속했어요. 세면대 배수구 안쪽에서 끄집어낸 젖어서 엉킨 머리카락 뭉치를 보면서 당신이었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혹 나였을까 슬픈 말을 흘려보기도 하다가, 당신이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뜸해지고 끼니를 거르고 당신을 기다리는 일만 잦아지던 어느 날, 나는 마침내 결심했지요. 나는 꽁꽁 여몄던 어둠 속으로 당신을 찾아 들어갔어요. 주인도 없이 집이 저 밝은 곳에 남겨졌어요.
집은 오래 비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자꾸 말들이 온다.
살에 닿아 안 지워지는 햇빛과 바람과 빗방울과 식물들과 계절들.
아직도 당신이 살아 있는지. 여기. 나 또한 살기로 한다.
밝은 쪽에서 내내 어둠을 주시하며. 당신의 당신도 함께. 여기.
문 밖
밖으로 나가는 문은 보이지 않았어요
어쩌면 영영 막혀버렸는지도 모르죠
엄마는 벽 어디쯤에서 살고 있을까요
집안 구석구석에서 몰래몰래 자라나
어두운 포자를 퍼뜨리고 있을까요
우리는 창문에 목을 빼고 걸려 있어요
유리조각에 찢긴 목에서 뜨거운 피가
흐르는 채로 해바라기처럼 이빨이 잔뜩
돋은 얼굴로 밖으로 향하기만 한 채로
우리의 마른 몸은 아예 보이지도 않아요
우리의 몸은 착해서 순한 참나무 같아서
엄마의 수많은 포자들을 배양하며 이미
칙칙하게 썩어가고 있는지도 모르죠 더는
들여다볼 수 없는 창문을 가득 채우고
창틀이 다 부서지도록 다글다글
얼굴들은 자꾸 늘어 늘어만 가요
어떤 얼굴이 최초의 얼굴이었을까요
어떤 얼굴의 입술이 최초로 밖이라는
말을 고안했을까요 최초로 발음했을까요
어떻게 하면 저 해도 없는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요 음침하고 축축한 거기로
엄마를 그만 벽에서 끄집어내 자꾸자꾸
늘어만 가는 누리끼리하게 익어만 가는
이빨만 잔뜩 돋은 얼굴 얼굴들을 다 헤아려
나갈 수 있을까요 문밖으로 나갈 수나
있긴 있을까요 문 밖은 어디일까요 대체
누가 있을까요 문 밖엔 해바라기처럼 누가
깜깜한 웃음을 흘리며 흘리며 서 있을까요
마흔
뺨 위로 지독한 꽃냄새
진물처럼 흘러내린다
음악은 멈추고 멈췄어도
네 말의 음절들 자주 끊겨
나는 끊긴 음절들 속에만
자꾸 머문다 자꾸 산다
네 얼굴 다시는 보지 못하고
미뤄둔 약속들 흩어지고
밤은 풍문처럼
모든 여관의 불 꺼진 방으로
간다 가서 안 돌아온다
눈 먼 계절인데
뺨 위로 지독한 꽃냄새
안쪽
어두운 카페 바닥에서
일렁이는 빛 무리들
연인들은 마주앉아
보이지 않는 서로의
목마름을 핥고 있다
정오의 이른 죽음이
그들의 빛나는 눈 속을
잠시 스친 것도 같고
장마
너희들은 죽었다 우산도 없이 이상하게도
비를 맞고 철벅철벅 걸어가는 너희들은
날 어둡고 비 쏟아지고 빗소리 포악하고
몸에 들러붙어 잘 벗겨지지 않는 옷 속에서
너희들은 그만 죽고 죽어 새파랗게 웃고
맑은 날 숲으로 떠난 아이들이
산딸기에나 저희 손과 입을 붉게 더럽힐 때
그 붉음이 아이들을 길 잃게 할 줄은 영영 모를 때
걸어오지 말아라
팔 흐느적거리며 저는 다리로 뒤뚱거리며
나에게로 번개처럼은 천둥처럼은
한번도 살아보지 못한 삶
한번도 죽어보지 못한 죽음
뜨거운 살을 뚫고 김 오르고
인간도 짐승도 아닌 소리들
모락모락 피어나 흩어지는데
걸어오지 말아라
산 적도 죽은 적도 없는 나에게로는
미안하지만 너희들은 죽었다 살았다고 우기며
꾸역꾸역 내가 여기서 온종일 비를 맞아도
해설
불화하는 신체와 불가능한 시간
―김근의 어떤 시들을 중심으로
1.
김근의 ‘어떤 시’들은 신체를 문제 삼는다. 당연히 시간을 탐구한다. 이때에 신체라고 하는 것은 욕망하는 것으로서의 육체가 아니라 생식하는 것으로서의 몸 자체이다. 또한, 이때에 생식하는 몸이란 말 그대로 자지와 보지다. 그러나 이때에 자지와 보지란 유성생식을 통해 번식하는 생물들에 적용되는 생식기, 암컷과 수컷을 구분 짓는 생물학적 생식기가 아니라 ‘나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나는 누구인가?’를 분별하는 젠더적 생식기, 실존적 생식기다. 그러니까 생물학적으로 기능하지 않는 불가능한 생식기의 서사. 김근의 어떤 시들은 이 불능한 신체의 이야기에 줄곧 집중한다. 그러나 이때에 불능한 신체의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드러나는 것과 드러나지 않는 것, 안에 달린 것과 겉에 품은 것, 몸을 생각하는 정신과 정신을 생각하는 몸 같은 것, 결국 합일되지 않는, 불화하는 신체에 관한 것이다. 또한 이때에 불화하는 신체란, 육체적인 성과 정신적인 성이 반대라고 생각하는 ‘트렌스 젠더’의 신체가 아니라 육체와 정신은 반대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젠더 트렌스’의 신체다. 김근의 어떤 시들은 이렇게 ‘바뀐 신체’가 아니라 ‘바뀌는 신체’에 대해 감각하며 존재론적인 의문을 품는다. (때문에) 김근의 어떤 시는 “밀가루 반죽처럼 물렁물렁해진 미처 사라지지 않은” 시간(신화)과 “몸에 꽃가지가 돋아”나는 공간(환상)을 탐구의 배경으로 삼는다. ‘신화적 환상’의 공간이야말로 원초적이고 본질적으로 존재에 관하여 묻고 답할 수 있는 유일한 ‘현재적 실재’가 아니겠는가.―(때문에) 김근의 시의 언어는 선험적이다. 선험적 언어는 시를 어떻게 촉발시키는가.― 이처럼 선천적으로 불화하는 신체(인간)의 시작(탄생)과 끝(죽음)을 다루기에 김근의 어떤 시는 필연적으로 ‘시간’에 당면한다. 뭉개지거나 흐물흐물하거나 멈추어 있거나, 제 모습으로 뭉개지며 딱딱하게 흐물흐물하고 흘러가며 멈추어 있는 시간들로 둘러싸인 시들, 시간의 물리를 거부하고 있는 시들, 그저 시간 때문에 살아남는 김근의 어떤 시들에서 존재의 슬픔은 더 느리고 깊게 작동한다. 그러니까 김근의 어떤 시들은 시간 때문에 존재자가 된다. “‘시간’ 자체가 ‘존재’의 지평으로서 자신을 스스로 밝히는 것일까?” 하이데거는 질문하며(대답하며) 존재와 시간을 끝맺는다. 김근의 어떤 시는 아마도 불화하는 신체의 시간 자체가 존재의 지평으로서 자신을 스스로 밝힐 수 있을까 질문하는(대답하지 않는) 것을 시의 원동력으로 삼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머리로 사유하기 이전에 신체의 체험이 선행되며, 그것을 체험하는 ‘나’가 바로 근원에 있는 나, 세계에 접촉해 있는 나라고 했다. 퐁티에 의하면 나의 고유한 신체란, 감각하는 신체이며 그 감각을 통해 나는 세계로 나아간다. 이러한 감각 가능한 몸을 퐁티는 ‘현상적 신체’라고 이르는데, 자아의 실존이란 결국 이 현상적 신체가 세계와 관계 맺는 고유한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김근의 어떤 시는 세계의 탄생을 나의 신체로 그리며, (나의) 신체를 세계의 탄생으로 그린다. 그리고 이때에 신체는 결국 “…허물을 벗어도 허물 안의 기억은/허물 바깥에서 사라지지 않는다/어느 것이 허물 안의 기억인지/알 수 없다/나는 안인가 바깥인가/몇 차례 허물을 태우면서/한때 번들거렸으나 이제 푸석해진/한 生이 지글지글 타는 냄새를 맡으면서/나는 삶인가 죽음인가…”하는 실존적인 물음의 정체성을 밝히는 명징한 도구로 쓰임 한다.
2.
김근은 첫 번째 시집 『뱀소년의 외출』(문학동네, 2005)에서 ‘뒤란’과 ‘우물’과 ‘구렁이’와 ‘노파’가 있어 가능한 세계의 시간과 그 시간 이후를 그린다. 그러니까 김근의 첫 시집은 판타지가 가능했던 세계(판타지가 현실인 세계)와 판타지가 불가능해진 세계(판타지는 판타지일 뿐인 세계)를 통과하는 ‘시간에 관한 목격담’이다. 저 두 세계의 벌어진 틈에 개입된,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는 초탈의 욕구, 자신을 초탈하여 바깥으로 가려는 욕구, 절대 타자에 대한 갈망이 작동하고 있는 자아의 시집이다. 때문에 당연하게도 이 ‘목격하는 시’들은 주로 신체와 시간을 ‘기이하게(환상)’ 변형한다. 변신하지 않고 변형하는 것. 시간을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흐르게 하는 것. 몸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몸을 벗겨내는 것. 이러한 ‘변질되는’ 방식으로의 형상화가 이 시집의 고유한 존재 방식이다. 김근의 어떤 시들은 이처럼 바뀌는 존재와 시간을 감각(묘사)한다. “빗방울 하나마다 부릅뜬 눈알들”을 발견하고 “내 몸을 빠져나간 야윈 길들”을 떠나보내고 “눅눅하고 질긴 시간이 내 몸에 엉겨붙었습니다”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이 실현된 감각의 목소리들은 아마도 시집의 중심 진술이라 이룰만한, “나는 죽은 자 쪽에 가깝다”에 내려 쌓인다. 시집에 전면적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도, 죽은 듯 살아 있는 화자들이 속출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시집이 ‘사랑’으로 열리는 점은 꽤 흥미롭다. 사랑만큼 존재 자체가 스스로를 변질시키며 자신을 탐구하게 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오롯이 돌아보게 하는 것이 또 있으랴. ―그러나 또한 사랑만큼 인류 전체에 관해 물을 수 있는 것도 없다. 그러니까 김근의 존재에 관한 물음은 궁극적으로 인류와 관련된 내면을 갖는다.― 어쩌면 이 시집은 시작부터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라고 선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사랑을 선언하는 존재만큼 죽음에 가까운 것이 있을까.― 이때에 사랑, 사랑하는 존재란 에로스가 아니라 타나토스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사랑, 발기 불능의 애자이다. 애자는 에로스에 앞서 왜 나는 에로스를 실현하지 못하는가? 그 “부러진 시간의 마디마디”를 찾고자 한다. 사랑 받고 싶은데 나는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존재인가, 사랑을 주고 싶은데 나는 사랑을 줄 수 있는 존재인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결론적으로 『뱀소년의 외출』은 ‘사랑하고 싶어서’ “속으로만 죽고 싶어, 라고 말하는 아이”의 세계와 그 아이의 세계를 통과한 자(내면 아이를 가진 자)의 시간에 대한 관찰이다. 사랑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갈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어째서 사랑에 실패하는가, 얼굴을 잃어버리는 청년들과 같은, 청년인 채로 여전히 늙어가는 청년들 같은 그 고독한 ‘실패’를 탐구하겠다는 시집이다. 황현산은 김근의 첫 시집을 고독한 판타지로 풀이하며 “그의 시에서 현실이 환상으로 변주되는 자리에는 어김없이 이 시대의 불행에 대한 불행한 의식이 있으며, 그 불행에 대한 인식의 결핍을 촉진하는 문화적 양태가 있다.”라고 말했다. 다른 말이지만, 김근의 시에서 환상이 현실로 변주되는 자리에는 어김없이 ‘나’와 ‘나’의 불화에 대한 불행한 의식이 있으며, 그 불행에 대한 인식의 결핍을 촉진하는 신체적 양태가 있다. 이러한 양태로부터 김근의 시는 앞으로도 ‘가능한 한’ 이 물음 앞에서 ‘불가능한’ 질문을 던질 것임을 예고한다. “노래로 가는 길은 멀다. 온통 흐물거린다.”
3.
“지겹게 나는, 또, 태어나는, 것이더란, 말이지”라고 말하는, 지겹게 또 죽는 자들의 목소리를 불화하는 신체의 현상으로 ‘보여주었던’ 김근은 두 번째 시집 『구름극장에서 만나요』(창비, 2008)에서 더욱 구체화된 신체를 매개로 ‘외출 이후’의 이야기를 펼친다. 이때에 구체화된 신체란 바로 얼굴이다. 레비나스는 “‘내 안에 있는 타자의 관념’을 뛰어넘어 타자가 나타나는 방식, 우리는 그것을 얼굴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태도‘는 나의 시선 아래에서 주제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여러 성질의 총체로서 스스로를 전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존재란 결국 타자를 향해 가게 된다고 확신했다. 이에 비추어 보면 ‘껍질 벗기’ 후에 찾아온 시집의 서시로 ‘바깥에게’가 배치된 것은 의도적인 듯하고, 적확한 듯하고, 정확하다. “수십 개 얼굴” “그 얼굴 하날 꺾어” “내 얼굴 반대편에 붙”이겠다는 「바깥에게」는 “타인은 나에게 있어서 나의 존재를 훔쳐가는 사람인 동시에, 나의 존재라고 하는 하나의 존재를 만들어주는 사람이기도 하다.”라는 사르트르의 전언을 시적으로 형상화하겠다는 의지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한 의지로서의 바깥 이후 김근은 “불어 갈라지고 터지는” 신체적 시간에서 “그의 얼굴이 바뀌”는 곳에서 “나라고 생각되는 몸을 만지”고 “성기로 내 성기를 바꿔달까 말까” 고민하며, “제 얼굴을 지우고 싶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청유한다. 그러나 그 청유는 “금세 다른 모양으로 몸을 바꿔” 몸으로서 “우리도 모두 그처럼 가볍게 증발해버릴 운명들이니까요”라고 회의에 빠지며 “인제는 구렁이도 아니게 되어버린 저 구렁이” 같은, 있고도 없고 없고도 있는 신체(존재)를 묵도하며 “거기, 채 태어나지 않은 애비도 끓고 있는지 모르고, 채 태어나지 않은 나도, 어쩌면, 모르고, 모르지” 대답하지 못하며 ‘할미들 몸에서 주름들이 흘러내리듯’ 실존이라는 물질을 다시 바깥으로 내어 보낸다. 흘러내리는 주름이란 얼마나 슬픈 내면의 신체 이미지인가.
노파는 서둘러 마을을 떠났다
검은 풀들이 노파를 향해 흔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슬픈 눈으로
벌거벗은 제 몸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은 할미의 몸을 걸치고
여자는 남자의 성기를 달고
남자들이 입은 것은
너무 꽉 죄는 소녀들의 몸
사람들이 여자의 양품점에서
미처 완성하지 못한 옷을 훔쳐냈을 때
여자는 순식간에 노파가 되었다
바람 아래 바람이 불었다
바람 위에 또 바람이 불었다
사람들은 영원히 슬픈 눈을 지니게 되었다
―「옷 짓는 여자」 전문
두 번째 시집의 특질을 대표하는 것은 역시나 시집의 얼굴(밖)이 된 「구름극장에서 만나요」이다. 그러나 나는 위의 시가 아마도 이 시집의 얼굴 안을 채우고 있는 비이성적인 요소(신비)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시간의 자리 바뀜(삶과 죽음의 교차), 신체의 자리 바뀜(육체와 영혼의 교차)을 통해 마침내 영원히 슬픈 눈을 지니게 되었다는 식의 인류의 운명론적 비극 신화는 김근의 어떤 시들에서 제각각 등장하던 것들의 모두이다. 또한 이 합은 이 세계와 자아가 불화할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대답에 다름 아니다. 퐁티는 사유하는 주체가 자기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고, 심지어는 거울 안에 비친 자기 자신을 마네킹처럼 바라보는 것에 대해 그런 주체는 자기 자신에 대해 모두 다 알고 있는 게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퐁티의 주체는 ‘여기’(안)에 있으면서 ‘저기’(바깥)에 거주한다. 타자와의 ‘만남’을 청유하는 김근의 시집은 우리에게 의문형의 얼굴을 보낸다. 그러니까 대면하지 않고도 대면하기를 바라는, 그리하여 내 안의 여기와 너 안의 저기가 다르지 않음을, 나의 불화가 특수의 문제가 아니라 타자, 보편의 문제는 아니겠는가를.
4.
외출(안으로 돌아오고 마는)과 만남(헤어지고 돌아오고 마는)으로부터 ‘실패하고’ 돌아온 김근의 어떤 시는 이제(비로소) 안팎으로서의 현재를 탐구하기에 이른다. 이때에 탐구라고 하는 것은 김근의 어떤 시들이 지금껏 한 번도 놓아 본 적이 없는, 여전한 ‘나(너)의 정체성’에 관한 탐구이다. 결국 실패하고야 마는 물음. 성공 불가능한 것. 그러니까 가장 쓸모없는 것. 그것에의 몰두. 이제 누가 정체성이니 실존이니 하는 것들에 관심을 갖는단 말인가. 김근의 세 번째 시집 『당신이 어두운 세수를 할 때』(문학과지성사, 2014)는 이 가장 ‘쓸모없어지려는’ 시도의 산물이다. 김근은 최근 어딘가에 이렇게 쓰고 있다. ‘이 시대에 시를 쓴다는 것은 가장 쓸모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온통 ‘쓸모’가 창궐하는 지금-여기에서 ‘쓸모없음’이야말로 시의 가장 큰 쓸모이다. 시의 이 ‘쓸모없음’에는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세계, 쓸모의 눈으로 본다면 허황하기 이를 데 없는 세계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인들의 몸부림이 담겨 있다. 시인들은 대답의 방식이 아니라 질문의 방식으로, 그 세계에 도달하며 지금-여기의 현실을 넘어서려 한다. 세계는 그러한 시인들의 불가능한 질문들을 통해 조금씩 그 불가능한 세계 쪽으로 이동한다. 이것이 시의 ‘쓸모없음의 쓸모’의 핵심이다.’ 그러니까 아마도 최근 김근은, 김근의 시는 이 쓸모없음, 이 불가능, 이 불화, 이 고유한 시의 쓸모에 관해 골몰했을 것이다. 새 시집에서 이제 ‘얼굴’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김근은 시적화자의 목소리를 빌려 이렇게 얘기한다. “지겨워. 얼굴이 없다는 그 얘기.” “제발, 이제 이런 이야길랑 신물이 다 넘어올 지경”이라고. 김근의 어떤 시들은 이제 더 이상 그런 신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저 그 불화의 시간을 “입이었는지 똥구멍이었는지” 모를 시간으로 명명한다. 그 명명 뒤에 김근의 어떤 시들은 묻는다. “나는 나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요?” 그리고 대답. 이제 나는 “내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사람이다. 이제 나는 “웃음 속에서 나는 또/얼마나 죽었나 얼마나 살았나” 살아온 시간과 죽어가는 시간을 탐색하는 사람이다. 이제 나는 “점점 배경이 되어갔다 있지만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다. 이제 나는 “아이들은 아이들을 벗어놓고 돌아들 갔다(…)나는 저 아이들 중 하나로 갈아입어야 한다 아무도 지금은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 사람이다. 이제 나는 “가죽 주머니 입과 성기만 단 가죽 부대”이다. 이제 나는 “사내라고도 계집이라고도 젊었다고도 늙었다고도 사람이라고도 짐승이라고도 살았다고도 죽었다고도 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나’에 관한 무수한 대답들. 이러한 대답 이후 김근의 어떤 시들은 이제야 정말 다시 묻는다. “나는 너인가 너는 나인가”라고. 나는 이 물음이 김근의 세 번째 시집을 감싸고 있는 화두의 껍질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김근은 이제 ‘나와 타자’가 아니라 ‘타자가 된 나’를 궁금해 하기 시작한다. “당신이 어두운 세수를 할 때 짐승도 인간도 아닐 때 당신과 내가 서로 몸을 바꿔 입고 당신이 나고 내가 당신일 때 다시는 나는 내가 아니고 당신은 당신이 아닐 때 남자도 여자도 아예 버릴 때 우리의 발바닥이 우리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때 우리의 꼬리가 영영 우리의 머리를 만나지 못할 때 당신과 내가 그만 당신과 나를 넘어 범람할 때 떠내려갈 때 아예 사라질 때 그럴 때”를 타자가 된 나의 시공간으로 삼은 김근의 어떤 시들은 “청년이 청년을 벗겨내자 다시 청년이었다” “지워져 희미해진 사내 위에 사내는 겹겹의 사내들 위에 새로 씌어지는 사내 사내다” “형은 밤마다 나를 먹었다, 라고 나는 쓴다 나는 밤마다 형에게 먹히고 형이 되었다,라고 쓴다 형은 밤마다 형이 된 나를 먹었다,라고 쓴다” “형은 겨우겨우 기어 오고 있는 여자의 껍질을 주워 제 몸에 뒤집어썼더라는데, 해서 형은 영락없이 그 여자로 둔갑되었더라는데” “당신은 분명, 그 손 좀 그만 바지춤에서 빼지, 그래. 으흐흐흐, 형, 제발, 형, 형, 이제 더 이상은, 흐흐흐, 속지 않을 거야. 않을 거라고.” “어둠이 거대하게 꿈틀거리는 그곳이 골목의 입인지 똥구멍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내 몸은 결국 안개 쪽인가 의심하면서도 나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라는 짐짓 동성애적 서사를 경유하며 당신이자 나이며, 청년이자 청년이고, 사내이자 사내인, 형이자 형인, 그 오리무중의 정체성을, 실존의 정체성을 직물로서 탐구한다. 이로써 김근의 어떤 시들은 개인의 정체성이 아니라 보편의 정체성에 관한 쓸쓸하기 이를 데 없는 물음을 실패하도록 한다. 일테면, “오래전 사람들의 귀가 모두 떨어져버린 날” “젊은 날 그를 발견하고 환호하며 그를 관찰하느라/시간을 다 보내고 나도 그만 늙어버린 어느 날” “너는 멸종했다. 너라는 껍질을 뒤집어쓰고” “자네의 시간 안에서 그 방금은 또 어쩌면 한평생이었을지도” “저 늙은이들의 걸음 걸음에는 도대체 몇 장의 순간이 필요한 걸까” “눈도 못 뜰 세월 당신은 또 무슨 탁한 거울 속에서나 바람 부는가 늙고 늙는가” 라고. 이제 김근의 어떤 시들은 사라지고 싶음과 동시에 발굴되고 싶은, 살면서 죽어가는 신체(존재) 자체이다. 삶의 눈으로 보는, 삶 속의 죽음, 불가능하고 쓸모없는 세계(시간) 자체이다. 조르주 바타유는 인간 앞에는 두 가지의 전망이 펼쳐져 있다고 쓰며, “숨통을 막고, 끊는 힘은 오로지 욕망과 죽음에만 있다. 죽음과 욕망의 과잉만이 진실에 가닿도록 해준다.”라고 덧붙인다. 껍질을 벗는 외출을 감행한 첫 번째 시집에서 얼굴을 지우는 만남을 요구하는 두 번째 시집으로 이동한 김근은 이제 어디에도 없는, 불가능한 당신에게로 도착한다. 자아(탄생)->타자(성장)->당신(나)이라는 불가능한 타자(죽음)로 향한다. 아마도 앞으로 김근의 어떤 시들은 “동생의 시간으로는 영원히 돌아갈 수가 없”는, 죽음에 이르는 방식으로, 조금씩 더 존재론적인 의문형을 완성해 가며 “당신이 나 몰래 말을 넣었나/내가 당신 몰래 말을 넣었나/빼꼼한 주둥이를 벌리면 말들이 자꾸 기어 나온”다는, 그 영원히 합일되지 않는, (담겨져 있는) 안의 말과 (튀어나오는) 바깥의 말을, “시간의 파도가 이 도시의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물보라를 일으키”는 것과 같은, 그 영원히 가능한 불가능한 시간의 신비를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다. 2014년에도 시인 김근은 늙어가고 있으니까. 자, 이제 김근의 어떤 시를 찾아보자.
*김근 : 1973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98년 문학동네신인상에 「이월」 외 네 편의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뱀소년의 외출』 『구름극장에서 만나요』 『당신이 어두운 세수를 할 때』가 있다.
*김현 : 2009년『작가세계』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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