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55호/안주철/장미의 설계도 외 4편/해설/장이지/연금술, 혹은 유예된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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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조명
안주철
장미의 설계도
장미 두 그루를 뜰에 심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무려 여섯 명이다. 그중 한 명이 나이지만 빼도 관계는 없다.
뜰에서 파낸 노을이 지고 있다.
장미 두 그루는 따로따로
한 번 죽어서는 닿을 수 없는 거리를 만든다.
몇 발자국을 보태야 서로 닿을 수 있는 장미 두 그루는
새로운 마당에서 꽃을 피워야 하는
어려움에 처해있지만
오늘 뜰을 바꾸지는 못한다.
장미는 꽃을 피운다.
가시도 정성스럽게 가꾼다.
아름다움과 슬픔을 동시에 가꿀 때
장미는 장미를 뛰어넘어서 핀다.
바람이 불어 꽃잎이 한 장씩 떨어지면
제 가시를 지나치기도 할 것이다.
죽어서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고
죽어서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 때
장미 두 그루는 완벽해질 것이다.
잎이 피지 않은 장미 두 그루는 오늘
장미와 장미 사이에
기다란 꽃을 피우고 말았다.
다가갈 수 없는 꽃을 한 송이 설계하고 말았다.
봄밤입니다
봄밤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모르지만
뜰에는 목련이 두 그루입니다. 두 그루밖에 되지 않아도
뜰은 가득합니다.
목련은 봄밤에 몰래 꺼내 써야 합니다.
아내에게 걸리고
딸아이에게 걸리면
봄밤 중이라고 부끄러워하면서 말하겠습니다.
불행한 시를 오늘만은 쓰지 않고
오늘만은 쓸쓸함에 기대거나
슬픔에 만족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고양이 한 마리가 울고 있습니다. 듣지 못하는 고양이는
제 울음소리를 한 번도 듣지 못한 고양이는
쓰다듬어주어야 합니다.
귀를 잡아당겨서
자루처럼 길어질 때까지 잡아당겨서
고양이 울음소리를 담아주어야 합니다.
봄밤인가요? 봄밤입니다. 혼자 묻고 혼자 대답을 해도
봄밤입니다. 당신이 걷고 있는 길은 살아서 길길이 날뛰나요?
봄밤입니다. 가장 큰 새떼가 날아가고 있습니다.
산에도 지하도에도 새떼 그림자가 가득하고
겨드랑이 냄새가 푹푹 쌓이고 있습니다.
오리는 젖는다
천변을 따라 걸어도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천변을 따라 걷다가 웅덩이처럼 쭈그리고 앉아
고가도로에서 떨어지는 햇빛을 주워 담는다.
서서히 사라지는 줄도 모르고
뻑뻑한 눈알을 닦는다. 눈꺼풀로 세 번
눈을 감고 손등으로 벅벅 두 번
오늘도 오리를 센다. 어제는
열 마리부터 세었고
오늘은 백 마리부터 센다.
천변을 따라 걸어도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한 마리부터 세지 않아도
오리와 숫자가 맞아 떨어지지 않아도
오리는 개천에서 한가하게 오리한다.
유일하게 오리한다.
긍긍하냐?
뭐가 그렇게 긍긍하냐?
나는 오리를 센다. 어제는
눈을 비비며 열 마리부터 세었고
오늘은 눈을 감고
백 마리부터 세고 있다.
보디빌더
자신을 들여다보는 운동처럼 쓸쓸하고 우울한 게 있을까.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거울을 닦고
자신을 더 사랑하기 위해
거울을 가꾸는
보디빌더, 위태로운 근육에 경계를 세우고
힘을 차곡차곡 쌓는다.
사내의 첫 퍼즐 조각은
사내의 출발은
균형을 감당하지 못하는 저 위태로운 가슴이다.
하체보다 상체를 사랑하는 사내의 편벽.
쏟아져 내릴 것 같다. 사내의 생각들.
사내, 거울 앞에서 또 다시 가장 자신 있는
포즈를 취하며 거울에 안긴다.
거울 밖으로 터져날 것 같은 사내의 표정에
나는 늘 놀라지만
거울을 사랑하는 운동처럼 격한 운동이 있을까.
균형을 상실해가는 사내의 체격과 힘을 생각하고
사내의 밤일을 생각하고
사내의 마지막 비애는 몇 그램일지 생각하다가도
아, 사내의 근육은 얼마나 눈부시고 튼튼한가.
거울 없이 한 발자국도 자신에게 다가갈 수 없는
운동처럼 심란한 운동이 또 있을까.
보디빌더, 오늘의 마지막 포즈를 눈동자에 새기며
몸을 이리저리 돌려본다.
나는 사내의 문이 몸 어디에 붙어있는지
찬찬히 내 몸을 더듬으며 생각한다.
노인이 되는 방법
혼자 밥을 먹어도 외롭지 않다. 식탐 때문에.
혼자 밤늦게 산책을 해도 두렵지 않다.
미인이 쓰러져 뒹구는 술집 근처에 살기 때문에.
책을 읽고 내용을 정리하지 않아도 된다.
말할 사람도 없고
애써 기억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친구를 만나도 심심하다. 친구는
사라진 일자리에 빠져있고 나는 옆 테이블의 다리가 궁금해서.
아내와 통화를 해도 할 말이 없다. 애인이라도
생겼다면 거짓말이라도 정성스럽게 할 텐데.
여행지에 도착해서도 신기한 것이 하나도 없다.
사진을 몇 장 찍으며 나를 속인다.
혼자 밥을 먹으면 눈물이 난다. 식욕이 없어서.
혼자 산책을 하면 외롭다. 상점이 모두 문을 닫아서.
혼자 영화를 보면 구석에 가서 울고 싶다.
등이 갈라지면서 또 하나의 내가 기어 나와
갈라진 등을 두드리며 나를 위로해줄 것 같아서.
혼자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때 집을 지나친다.
더 오랫동안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시작메모
저는 일상생활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신의 생명을 끊임없이 유지하기 위한 장이자 생의 근원인 일상. 멀리에서 풍경을 보듯이 바라보면 하염없이 아름다운 무늬를 찍어나가는 것 같지만 그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칠 때 일 밀리도 밖을 내다볼 수 없는 생활. 가까스로 하루를 견딘다는 말이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더더욱 집착하게 되는 일상이 제가 그려내고 싶은 그림입니다. 밑그림이거나 시의 출발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루하고 비루한 생을 살아가지 않는 사람이 없고, 지루함과 비루함을 단번에 끊어버리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시는 이러한 증상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시는 또한 하나의 증상이며 결과라는 생각을 합니다. 동일한 방식으로 생활을 하면서도 서로 다른 증상의 무늬가 형성될 때는 반드시 다른 원인이 있기 마련입니다. 어쩌면 하나의 규칙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증상들은 결과이지만 또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하나가 아닐 경우가 많고 둘 이상이 복잡하게 관계를 형성하면서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다 압니다.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정답인지 전문가들이 모두 가르쳐줍니다. 문제를 해결할 방식도 체계적으로 생활 속에서 실행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해줍니다. 그러나 과연 지루하고 비루했던 생이 몇 가지의 단순한 팁으로 바뀔 것인지는 조금 의심스럽습니다.
저의 시에는 일상 속에서 자잘한 비극을 감추며 살아가는 화자들이 자주 등장하는 편입니다. 때로는 감상적으로 상황과 사건을 왜곡하는 화자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성장을 최고의 목표로 잡고 있는 사회에서 진실과 거짓의 논쟁은 하루에도 수백 수천 번씩 반복되는 자잘한 일상의 비극 속에서 사라지기 일쑤입니다. 진의를 파악하는 데 모든 힘을 쏟는다고 해도 그것에 관심을 둘 사람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시가 비루한 생활에서 시작되지만 비루한 생활을 적어나가는 단순한 기록은 아닐 것입니다. 비루함과 지루함을 견디며 살아가는 데에도 제가 알지 못하는 이유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을 것입니다. 수많은 정보의 이면에 실재가 숨어있다고 가정하고 확신에 찬 삶을 살아가기도 어려운 복잡한 사회가 되었지만 생활 속에는 떠오르지 않은 반짝이는 사유가 숨죽이고 시인을 기다린다고 생각합니다.
살기 위해서 시를 쓴다고 하면 너무 감상적이지만 시를 쓰는 행위가 이미 허무를 견디기 위한 하나의 방편쯤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비루함과 매일 반복되기 때문에 지루해지는 일상이 견디는 허무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합니다. 저는 오래도록 제 자신을 관찰하는 데 많은 시간을 낭비해 왔습니다. 제 자신이 반복하는 증상에 대해서, 그러나 바꿀 수 없는 충동에 대해서, 그리고 가까운 지인들의 사소하고 진실한 습관을 바라보면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바라봄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기에는 너무 늦은 생, 환경이 조금 바뀐다고 해도 바뀌지 않는 습관 속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일상생활을 견디며 일상을 뛰어넘기 위한 지루한 작업인 것 같습니다.
생활 시를 쓸 때마다 느끼는 어려움은 어쩌면 자기 연민과의 싸움인 것 같습니다. 나를 타인처럼 대하지 못할 때 반드시 실패하는 지점이 작품에 형성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지점에는 세상을 하나의 방식으로 바라보려는 ‘나’를 늘 조심하려고 합니다. ‘나는 없다’라고 강조할 자신은 없지만 ‘나’를 조금 멀리할 때 생활이 조금 보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해설
장이지
연금술, 혹은 유예된 ‘집’
―안주철의 근작시에 부쳐
1. 내밀한 사람의 톤(tone)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은 없지만, 안주철은 잘생긴 편은 아니다. 나는 그를 두 번쯤 본 것 같다. 어느 잡지의 필진 모임에서 한 번 보았고, 연희문학창작촌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 또 만났다. 그에게서는 회사원의 분위기가 풍긴다. 웬만한 일에는 크게 흥분할 타입이 아니다. 술을 잘 마실 것 같지만, 의외로 절제하는 타입인지도 모른다. 그는 큰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는 내밀한 사람, 내적인 인간(inner man)처럼 보인다. 내면은 그도 잘 생긴 사람이다. 실례가 되는 말만 쓰고 있다.
나는 그를 만나기 전에 그의 시를 읽은 적이 없다. 나중에 그의 시를 보았을 때, 내 인물평이 맞아떨어졌다고 생각했다. “양계장 아래 천천히 쌓이기 시작하는 오늘의 먼지 위로 아카시아 그늘이 내려앉고 있습니다.”(「양계장2」,『시산맥』, 2014년 여름호)에서처럼 그는 정밀한 순간을 포착하는 데 자질이 있다. 그러한 자질은 요설이 곧 시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미덕이다. 시 쓰는 사람 자신이 정밀함 속에 있지 않고서는 볼 수 없는 순간을 그는 시적으로 잡아낸다. 그는 종종 혼잣말을 한다. “긍긍하냐? / 뭐가 그렇게 긍긍하냐?”(「오리는 젖는다」)라든지 “봄밤인가요? 봄밤입니다.”(「봄밤입니다」) 하는 식이다. 그는 안으로, 안으로 정밀한 시간을 축적한 상태에서 ‘보는’ 존재다. “아내가 운다.”라고 쓰고 나서 곧바로 “나는 아내보다 더 처량해져서 우는 아내를 본다.”(「다음 생에 할 일들」,『작가들』, 2013년 여름호)라고 쓰는 존재 말이다.
그의 내밀한 톤은 이미 하나의 개성으로 자리 잡았다. 시를 읽는 맛이 난다. 그의 어조는 독자를 정밀한 시적 순간으로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2. 시간의 유예, 혹은 존재의 불연속
안주철은 밥상머리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회화를 어떤 원풍경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가족의 단란한 일상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환기되는 이미지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밥 먹는 풍경」(『창작과비평』, 2003년 가을호)에서는 가족의 식사 시간이 끊임없이 일상의 범속한 잡음들에 의해 방해 받는다. ‘엄마’와 밥 먹고 있을 때, 사람들은 ‘엄마의 구멍가게’에 들어와 엠보싱 화장지가 없다고 등 돌리고 욕을 하거나, 가게 앞 평상에서 만취하여 소란을 피운다. 아니, 식사 시간에 그와 같은 훼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세속의 마뜩치 않은 일들이 일어날 때, 식사는 시작된다. “이런 때 / 나와 엄마는 꼭 밥 먹고 있었다.”라고 그는 고백한다. 그러니까 훼방은 훼방이 아니라, 어쩌면 그 일상의 잡음까지가 ‘식사의 의례’ 안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 모든 잡음들까지를 ‘밥 먹는 풍경’이라고 그는 말한다. 세상에 태어나서 밥 먹는 일의 어려움, 이 식사 의례의 불편함을 그는 어린 시절부터 체득하고 있었다.
화가 난 ‘아내’를 향해 “다음 생엔 돈 많이 벌어 올게.”, “다음 생엔 이번 생을 까맣게 잊게 해줄게.” 등의 감언이설을 늘어놓는 남편이 등장하는 「다음 생에 할 일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밥 먹는 풍경」의 아이는 커서 「다음 생에 할 일들」의 남편이 된다. 계급․계층의 벽은 지극히 공고하며, 부모의 계급․계층이 자녀에게 그대로 대물림된다. 매 순간의 일상은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밥상머리는 남편을 난처하게 하는 장소다. 누그러진 ‘아내’는 눈물을 지우고 웃으며 말한다. “오늘 급식은 여기까지.” 행복은 유예된다. ‘다음 생’이라는 측량할 수 없는 시간의 유예 속에서야 비로소 일상의 파국은 봉합된다.
그에게 ‘집’은 항상 어떤 ‘유예’ 속에서만 존재한다. “혼자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때 집을 지나친다. 더 오랫동안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노인이 되는 방법」)라고 그는 말한다. ‘귀가’는 일종의 의식이다. ‘밥 먹는 일’이 일종의 ‘의례’인 것과 마찬가지다. “집으로 돌아갈 때 저는 골목을 이리저리 물고 다니는 개같이 쓰레기를 쌓아놓은 전봇대 옆이나 물결을 이어붙이며 흘러가는 하천을 서성댑니다.”(「양계장2」)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귀가의 지연’이나 딴전 피우기는 그의 시에서 자주 발견되는 모티프다. 그는 왜 항상 ‘유예’ 속에서 집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일까. “내일은 어디에서 저를 주워야 할지 고민해야”(「양계장2」) 한다고 그는 답변한다. ‘귀가의 지연’은 그에게 자아 찾기의 한 방식이었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집’에는 ‘나’가 없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집’은 완벽한 장소여야 하지만, 그에게 ‘집’은 완전하지 않다. 그것이 마치 자아의 결락 탓이라는 듯이 그는 ‘집’ 주위를 서성댄다.
그는 끊임없이 그 자신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내 살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다.”(「겨울이 내 살을 만진다」,『현대시학』, 2014년 6월호) 그는 자주 자아의 분열을 경험한다. “내가 나를 초대하는 밤이다.”(「나를 초대하는 밤」,『포지션』, 2013년 여름호)에서처럼 한 문장에 그는 두 개의 ‘나’를 자주 쓴다. ‘나’는 “1초와 2초 사이에 서식”(「나는 모든 것에 서식한다」,『시와사상』, 2012년 가을호)한다고 그는 쓴다. ‘나’는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의 경계에 ‘서식’한다. “오리는 개천에서 한가하게 오리한다.”(「오리는 젖는다」)의 ‘오리한다’는 표현과, ‘서식한다’는 표현은 묘하게 대비된다. 「오리는 젖는다」의 ‘오리들’은 ‘오리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 반면 ‘나’는 그러지 못한다. ‘내’ 안에는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내’가 매우 많다.
그는 존재의 불연속감에 시달린다. 「나는 모든 것에 서식한다」가 들려주는 사태는 ‘나’의 파편들이 세계에 편재한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모든 것에 서식한다」에서 주목되는 것은 일련의 보조관념들이다. “빌려 쓴 미래가 모두 빠져나간 날처럼”, “조건이 맞지 않는 통화기록처럼”, “비탈진 골목처럼”, “용도와 흥미가 폐기된 가구처럼” 등의 보조관념에는 소진된 자아, 자아와 세계의 결렬, 세계로부터 버려졌다고 하는 관념들이 엿보인다. 이 불행의 목록들에서 그는 벗어날 수 없어서 슬픈 것이다. 오직 시만이 이 존재의 불연속을 이어주는 방편으로 그에게는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3. ‘봄밤 중’의 연금술
안주철의 시 쓰기는 연금술을 닮았다. 그는 존재의 불연속을 넘어서기 위해 연금술을 동원한다. 그러나 연금술이 이미 중세에 그 실패를 확인한 것처럼 그도 계속 실패한다. 아니, 그것은 성공의 한없는 유예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연금술사의 책상은 복잡하다. 온갖 잡동사니들이 가득하다. 그의 책상도 온갖 질료와 촉매들로 어지럽다. “달빛을 한 근이나 사용하고 나서”, 혹은 “어둠을 한 박스 다 사용했다.”(「혀로 지은 집」,『창작과비평』, 2013년 여름호)고 말할 때, 그는 무언가 비의로 가득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뜰에서 파낸 노을”(「장미의 설계도」)이라든지 “뽑아낸 나물자리같이 노을이 진다.”(「혀로 지은 집」)고 할 때, 독자들은 연금술의 시간에 들어와 있음을 문득 깨닫게 된다. 사실 「장미의 설계도」의 제1연은 시적으로 거의 필요가 없어 보인다. 그는 장미 두 그루를 심기 위해 모인 여섯 사람과, ‘노을’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이 디테일들은 이 시의 다른 부분들과 어떠한 계열체도 만들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연금술사는 절차를 중시한다. 그에게는 「장미의 설계도」의 제1연이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시가, 의식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그에 부합하는 절차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빛과 어둠을 저울질하던 노을”(「양계장2」)의 시간, 경계면의 시간을 그가 고집스럽게 기다리는 것도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는 질료를 하나둘 고른다. “고가도로에서 떨어지는 햇빛을 주워 담는다.”(「오리는 젖는다」)라고 그는 쓴다. 그 빛 부스러기들이야말로 ‘금’을 만들기 위한 재료들이라는 듯이 그는 신중하게 재료를 고른다.
「봄밤입니다」와 「장미의 설계도」에서 그는 두 그루의 ‘나무’를 공히 질료로 활용하고 있다.
봄밤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모르지만
뜰에는 목련이 두 그루입니다. 두 그루밖에 되지 않아도
뜰은 가득합니다.
목련은 봄밤에 몰래 꺼내 써야 합니다.
아내에게 걸리고
딸아이에게 걸리면
봄밤 중이라고 부끄러워하면서 말하겠습니다.
―「봄밤입니다」부분
이 시에서도 그는 ‘봄밤’의 ‘시작’을 고지함으로써 시를 시작한다. 이 ‘시작’이라는 말은 같은 행의 ‘출발’과 계열체를 만든다. ‘목련’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모르겠다는 말은 기묘하다. 그것은 단순히 ‘목련’의 기원이나 내력을 묻는 데서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목련’은 하나의 시상이다. ‘출발’은 ‘목련 그 자체’가 아니라 시상의 기원이나 내력에 걸린다. 그것은 완성의 미가 있다. “뜰에 가득합니다.”라고 한 것은 그 완결성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이 경우 ‘목련’이라는 시상의 완결성이라기보다 숫자 ‘둘’의 완결성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목련’은 「장미의 설계도」에서는 ‘장미’로 변형된다. 그러나 ‘둘’이라는 숫자는 「장미의 설계도」에서도 반복된다. ‘둘’이라는 숫자는 ‘하나’보다 덜 외롭고 ‘셋’보다 더 내밀하다. 무엇보다도 비유는 두 개의 관념을 필요로 한다. 두 개의 관념만 있다면 시는 이미 성립했다고 하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이 ‘둘’의 문제는 물론 이것보다는 조금 더 복잡한 것이지만 말이다.
‘목련’을 봄밤에 ‘몰래’ 꺼내 써야 하는 것은 이 시가 메타시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시를 쓰기 위해서 그는 정밀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가족들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나’는 유체이탈하여 ‘나’를 관찰하는지도 모른다. 가족들이 이 시가 쓰여지는 광경을 본다면, 그는 ‘봄밤 중’이라고 말하려는 참이다.
‘봄밤 중’이라고 하는 말은 어떤 전일적인 순간을 나타낸다. ‘오리들’이 ‘오리한다’고 하는 것이 ‘오리들’에게는 전일적인 순간이듯이 시 쓰는 사람에게는 시 쓰는 순간이 가장 전일적인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짧은 순간에 그는 존재의 불연속면을 잠시 초월한다. 물론 그것은 시를 쓰는 순간에 국한된 것이다.
4. 자신을 들여다보는 ‘운동’
안주철은 동시대의 다른 시인들보다도 자의식이 훨씬 강한 시인이다. 그것은 저 ‘나’가 두 번씩 등장하는 문장의 빈도만 보아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이 그의 약점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는 ‘자의식의 스타일리스트’다.
「보디빌더」에서 그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운동처럼 쓸쓸하고 우울한 게 있을까.”라고 쓴다. ‘운동’이라는 말 대신 ‘시 쓰기’라는 말을 대입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 ‘거울보기’의 운동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는다.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어떤 분열이나 유체이탈의 경험과 맞먹는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그럼에도 그는 시 쓰기를 멈출 수 없다. 왜냐하면 역설적으로 이 분열의 확인이나 유체이탈의 확인을 통해서만 자아 통합의 기회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지연시킴으로써 더 오랜 시간 집으로 돌아가는 상태로 있을 수 있는 것처럼 그는 자꾸 거울을 들여다보는 ‘운동’을 한다.
문제적인 지점은 이 ‘거울의 미학’이 지닌 굴절률에 있는지도 모른다. 거울은 그를 점점 더 낯선 형태로 비추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장미의 설계도」에서 그는 “죽어서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 때 / 장미 두 그루는 완벽해질 것이다.”라고 노래한다. 그의 ‘둘’은 이 경우 진짜 ‘둘’이 아니라 ‘일’과 그 거울상으로서의 ‘플러스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내’가 거울에 비친 ‘나’를 못 알아볼 때, ‘나’는 거울에서 놓여날 수 있다는 비전이 여기에는 내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장미의 설계도」는 “다가갈 수 없는 꽃”을 한 송이 더 설계함으로써 파국을 맞는 장면으로 끝난다. 거울은 다시 처음부터 새로운 ‘운동’을 요구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이 시인이 어떤 ‘마법적인 거울’에서 놓여나 더 다양한 세계를 비추는 ‘진짜 거울’을 찾았으면 좋겠다. 물론 지금의 그 ‘일그러진 거울’도 충분히 개성적이고,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질감의 언어를 빚어내고 있지만, 나는 이 탁월한 시인이 더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저버릴 수 없다.▨
*안주철 : 1975년 강원도 원주 출생. 2002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현재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재학 중.
*장이지: 2000년 『현대문학』신인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안국동울음상점』,『연꽃의 입술』,『라플란드 우체국』, 평론집으로 『환대의 공간』, 연구서로 『한국 초현실주의 시의 계보』등이 있음. 제2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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