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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호/신작시/신중신/폐서인 중년기의 독백 - 단경왕후 시편∙4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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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3
댓글 0건 조회 3,128회 작성일 15-07-08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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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신중신

폐서인廢庶人 중년기의 독백 
―단경왕후 시편 4


자시(子時)가 가까워 옵니다. 이 무렵이면 여느 처소마다 촛대며 화등잔에 불이 꺼집니다. 하룻날을 접더라도 캄캄하게 마련인데 오랜 세월의 야속함에 의지가지없는 심신이 절로 허물어져 내립니다. 무너지는 소리, 깊은 안전(殿) 어디라도 들리지 않을 리 만무합니다.
도화수 맑은 물소리 귀 적실 양이면 행여나 싶어 궐 쪽 바라보고, 기러기 북녘을 날면 으레 가슴이 미어졌사옵니다. 원앙 그림엔 눈시울 시큰해지고, 백년해로란 말만 들어도 심장 금이 가옵니다. 금상께오서 이제라도 윤음 내리시면 그 금시발복이 어디 미치겠습니까?
번거로움 담쌓고 침수(寢睡)에 드셨다 한들 꿈속에서 들으시게 속삭이옵니다. 저간에 신첩의 복위를 두고 호남 지방관들이 상소한 후 모두 귀양살이에 처해졌다 하더이다.° 어찌 저들 민초의 보은과 오로지 군신지간 도리를 다하려는 충절을 모른 체하셨단 말씀입니까?
제 가친께 가해진 흉사에 은연중 상심하셨고, 제왕의 정실이 폐출됨을 참담히 보셨던 그 진정은 해 가고 달이 가도 바래지지 않을 것이옵니다. 애끓는 마음 억누를라치면 하늘이 울고, 사무치는 애절함 전코자 해도 바람벽에 부딪혀 스러져갈 따름이니 이를 어쩌오리까.
인연 한사코 떼어놓는 팍팍한 여긴 도대체 어떤 세간(世間)인가 삼가 여쭈옵니다.


°중종 재위 연간에 계비 윤씨가 원자(훗날의 인종)를 얻은 후에 세상을 뜨자, 순창군수 담양부사 등이 반정공신들의 사감(私感)에 의해 억울하게 폐위된 첫 왕비 신씨의 복위를 상소하였다가 모두 귀양에 처해진바 있다.





저녁나절 일경(一景)
―단경왕후 시편 5


뜨락의 봉선화 채송화가 빛을 잃은 사이
선연히 목을 치켜세운 국화꽃 한 송이, 
저녁상 미음그릇 비우고 뜰로 내려서던 신비(愼妃)
하얀 꽃잎과 마주치곤 황급히 눈길 거두다.
지존께오선 구만리 장천 너머, 돌아오지 못할 귀천 몇 해째이건만
어인 기망인가, 얼른 뒷산으로 고개 돌리다.
산자락은 벌써 이내(嵐氣)로 푸르스름하고, 
이런 해질녘 무명 옷깃 여미며 서 있노라면
사람 사는 한 생애에 불벼락인들 쓸개즙인들, 
피 토하며 하얗게 지샌 밤인들 그냥 일렁이다 사라진 시절일 뿐.
돌이어라 돌처럼 돌아들 앉고
바람도 기신거리만 하는 속절없는 이승에서 새삼 사무칠 일이 무엇일까.
오, 청산이 능(陵)으로 귀한 본분을 세우고
깊고 따스운 기로써 백골 세세토록 평안케 한들, 평안케 한들
그 또한 꿈 한 자락과 무에 다르랴.
언뜻 이 무슨 망발인가 싶어 실색하면서도
오랜 세월 번민으로 씻긴 눈언저리는
섬돌에 달빛 스친 듯, 연못 위 야삼경 가로지른 듯.


°신비는 반정 공신세력에 밀려 자신을 내친 중종이 계비 두 분을 이어 맞아들이고 승하한 후, 13년을 더 살았으나 신원설치(伸寃雪恥)하지 못한 채 생을 하직했다.




묘비명
―단경왕후 시편 6

                     해도 저물어/ 땅거미 끼는 제//
                     鐘이야 될 테지, 되려면 될 테지./ 깨지면 깨진 대로 얼얼히 울어
                                                        ―서정주의 「무제」에서

지옥 한 철을! ―뼛속까지 시린 집안 풍비박산에
폐비께오서 말문 닫고 평생 가슴앓이로 기척하시더니
실금 같은 명줄, 살아생전의 한숨 마찬가지로 사그라져서는
삼동설한 야밤에 문풍지 파르르 떠는 소리로 흐느낀다 하더이다.


*신중신 : 1962년 <사상계신인문학상> 당선으로 등단. 시집 「투창」 「카프카의 집」 「아름다운 날들」 및 시선집 「지상의 작은 등불」 등이 있음. 산문집으로 「한국인의 마음」 「하나와 다른 하나」 등 다수. <대한민국문학상> <한국시협상> <한국가톨릭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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