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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호/신작시/김상미/내일의 시인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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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김상미
내일의 시인
얼마나 슬픈 시절인가 제발 꼬투리 잡지 말라 내일의 시인들이 무정한 사람들 사이에서 떨고 서 있다 시를 모른다는 건 존재의 가장 큰 비극이다 유쾌한 가십거리가 필요하면 시를 읽어라 시에는 이 세상 온갖 소문들이 다 들어 있다 피 흘리는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즐긴 이들은 처음부터 미친 자들이었다 그 불쾌한 광기가 아직도 대기를 떠돌고 있다 그 시편에 입 맞추지 말라 광기는 철저히 혼자 있을 때나 부리는 심술 그 따분함에 길들지 말라 따분함은 냉담과 잔인에서 나오는 독소 가장 현대적인 것이 가장 따분한 것이다 얼마나 처량한 시절인가 모든 게 무의미하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더욱 더 처량하게 만들지 말라 누구에게나 햇볕 잘 드는 창이 하나씩은 있다 그 창을 열고 자신을 내다 말려라 이 세상 온갖 희망은 그 빛 속에서 나온다 가장 어두운 것도 그 빛 아래 그냥 두면 잘 익은 매혹이 된다 매혹은 시의 누이 일 년에 두세 번은 그 누이의 유혹에 굴복하자 모자를 벗고 구두를 벗고 그 누이의 애무에 몸을 맡기자 결국 시란 내가 이 세계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느냐에 달린 나의 문제 그러니 제발 시 아닌 걸로 꼬투리 잡지 말라 진정한 시인은 이 세상을 버리기로 한 날 밤에 태어나 버섯 향기 물씬 풍기는 비에 젖은 숲으로 들어가 달빛을 만들어내는 사람 그 달빛에 눈먼 이 시대의 행복을 잠재우자 내일이면 새로 태어난 시인들의 고백이 시작될 것이다 그 말에 안장을 얹고 이 슬픈 시대를 가로질러 달려 나가자 그 생각에 씨를 뿌리고 꿈꾸는 포도나무를 가꾸자 주렁주렁 열린 포도알들은 한 편의 시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멋진 시를 쓰기 위해 잘 익은 포도나무 아래로 달려오는 시인들의 펜과 그 매혹적인 심장들!
천생연분
그녀는 가방을 왼쪽에 매고
그는 가방을 오른쪽에 맨다
그들은 서로의 짐 때문에 부딪히는 일도 방해받는 일도 없다
그녀는 오른손잡이이고 그는 왼손잡이이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그는 왼손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의 오른손과 왼손을 꼭 잡고
오로지 앞으로만 나아간다
손만 놓으면 지금보다 더 좋은 걸 움켜잡을 수도 있고
다른 이들이 부러워할 멋진 왕국도 지을 수 있지만
그들은 오로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앞으로, 앞으로만 나아간다
두 손을 놓는 게 가장 두려운 일인 듯
두 손을 꼭 잡고 있는 게 가장 행복한 일인 듯
두 손을 놓칠세라 꼭꼭 잡고
묵묵히, 아주 환하게
*김상미: 부산 출생, 1990년 『작가세계』 여름호로 등단, 시집으로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검은, 소나기떼』 『잡히지 않는 나비』. 박인환 문학상, 시와표현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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