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55호/신작시/변종태/목련 봉오리로 쓰다 외 1편
페이지 정보

본문
신작시
변종태
목련 봉오리로 쓰다
1.
봄안개 자욱한 남도에 목필화(木筆花)* 피어납니다.
봄기운 듬뿍 받은 봉오리, 안개를 담뿍 찍어
당신들의 이름을 씁니다. 봄이 오는 이 땅,
한라산정에서 탑동 바다까지
써도 써도 다 쓰지 못할 그대들의 이름,
봄이 오는 이 땅 구석구석에 쓰고 쓰고 또 씁니다.
당신들이 걸었던 산과 들과 바닷가
당신들이 울었던 곰솔 아래, 당신들이 속삭이던 돌담 아래
당신들이 숨죽였던 깊은 어둠에
당신들의 간곡한 이름을 새겨 넣습니다.
안개 입자만큼이나 많고 많은 당신들의 이름,
이 땅을 일구신 당신들의 이름,
역사는 기억도 못하는 당신들의 이름을.
2.
오늘, 마당 가득 지등(紙燈)을 켭니다.
목필화(木筆花) 봉오리 화르라니 피어나
짙은 어둠 속 백등(白燈)으로 흔들립니다.
바람이 분다고 합니다.
바람이 불었다고 합니다.
바람이 불 것이라고 합니다.
사월만 되면 불어대던 광풍(狂風),
수상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봉오리를 쥐고 흔들던, 그 날의 바람, 목덜미를 스칩니다.
하지만 오늘, 다시 바람이 붑니다.
봄바람이 불어옵니다, 당신들의 이름을 어루만지는 바람,
붓을 쥔 손이 떨립니다.
안개 가득한 들판에 투명한 글씨로 안부를 묻습니다.
오늘도 안녕하냐고 묻지는 않겠습니다.
3.
제주 안개는 상처를 감싸주는 붕대,
안개 아래로 새 살 돋는 사월, 당신들의 이름을 부릅니다.
당신들의 손길로 어루만지신 이 땅, 제주의 하늘에
흐르는 안개 사이로, 당신들의 얼굴들을 보았습니다.
바람 따라오신 그 걸음으로 이 땅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이 땅의 내일을 밝히시는 당신들의 이름,
사월이면 제주에 목련이 피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마당에 피어나는 목련 꽃송이가
그렇게 망설이며 피어나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육십 여 년 전 광풍(狂風)에 허망하게 떨어지던 목련꽃잎,
상처 입은 목련 꽃잎들이 질펀히 드러누운 그 위로
다시 초록빛 바람이 부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행여나 누가 볼까 소리 없이 떨어지던 목련 꽃잎,
그 순백 뒤 진한 초록을 머금고 있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밤이면 조용히 흔들이며 피어나는 당신들의 이름인 걸,
꽃잎 한 장씩 열릴 때마다 아물어가는 제주의 아픔인 걸
이제야 알겠습니다.
*목필화(木筆花) : 목련(木蓮) 꽃의 다른 이름
우울한 해도海圖
무표정한 얼굴로 설익은 밥알을 씹는다.
보배섬을 옆구리에 끼고 제주를 향하던 아이들의
재잘거림을 이명耳鳴처럼 들으며
우린 어떤 언어로 노래해야 하는 걸까. 어떤
표정으로 바다를 바라다보아야만 할까.
초속 2미터의 물살이 법전法典의 책장은 뜯어가지 못하고
안타까운 사연들만 쓸어가던 그 해 사월
우울한 해도海圖를 펼치면 삼삼오오
가방을 지고 교문을 나서는 아이들의 모습,
아이들의 가방에서 우우우 쏟아지는 바다,
흐린 바닷물에 희망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가망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기다림이라 썼다가 지우고
절망이라는 글자를 마무리할 때쯤 눈앞이 캄캄
야간자율학습 마치고 가로등 꺼진 골목을 들어서던 느낌
무너지는 꿈과 희망이 우리 앞에 널브러질 때,
입안에서 울려오는 해조음海潮音을 들으며
서걱거리는 모래 알갱이를 씹는다.
입안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섬,
섬,
섬
*변종태 : 1990년부터 <다층>으로 활동 시작. 시집 멕시코 행 열차는 어디서 타지, 니체와 함께 간 선술집에서, 안티를 위하여, 미친 닭을 위한 변명. 현, 다층문학동인, 계간문예 <다층> 주간
추천0
- 이전글55호/신작시/박무웅/착한 고수는 없다 외 1편 15.07.08
- 다음글55호/신작시/김상미/내일의 시인 외 1편 15.07.0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