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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호/신작시/김언/먼지∙2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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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김언
먼지 2
비가 무덤 밑으로 들어간다
흙 속에 묻힌 목관을 미끄러지며
건드리는 지렁이의 날랜 움직임을
피식 비웃듯이
일주일에 한 번씩 가는 텃밭에서
부추가 자란다 상추가 벌어지고
노동을 모르는 시인은 맵고도
더운 땀을 흘린다고
땅이 조금만 움직여도
노여워하는 국경선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천이 흐르고 강이 모이고
바다로 나갈 때까지
노동을 모르는 비는
바위를 깎아내고 무덤을 부식시키며
내려갔다 지하에서 올라오는 물과
열기와 냉기가 범벅이 된
동굴에서도 바위가 자란다
바위의 안부를 묻는 먼지는 없다
생각의 출처를 의심하는 연기는 없다
먼지 속에 들앉은 금광석을 캐내는
인부들의 얘기도 더는 수상하지 않다
영원히 햇빛 속에 있는 빨래도
과장을 모르고 마른다
비가 조금씩 얼굴을 깎아낸다
엉덩이와 도톰한 가슴을 도려내는
석수장이의 지루한 손길도
부드러운 연기를 일으키고
치명적인 먼지를 잡아먹고
이름을 바꾸는 순간이 온다
이건 조약돌이고 그건 파편이다
이 모든 건 예술이고 저 모든 건
쓰레기다 아니면 나도 모르는 빗방울이고
저것은 바다가 분명하다
비가 고이거나 침이 흐르거나
입 주변에서 발견되는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다가 잊어버리는 모든
생각들이 저마다 이유와 수명이 있을 때도
먼지는 구름을 만들고 비는
도랑을 만들고 나는 연기를 따라가는
운명에 대해서 무책임하다
지구 내부의 어떤 무관심한 침묵에 대해서도
스스럼없이 대변할 자세가 되어 있는
나의 한마디 한마디가 섞여서
상공의 먼지는 몸집을 부풀린다
가장 미세한 연기가 인간의 폐를
조금 더 딱딱하게 만들어주는 데도
하루 이틀의 시간이 필요하다
몇 년씩 공을 들인 폐인의 삶도
매일같이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하루아침에 노을이 황혼으로 변했다
다시 살아난다면 사람을 다시 보겠지만
무덤 밑으로 내려간 빗방울은 분주히
달아나는 피와 뼈와 살점을 제외한 나머지를
챙겨간다 영혼이 돌아올 거라고 믿는다면
그 또한 의심할 가치가 없는 나의 믿음
일주일에 한 번씩 텃밭으로 가는
동료 시인이 베어온 부추와
상추가 차려놓은 정갈한 식탁도
믿어 의심치 않는 먼지의 순환
연기의 대물림
빗방울의 사소하고 외로운 투쟁도
전혀 수상하지 않다 나도 언젠가
붉은 노을의 원인이 되기에 충분했을 테니까
자고 일어나서 침대를 칼로 찌르는 짓을
부러워했으니까 내가 아니면 누군가
여기서 사망할 것이라고 확신했으니까
한 계절 내내 밤나무가 시끄럽다
한 마리 두 마리
찌르레기가 둥지를 떠나고
마을에서는 콩 심기가 한창이라고
동료 시인이 들려준 얘기를 나는 다른 곳에 가서
옮겨 심는다 씨앗이 뿌려지면
금광석이 자랄 거라고 믿는 먼 나라
광부들의 얘기로
날씨는 옮겨간다 조용히 화제를 바꾸었다
바위와 연기를 한 입 베어 물고
돌아와서 답장을 썼다
고아나 다름없는 그 먼지에게
시집
여기서 인생을 찾으려면 당신은 무한히 후회할 것입니다.
나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기는 인생극장이 아니니까요.
나처럼 고민하지 마십시오. 아무 문제도 해결해주지 않으니까요.
극장은 불이 밝고 나는 눈을 감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훌훌 털고
일어날 사람처럼 계획을 잡고 각오를 다지고 편안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드는 어리석은 연습은 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인생이 아니니까요. 인생을 빗댄 얘기는 더더욱 아니니까요.
우리는 혼자 담배를 얘기하고 혼자 담배를 꺼내어
저 혼자 뻐끔뻐끔 연기를 뿜어 올리는 고독한 화자도
아닙니다. 당신은 이미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에게서
나라고 할 만한 흔적을 찾으려면 조금 더 기다리십시오. 후회할 때까지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일 분도 안 됩니다. 십 분도 안 걸립니다.
길어야 한 시간 아니면 두 시간 무한정 인생을 탕진하는 이 사람은
사람을 얘기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조용히 나가주십시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우연히
한 사람이 궁금하다면.
*김언 : 1998년 <시와사상> 등단. 시집 <숨쉬는 무덤> <거인> <소설을 쓰자> <모두가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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