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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호/신작시/서주영/수도원 벙어리새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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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서주영
수도원 벙어리새
수도원 담장 넘던 그날을 떠올리네
그 어디에도
발자국을 남기고 싶지 않던
앞길을 벽처럼 막아서던 그날의 은밀한 목소리가
아직도 나직나직 무겁게 따라오네
순행하던 길을 꺾어
역행하고 있는 나와 맞닥뜨리게 하던 그날이
시커멓게 몰려오던 적란운이 뭔가를 예고하고 있었지
태풍 앞 수수모가지처럼 죽지가 부러져버린 난
높고도 가파른 계단을 허정허정 맨발로 내려왔지
성모 마리아의 순결한 잠을 헛손질로 한껏 당기며
그날 이후로, 철저히 봉쇄된 하늘엔
새 한 마리 날지 않았고
매달려 흐르던 강물도 입을 닫은 채 홀연히 멈춰버렸어
밖은 지금
나를 물어뜯으려는 덩치 큰 승냥이가
식식거리며
자기만의 왕국을 이중으로 잠그느라 초침처럼 분주하지
알락꼬리마도요의 이력을 생각하다
빈집 마당 구석,
수평으로 깔리는 견고한 그늘에 갇힌 섬 하나 있다
찬란한 빈곤으로 노곤하게 익어가는
섬은,
억세고 덩치 큰 초목들 틈바구니에서
허기 견디는 법을 익혀왔지만
아직도 난해한 문장처럼 습득이 쉽지 않다
어떠한 비바람에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기로 맘먹었지만
누군가 푸석해진 몸을 툭 건드리자
무기력만 남은 몸속에서 하염없이 자신을 게우는 섬
캄캄한 어둠속에서 쏟아진 토사물엔
잠도 꿈도 상실해버린 수많은 자신이
웅크린 모습으로 바글바글 모여있다
시간의 치아마저 푸석하게 삭아버린 채
오랜 가뭄처럼 눈물이 말라가는 섬은
날마다 작아지는 자신에게서 자주 일몰을 읽는다
한 두름 비애에나 젖을 수만은 없다며
저물녘 쓸쓸함으로 먼 하늘을 날고 있는
알락꼬리마도요의 슬픈 날갯짓의 이력을 생각한다
*서주영 : 충남 아산출생 2009년 『미네르바』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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