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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호/신작시/강윤미/시럽의 세계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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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강윤미
시럽의 세계
시럽이 든 병을 쏟는다
목을 감싸며 흘러내리는 시럽
살을 뚫고 뼈를 적신다
오늘의 걱정마저 덮고 나를 지배한다
시럽의 시럽을 만진 축축함과 미끈거림의 감정
얼굴이 붉게 흘러내리는 줄도 모르고
떠오르는 창문의 해를 바라본다
꼭 그만큼만 담을 수 있는 창문의 용량
손바닥을 펴자 열린다
딸기 맛 시럽, 단풍나무 시럽, 없는 맛의 시럽 중에서
고르지 않아도 되는
취향의 세계
시럽을 바른 빵이 말랑말랑해진다 두부를 두부이게 하고 치즈를 굳게 만드는 시럽, 이 세계에서는 완성된 탁자에 코발트색 시럽을 바르고 꽃무늬 시럽으로 벽을 장식한다지
시럽은 내가 걸었던 꿈속의 언덕을 흐르다 멈춘다 공처럼 멈춘다 내가 간직한 거짓말과 비밀의 최후를 감춘다 무미건조한 일상에 달콤함을 준다
그렇게 믿었던 시절을 덮는 시럽 모래를 흔들고 가는 파도 같다 모래의 얼굴에 남은, 마르기 직전의 혼돈
빈 병을 쓰레기통에 넣는다
방바닥의 서쪽으로부터 무색 무취 무미 무질서의 질서가 몰려온다
그래서 비올라
18세기에 만들어진 비올라와
몇 십 년 전에 생산된 남자가 마주 보고 있다
음악은 기억으로부터 느리게,
두꺼운 서적을 넘기는
수도사의 손끝에서 불어온다
수많은 얼굴과 이름, 연대기와 도표 속에서
음표는 적당히 몸을 낮춰 음악이 된다
전쟁과 전염병 그리고 가난
악기를 만드는 노인의 눈빛,
갑옷을 벗어 던지고 온 음악
피와 땀 냄새가 뒤섞인 혁명의 하늘과
시체로 뒤덮이기도 했던 강물을 지나
숨의 구멍을 뚫고 그것은 침범한다
알록달록한 성당 창문과 오렌지색 지붕,
창을 든 기사로부터 도망친
기특한 음악
목이 잘린 음악
비올라
그래서 비올라
잘록한 허리이거나 길쭉한 목
울퉁불퉁 창자
조금은 견고하게 만들어진 눈썹 같은
몸에서
잘린 음이 돋아난다
악이 돋아난다
*강윤미 : 1980년 제주 출생. 2010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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