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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호/신작시/김근희/가방 K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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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김근희
가방 K
내 가방 속에는 많은 비밀이 들어있습니다
여름날의 오후, 가을 빛, 골목 안의 까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어떤 음모, 보여줄 수 없는 메모나 일기
억눌린 흥분과 불만이 엉겨 붙어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주소지를 옮겨드리겠습니다
도착지가 어디십니까
가방의 무게가 줄지 않으니 입을 다물었습니다 오히려,
고질적인 무게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더한 물량도 무방합니다 가벼운 내가 불안합니다
그곳 까지는 늘 멀었습니다
무겁고 너무나 무거운 가방이
수하물 검열 대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저런, 가방이 벌어지고 비밀이 쏟아져 나옵니다
어쩔 줄을 모릅니다
비닐봉지 안에 세면도구와 뭉쳐놓은 세탁물
부끄러워 마십시오
쑤셔 넣고 던지고 끌고 다녔던 가죽이 낡고 낡아
지퍼마저 자꾸 터집니다
한번 씩 웃음이 터져 나오듯 말입니다
우글거리는 인파를 비집고
끈으로 동여 맨 관계를 쉽게 찾았습니다
너 나 훔쳐보니?
본다. 멀리 별들보다 환한 아파트 불빛들을, 유쾌하여서만 바라볼까. 오늘을 마감하는 외로움이 긴 혀를 내밀어 맞은 편 창문을 닦아내고 있다. 전원이 켜지고, 화면 속으로 복귀한 장면들을 탐색한다. 빨간 빛 레이스잠옷을 둘렀다. 오늘은, 여자가 싱크대 앞을 머뭇거리다 쟁반에 뭔가를 들고 나온다. 상투적이다.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는 남자를 부른다. 애타게 호명한다. 결국 그 남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또 거절당했구나. 이쯤에서 쟁반을 던져버려야 한다. 다른 편으로 정신을 두어야 겠다. 알몸의 여자가 타월로 몸을 문지르고 있다. 머리채를 휘두르며 거울 앞에 있다. 순진한 저 여자를 안다. 깡마른 손이 유방을 만진다. 나를 속였구나. 저 여자가 음흉하군. 남자가 있겠다. 나는 혼자이므로 너보다 음흉하겠다. 시선을 이동한다. 이사 온 흑인 남자가 아이를 또 닭 잡듯 잡고 있군. 아이가 울부짖는 아버지를 노려보네. 엄마는 어디로 갔을까. 방안에 감금된 저 남자가 딱하군. 오늘도 예상을 벗어나지 못한 필름들을 감아둔다. 밤새 재즈음악을 틀어대며 웃고 떠들던 위층은 상상에 여지를 남겼다. 깜깜한 사각의 창문을 끌어당긴다.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아무것도! 어둠을 꿰뚫어 볼 때 까지 눈을 쏘아야 겠다. 눈알이 빠지도록. 누군가 창가에 있다. 수천 개 눈을 단 생명의 나무*가 나를 훔쳐보고 있다. 뿌리는 어차피 병들었다. 도달 할 수 없는 무엇이라도 살아 있기를……
* 구스타프 클림트의 <생명의 나무>.
*김근희 : 서울 출생. 2013년 계간 ≪발견≫으로 등단. 시집 숲으로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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