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54호/신작시/배수연/두리안 외 1편
페이지 정보

본문
신작시
배수연
두리안
둘이 안으로
뿌연 커튼이 숲처럼 빽빽한 왕궁으로
남자는 엉덩이에서 두리안을 꺼내 준다
이건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뭉그러진 달콤함이다
나는 입가에 크림치즈 같은 두리안을 핥으며
망고스틴이나 람부탄은 까맣게 잊어버린다
더 주세요 더
열린 창들은 수백 겹의 커튼에 부드러운 눈보라를 일으킨다
아가씨, 잠깐
둘이 안으로
눈보라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따뜻한 곳을 잡는다
두리안의 과육은 고단백이라
필리핀 신랑들은 약처럼 생각한대
남자는 열심히 두리안을 먹는 내게 왕관을 씌워 주고
나는 엉덩이에 더 많은 두리안이 열리길 바라며 지퍼를 올려준다
두리안은 겹이 많고
고약한 냄새와
뭉그러지는 달콤함
걸어가는 남자의 엉덩이 위로
왕궁이 무너지고
살이 부푸는 모습
왕관 위로 떠오른다
여보게, 의사 양반
내가 고질라라니? 고질라라니!
그래, 인정해 어느 늦은 밤 집에서는 먼 한강 어디쯤이었을 거야
차고 부드러운 손을 쥐고 있었는데 딸들은 모르는 손이었지
별안간 하릴없는 주님의 빨간 번개가 내려쳤고 언제나 그분은 엇박자에 경솔한 분이시지
사실 손이었는지 뭐였는지는 나도 몰라 알게 뭐야
그래서
빨간 번개가 문제였단 말이야?
내가 한강의 괴물에게라도 물렸단 말인가?
자, 자르지 마!
내 똘똘이가 고질라니?
그 시퍼런 나이프는 저리 치워!(안돼!)
너는 내 딸들이 보낸 스파이야!
심지어 간호사 년은 침대 시트 밑에 메주콩을 깔더라고
어느 쪽으로 누워도 등짝이 편칠 않았거든
이 돌팔이 첩자 놈들!
내가 고질라라니? 고질라라니!
들어 봐,
딸년들은 내가 개구리 가면을 하루 종일 쓰고 있어도
뭐가 달라졌는지 모를 것들이야
걔들은 내 얼굴을 안 보거든
발목 4개가 아침에 나갔다 저녁에 들어오지
어느 날은 그 애들이 내 오줌 냄새를 트집 잡더니
급기야 변기에 앉아서 싸라고 하는 거야
세상 모든 똘똘이들을 제 입에 처넣으려는 늙은 딸년들!
벼룩이 제 입을 머리 꼭대기부터 똥구멍 끝까지 벌린다는 걸 알고 있나?
그년들은 정수리부터 발꿈치까지 구멍을 만들고는 누명을 씌우러 다니고 있어
내 전화기를 가져다줘
가지 마 의사 양반,
의사 양반!
내가 고질라라니? 고질라라니!
내가 모자라다니……
*배수연 : 2013년 ≪시인수첩≫으로 등단.
추천0
- 이전글54호/신작시/이종호/젖은 종이로 모여든다 외 1편 15.07.07
- 다음글54호/신작시/김근희/가방 K 외 1편 15.07.0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