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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호/장편소설(분재)/강인봉/타나의 달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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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굼벵이도 뒹구는 재주가 있다더니, 이놈도 제법 계집 꼬시는 재주 하나는 있구먼 그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여승이여? 그리고 이런 칠칠치 못한 놈을 보았나. 뭘 그렇게 꾸물거리고 있어. 그럼 얼른 당장 달려가서 그 아이를 데려와야지!”
준우가 그 섬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이 거의 다 되어 갈 무렵에야 아버지로부터 반응이 왔다. 그런 걸로 봐서도 어머니는 그동안 혼자서만 벙어리 냉가슴 앓듯 고심한 게 분명했다. 그래서 깊은 밤에도 간간이 어머니의 방에서 그 잔기침 소리가 새어나오곤 했던 모양이었다.
“저렇게 사람이 미련하다니까. 의논하고 말고 할 게 어딨어. 그때 당장 데려왔어야지.”
한심하다는 듯 아버지가 쯧쯧 혀를 찼다.
“그래도 좀더 신중을 기해야지요. 나도 그 아이를 데려와서 키우고는 싶지만 아직 그 스님의 의중을 확실히 모르잖아요.”
한숨을 삼키며 이윽고 어머니는 말했다.
“신중은 무슨 얼어 죽을 신중!”
“내 아들의 죄로 다른 사람의 인생을 더 이상 망치게 할 순 없잖아요. 그렇다면 당분간이 아니라 그 아이를 아주 우리가 완전히 떠맡아서 기르고, 그 스님은 자유롭게 살도록 해줘야지요.”
“그건 백번 옳은 소리여. 내 생각도 바로 그거라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그 어미도 돌아오겠지.”
아버지는 입이 함지박만하게 찢어져가지고 마냥 싱글벙글이었다.
그 입을 다물지 못하고 다시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쪽에다 하나 뺏겼으니까 이제 그쪽에서 다시 하나 찾아오면 되지 뭐. 그게 뭐가 어려울 게 있어. 피장파장이지.”
아버지의 얼굴은 뭔가 자신감이 끝없이 넘치고 있었다.
아버지가 젊었을 때 파락호였다는 것은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는 본래 전라도 나주에서 천석꾼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너무 호강하게 자란 탓에 세상 물정을 모르고 친구의 꾐에 빠져 무슨 사업인가를 벌이다가 그 재산을 몽땅 날렸고, 나머지는 그 충격으로 환장을 해서 모두 주색잡기로 탕진해 버렸다. 그러고 나서 한때 폐인이 되었다가 준우의 생모를 만나 겨우 개과천선을 했는데, 준우를 낳자마자 아내가 죽자 그는 다시 환장해서 자기의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가버린 것이었다.
아버지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남한테 한번도 져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 손만 해도 솥뚜껑처럼 컸다. 그것이 준우에겐 가장 수치스러운 유전이었다. 왜 하필이면 그런 것을 닮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준우는 철들 때부터 그 부전자전이란 말을 듣지 않으려고 남한테 항상 지고만 살아왔다.
아버지는 그래도 여자복은 좋았다.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자기 정신을 차릴 수 있게끔 다시 나타나 준 것이 지금의 어머니였다. 하지만 그때 어머니의 집에서는 완강하게 반대를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제 겨우 핏덩이인 준우를 안고 가서 사정을 했고, 그 동정심마저 통해 주지 않자 어머니를 숫제 겁탈해 버린 것이었다. 아버지는 바로 그런 인두겁을 쓴 사람이었다. 그래서 준우는 자기 몸속에 그 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게 정말 견딜 수 없이 싫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사람들 앞에서는 어머니를 너무 사랑해서 평생 호강시켜주려고 자기를 따라다니는 많은 여자들을 다 뿌리치고 어머니를 맞아들였다고 거짓말한다. 그러면서 자기의 그 구린 양심을 감추기 위해 오히려 ‘진실’이란 단어를 가장 많이 강조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어쩌다 술 한잔 얼근하게 들어가면 어머니 앞에서도 서슴없이 그 짓을 한다. 참말로, 참말로, 내가 당신을 호강시켜주려고 그랬지 않았남?
그런데 명화원 원장 선효 스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은 바로 이때였다.
준우는 어머니가 건네주는 무선전화기의 송수화기를 무심히 받아들었다. 하지만 전화선 저쪽의 목소리가 누구라는 걸 깨닫는 순간 준우는 그만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는 침을 한번 삼키고 나서 송수화기를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바꿔 쥐었다.
“나도 볼일이 있어 시내에 나가야 하니까 이곳으로 찾아올 필요는 없고, 시내 어디서 좀 만나요.”
역시 밝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대뜸 만나자고 하는 것일까.
“그럼 어디가 좋을까요?”
이래저래 준우는 마음이 울적했다.
“그 다방에서 만나지요. 왜, 그전에 장 처사님이 자운 스님과 가끔 만나던 그 시청 앞에 있는 다방 있잖아요.”
언젠가 선효 스님과도 한번 들른 적이 있는 다방이었다.
“초원 다방…….”
“그래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냉정하게 끊어졌다. 준우는 기분이 영 떨떠름했다. 그것은 평소 선효 스님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선효 스님이 초원 다방에 나타난 것은 준우가 엽차를 거푸 두 잔이나 비운 뒤였다. 그녀는 냉큼 그의 앞자리에 와서 앉았다.
“갑자기 손님이 찾아와서 좀 늦게 나왔어요.”
그것도 평소 그녀답지 않은 말투였다.
“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하셨는지요?”
준우는 겸연쩍게 웃으며 선효 스님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비굴하리만큼 일부러 그렇게 조심성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나왔나요? 그것은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게 아녜요. 그렇지 않나요?”
선효 스님이 뜨악하게 눈을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무안해진 얼굴로 우물쭈물 다방 아가씨를 불렀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을 줄은 이미 짐작했지만, 그는 그래도 그녀의 수행을 높게 보았고 또 지난날의 친절도 한 가닥 있어 은근히 그걸 조금 기대하고 나왔는데 실망스럽기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선효 스님은 건성으로 녹차를 한잔 시켰다.
“이제 알고 보니, 혜지 스님이 그것 때문에 여태 명화원하고도 소식을 끊고 지내왔어요. 많이 배운 사람이 무슨 일이 그런가요? 더구나 장 처사님은 그때 한번 그 죽음의 문턱까지도 넘어갔다 온 사람이 아녜요. 거기까지 가보니 어떻든가요? ……사람의 탈을 쓰고 이건 정말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에요.”
그때 다방 아가씨가 찻쟁반을 들고 왔으므로 선효 스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준우도 잠시 다른 데 생각을 빼앗기고 있어서 다행히 그 뒷말은 듣지 못했다.
다탁 위에 찻잔을 놓고 돌아가는 다방 아가씨의 뒷모습을 보며 선효 스님이 말을 이었다.
“혜지 스님도 그렇지요. 사람이 남을 위해 헌신하고 사는 거야 나쁘지 않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희생을 할 게 따로 있지, 세상에 그런 것까지 동정을 했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그것으로 끝났어야지, 아이는 대체 어떻게 하려고 낳았는지……. 나까지 감쪽같이 속이고서. 나는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못내 섭섭하기 이를 데 없어요. 그나저나 이제 아이는 어떻게 할 거예요?”
준우는 아무 말도 못했다. 그는 선효 스님한테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매운 소리를 들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선효 스님이 다시 얼굴에 마뜩찮은 기색을 드러내었다.
“하긴 옛날 신라에 월명(月明)이라는 큰 비구니가 있었지요. 그녀의 아버지 부설 거사(浮雪居士)는 어린 나이에 불국사에서 스님이 되어 계(戒)와 정(定)이 정명하고 식견이 예민하였는데, 오대산을 향해 가던 도중 구무원(仇無寃)의 집에서 머문 인연으로 그의 딸 묘화에게 유혹되어 거사 생활을 하면서 아들 등운(登雲)과 그 딸 월명을 낳았어요.”
선효 스님은 그제야 찻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그들 두 남매도 성장해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비구, 비구니가 되었지요. 그런데 하루는 동생 월명이 오빠 등운에게 찾아와서 하는 말이, 자기 절의 불목하니가 자꾸 성가시게 자기의 몸을 요구하는데 어쩌면 좋겠느냐고 묻는 거였어요. 그러자, 등운은 그까짓 거 한번 줘버리라고 그랬지요. 그러고 난 뒤 동생에게 그 뒷맛이 어떻더냐고 물었어요. 동생은 장대로 허공을 찌르는 것 같았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 불목하니는 비구니에게 또 그걸 원하는 거였어요.”
선효 스님이 그를 한번 흘끗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것도 사실은 선효 스님으로서 할 얘기는 아니었다. 준우는 몇 번 헛기침을 했다.
“그래서 오빠는 또 허락을 했지요. 그러고 나서 이번에는 그 기분이 어떻더냐고 다시 물었어요. 비구니는, 장대로 마른 땅바닥을 찧는 것 같았다고 그랬어요. 불목하니는 세 번째 또 원했어요. 이번에는 장대로 질척질척한 진흙 속을 쑤셔대는 것 같았다고 했어요. 그러자, 오빠 등운은 이거 안 되겠구나 싶었지요. 그럼에도 불목하니는 자꾸 또 그걸 요구하는 거였어요.”
준우는 머쓱하게 웃었다. 나이 먹은 비구니가 채신머리없이 구태여 이런 얘길 하려고 불러냈는가?
선효 스님이 다시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어느 날 저녁때 불목하니가 군불을 때고 있었어요. 아궁이 속에서는 장작불이 한창 시뻘건 혀를 날름거리며 타오르고 있었지요. 그때 등운이 불목하니를 그 아궁이 속에다 집어넣었어요. 깜짝 놀란 불목하니가 빠름작거리며 도로 나오려고 하는 걸 이번에는 동생 월명이 냅다 발길로 밀어넣어 버렸지요.”
준우는 멀뚱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얄밉도록 침착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를 더 참을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정히 끊어야 될 인연이라면 그렇게 해서라도 끊는 거예요. 하지만 혜지 스님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는 하지 못할 여자지요. 자운 스님 같은 여자라면 또 모르지만. 그 스님은 얼마든지 그러고도 남을지. 이것이 바로 그 두 비구니의 차이점이에요. 혜지 스님은 며칠 전에 그 섬에서 나왔어요. 내가 해 드릴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예요.”
선효 스님은 이제 그만 손을 털듯 말했다.
“그 섬에서 나오다니요?”
“공부하러 멀리 떠났어요.”
“저하고의 약속은 그게 아니었는데……. 아이 문제도 있고. 그럼, 혜지 스님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준우는 시무룩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걸 왜 나한테 묻지요? 여태까지 내 말을 어떻게 들었어요. 그건 어디까지나 장 처사님의 사정이고, 이제 그 스님은 만날 수 없어요. 장 처사님도 멀쩡한 분이, 꼭 아까 그런 불목하니 같은 사람이 되어서야 좋겠어요?”
그녀는 여전히 침착한 어조였다.
“…….”
“아이는 그냥 그대로 당분간 동화병원에서 자라게 놔두세요.”
“엄연히 부모가 있는데 왜 그 아이가 남의 집에서 자라야 합니까?”
준우는 자신도 모르게 버럭 화가 났다.
“장 처사님의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그 아이가 장 처사님 댁으로 가는 거보다는 차라리 동화병원에서 크는 게 훨씬 더 일이 깨끗할 것 같아요. 또 언젠가는 혜지 스님이 명화원을 맡게 될 테니까, 거기서 함께 살 수 있잖아요.”
말하는 중간 중간에도 몇 번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선효 스님이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아이는 당장 다음날 아버지가 직접 동화병원에 찾아가서 데리고 왔다. 준우가 그 병원에 6개월 동안이나 입원하고 있을 때는 단 한번도 면회를 가지 않은 아버지였다. 집에 돌아와서까지 씩씩거리며 횡설수설하는 걸 보면 그 병원 원장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우격다짐으로 빼앗아 온 모양이었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아버지였다. 그래서 준우는 왠지 모르게 불안을 느끼고 있던 중이었다.
이제 갓 첫돌이 지난 아이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보면 볼수록 아이가 귀여워서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가슴을 쓱 쓸어내리며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기도 한다.
“내 손자를 내가 찾아가겠다는데 누가 나를 막을 거여.”
그제야 조금 성질이 누그러지는 듯도 했다.
하지만 견물생심이라더니 아이를 데려오자 아버지는 며칠도 못 가서 다시 또 터무니없는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제 애를 키우려면 당연히 애 엄마가 있어야겠지?”
혼잣소리를 했다.
“그럼, 공부를 하러 산에 간 스님을 무슨 수로 모셔 와요. 우리에겐 참말 고마운 스님이었는데,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어머니의 말을 수굿이 듣고 있던 아버지가 이번에는 준우를 향해 눈을 깜작거렸다.
“그럼 넌 어떻게 생각하냐?”
“…….”
“이 어린 것이 엄마도 없이 혼자서 어떻게 크겠냐. 그렇지? 그리고, 그 외롭고 서럽게 크는 걸 안쓰러워서 어떻게 보겠냐. 그렇지? 남들 보기에도 안 좋고.”
“…….”
“무슨 말이든 해봐, 이놈아. 여자 하나도 간수하지 못하는 놈이. 갑자기 벙어리가 된 게야? 그저 밥 먹고 앉아서 애나 키우며 조용히 살면 되지, 그까짓 여자가 도는 무슨 얼어 죽을 놈의 도야!”
아버지는 더욱 대담해지고 있었다. 그는 도무지 부처 불(佛)자나 제대로 쓸 줄 알까.
“그 여자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여자냐?”
그것도 몹시 궁금한지 꼬치꼬치 캐묻기도 했다.
“여승이 제멋대로 애까지 낳은 걸 봐서는 그리 탐탁하진 않지만 그래도 어쩌겠냐. 애기 엄마인 걸. 데려와야지. 암, 그 여자도 데려와야지.”
어머니는 이 세상에 그런 경우는 없다며 설레설레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입에 잔뜩 힘을 주며 어머니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그럼 내가 이 나이 체면에 거기까지 또 직접 찾아가서 사정을 해야 좋겠남?”
“그 스님이 좋다고 한다면야 모르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준우는 겨우 마지못해 시큰둥하게 이 말을 했다.
“그게 무슨 소리여? 그러니까 이번에는 네놈이 먼저 자진해서 끌고 오든, 업고 오든, 데려오라는 게지. 안 그러면 내가 또 그 짓을 해야겠어? 너는 이놈아, 초등학교 다닐 때 국어책에서 ‘선녀와 나무꾼’도 안 배웠어? 아들을 셋은 낳아야 여자가 꼼짝을 못한다고! 냉큼 가서 그 여자를 데려오든지, 아들을 하나 더 만들어 오든지 알아서 해.”
아버지는 막무가내였다. 사람이 며칠 사이에 마치 환장이라도 한 듯이 확 달라져 있었다.
“그놈 두 눈이 검정 콩알만한 게 참 귀엽고 깜찍하게도 생겼네. 니 이름이 주원이라고 했니? 이목구비가 뚜렷한 게 그놈 참 똘똘하게 생겼구나. 그러고 보니 영락없이 오빠를 빼다박은 것 같아. 그치만 너도 참 뻔할 뻔자다.”
집 안에 무슨 큰 구경거리라도 난 듯이 인숙이는 키득키득 재미있게 웃었다.
“오빠는 장가도 가지 않고 졸지에 애 아빠가 되었네? 그럼 동네 사람들을 불러다 득남주를 내야지. 오빠도 참 구제 불능이래요. 하고많은 여자들을 놔두고 비구니에게 애를 낳게 하다니. 그럼 내가 가서 그 스님을 모셔올까? 그치만 어느 절에 있는지나 알아야지.”
그런데 준우는 그 아이가 집에 온 뒤부터 이상한 버릇이 하나 생겼다. 하루 종일 쫄쫄이 굶고 있어도 도무지 뭘 좀 먹고 싶은 생각이 전혀 나질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 무슨 엉뚱한 포만감일까.
아버지는 하루가 멀다고 다시 달달 성화를 부렸다.
“넌 아직도 뭐하고 있어? 어서 내가 시킨 대로 하지 않고, 이놈아. 넌 이 주먹만한 아이 얼굴이 귀엽지도 않어? 처성자옥(妻城子獄)이란 말도 있잖어, 이놈아. 이런 띨띨한 놈!”
“때가 되면 분명히 온다고 했으니까 한번 기다려 봐요.”
하지만 이제는 아버지보다도 오히려 그가 더 은근히 혜지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섬의 끝자락에 오도카니 앉아 있던 그녀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떠올랐다. 그 하염없이 적막한 시간 속을 갈매기들이 깃을 털며 날고 있었다.
마지막 섬
1
회운사(廻雲寺)는 저만큼 적막한 가을 햇살에 요요히 싸여 있었다. 법당의 문은 활짝 열려 있는데 스님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웅전 뒤로 산그늘이 길게 내리고 있었다.
준우는 마당을 가로질러 그쪽으로 가다 말고 그 자리에 섰다.
그때 요사채에서 먼저 스님이 주전자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여승은 짐짓 뒤로 한 걸음 물러서더니 주전자를 내려놓고 다소곳이 합장을 했다.
“어떻게 오셨는지요?”
준우는 혜지 스님을 만나러 왔다고 하려다가, 시선을 발밑에 깔며 잠시 망설였다. 이 절의 주지가 효경 스님이고 보면 아무래도 그 스님부터 만나보는 게 도리일 것 같았다. 효경 스님은 명화원 원장 선효 스님의 사제(師弟)였다. 언젠가 저 위 청빈암에 있던 혜지를 찾아왔을 때는 다행히 출타중이어서 효경 스님은 만나지 않아도 되었었다.
“주지 스님을 뵈러 왔습니다.”
그는 일단 그렇게 말했다. 그 갑자기 쌀쌀맞기 짝이 없어진 명화원 원장 선효 스님에게 다시 찾아가 어렵게 빌다시피 사정해서 겨우 혜지가 지금 여기 있다는 걸 알아낸 것이었다.
그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꼬마 스님이 새까만 눈을 껌벅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예닐곱 살이나 먹었을까. 잿빛 승복을 제법 단정하게 차려입은 통통한 몸집이 앙증맞게 예뻤다. 어쩌다가 어린 나이에 이 절간에까지 와서 살게 되었을까. 그는 왠지 꼬마 스님이 남 같지가 않았다. 그는 집에 두고 온 아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이 아이를 따라가 보세요.”
여승이 수줍게 눈을 들고 준우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꼬마 스님은 얼른 앞서 걸었다. 하지만 준우는 효경 스님까지 만날 생각을 하니 형언할 수 없이 마음이 복잡했다. 여승은 다시 주전자를 들고 법당에 올라가고 있었다.
“주지 스님, 손님이 오셨어요.”
주지실 방문 앞으로 그를 안내해 간 꼬마 스님이 또랑또랑한 소리로 말했다.
이내 주지실 방문이 열렸다. 방안에는 조용하고 인자하게 생긴 노스님과 그와는 다소 대조적으로 눈빛이 차고 맑게 보이는 효경 스님이 마주앉아 있었다.
준우는 방안을 향해 합장을 했다.
효경 스님은 먼저 자신이 주지라고 밝힌 뒤 어떻게 오셨느냐고 물었다. 때로는 한없이 표독스러우리만큼 대쪽 같은 성품이지만 그래도 인정은 많은 스님이다.
“스님, 저를 몰라보시겠습니까?”
멋쩍은 얼굴로 준우는 말했다. 그제야 효경 스님이 깜짝 놀라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니, 이게 누구예요?”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아, 자운 스님을 보러 오셨구나.”
“…….”
“때가 훨씬 지났는데, 아직 점심 공양을 안 하셨지요? 그럼 우선 공양부터 하시지요.”
효경 스님은 방안에 앉아 있는 노스님을 흘끗 한번 돌아보더니 꼬마 스님더러 그를 객실로 안내해 드리라고 일렀다. 그때 법당 추녀 끝에서 풍경이 땡그랑, 무심하게 울렸다.
꼬마 스님을 따라 객실에 들어가 잠시 앉아 있자 아직 삭발을 하지 않은 머리를 새 꽁지처럼 묶은 행자가 상을 들고 왔다. 산채 무침들이 정갈하게 차려진 밥상이었다. 하지만 보기와는 달리 음식이 아무 맛없이 싱거웠다. 밥그릇을 반쯤 비우고 상을 물리자, 효경 스님이 방에 들어왔다.
“몸이 많이 회복되었다고 들었는데, 정말 그러네요. 다행이에요. 자운 스님이 처사님을 위해 얼마나 기도를 한 줄 아세요? 그래서 이처럼 좋게 회복되었나 봐요.”
하지만 준우는 심드렁하게 효경 스님을 바라보았다. 그 무슨 헛소리인가. 아무리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라도 그렇지.
그제야 그는 문득 전날 밤의 꿈자리가 생각났다. 왜 그런 꿈을 꾸었나,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효경 스님의 이 말을 들으려고 그랬는가. 혜지를 찾아 애타게 산 속을 헤매다가 엉뚱하게 자운을 만난 것이었다. 그녀는 저만큼 앞에 서서 더할 나위없이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반가운 마음에 얼른 그 앞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 순간 자운은 빨간 독버섯으로 변하고 있었다.
효경 스님은 혼자서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픈 인연이지요. 그때 전 이 절에 있었지만 가끔씩 청암사에 찾아가보면, 그래서 자운 스님도 밤을 꼬박 뜬눈으로 지새우고 있더라고요. 아무리 부처님의 말씀에 천지 만물이 다 인연 따라 나고 인연 따라 없어진다고는 했지만, 어찌 다 떨쳐버릴 수가 있었겠어요. 그러나 전 그때마다 달랬답니다. 그러면 오히려 업의 짐만 더 가중될 뿐이라고. 그렇다면 이 산중에 산들 무슨 공덕이 있겠느냐고…….”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하지만 그는 잠자코 앉아서 듣고 있었다. 야릇한 감정이 가슴속에 뭉클 차올랐다. 자운과 헤어진 지도 어언 4년이었다. 그 세월을 그녀는 어떻게 살아 왔을까.
“하지만 전 오늘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어요. 과연 사람의 인연이란 그렇게 간단히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그 어떤 악연으로의 만남보다도 실은 헤어짐이 더 어렵다는 걸.”
효경 스님은 그가 자운을 찾아온 줄로 알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준우는 마음이 아까보다는 한결 가벼워지고 있었다.
“자운 스님은 공부 잘하고 있습니까?”
그도 한 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거 어쩌나. 자운 스님은 다시 청암사에 갔어요. 그곳에 지금 용담 큰스님이 와 계시거든요.”
“그래요.”
그는 어쩌다 보니 생각지도 않게 자운의 걱정을 하고 있는 꼴이 되었다. 하지만 준우는 아직 그녀가 삭발한 모습은 한번도 보지 못했다. 그때 다시 법당 쪽에서 풍경소리가 바람결에 묻어왔다. 땡그랑…….
“자운 스님은 줄곧 선방만을 전전하며 정진을 했어요. 아마 그렇게 칼처럼 엄격하게 계율을 지키며 공부하는 청정 수행인도 드물 거예요. 그러다 그 무리한 정진으로 몸에 그만 병이 나서 나를 찾아와 여태 몸조섭을 하고 있었지요.”
“…….”
하지만 이 스님이야말로 바로 그 청정 수행인이 아닐까.
벌써 그 얼굴의 표정이 그랬다. 차가움과 따뜻함이 정확하게 반반씩 섞인 얼굴이었다. 부드러움과 까다로움의 조화가 잘된 모습. 그것이 명료하게 가장 잘 나타나고 있는 부분은 바로 눈이었다. 그 정신이 맑게 집중된 눈.
“물론 남이 내 뜻을 못 알아준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요. 하지만 모든 인간의 만사는 곧 꿈과 같고 환(幻)과 같아서 그 자체가 없는 거예요. 그럼에도 중생들은 무엇을 꼭 있다고 고집하기 때문에 곱다, 밉다 하는 거지요. 쓸데없이 사랑하고, 미워하고, 욕심내고, 진심내고. 하지만 진실로 그 고(苦)를 맛본 자는 생멸의 근본 이치를 알 수 있어요.”
그녀는 거침없이 말을 했다.
“그럼 혜지 스님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명화원 원장 스님은 이 절에 있다고 하던데요.”
가만히 놓아두면 효경 스님은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다.
“혜지 스님은 어찌 찾으시나요?”
효경 스님이 대뜸 물었다. 그녀는 다행히 혜지와 그의 관계는 전혀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혜지 스님은 아침에 출타를 했어요. 아마 며칠 동안은 못 올 거예요.”
정작 그 말을 듣자 준우는 온몸의 힘이 쭉 빠졌다.
“어디를 갔는데요?”
“어떤 아이를 자기 집에 데려다 주고 나서 용담 큰스님을 뵈러 간다고 했어요.”
효경 스님은 그 말을 하면서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아직 한창 나이인데도 그녀는 스님 노릇을 오래 해서인지 퍽 어른스러워 보였다.
“벌써 열흘도 더 지난 일이었어요.”
그날 혜지가 새벽 포행을 나가 모처럼 마을 쪽으로 얼마쯤이나 걸었을까. 어디선가 사람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이 꼭두새벽에 웬 사람일까. 아직도 마을은 멀리 보였다. 소리 나는 쪽을 살펴보니 숲 사이로 언뜻 하얀 물체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쪽에는 벌써 잠을 깬 새들이 숲 위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거기 누구요?”
혜지가 물었다.
그러자 그 하얀 물체는 더욱더 몸을 숨겼다. 혜지는 가슴이 섬뜩했지만 용기를 내어 그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나뭇가지를 헤치고 보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웬 소녀가 잔뜩 웅크리고 앉아 새벽의 살을 에는 추위와 공포에 떨고 있었다.
혜지는 깜짝 놀랐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중학교 3학년 정도나 되었을까. 비린내 나는 몸에 풋사과처럼 앙증맞게 돋아 오른 젖가슴이 눈에 거슬렸다. 혜지는 얼른 입고 있던 동방을 벗어 소녀를 덮어주었다. 그리고 재빨리 새파랗게 얼고 있는 소녀의 몸을 비비고 주물러주었다. 빨리 생기가 돌지 않으면 그대로 얼어 죽을 것만 같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소녀는 제정신을 차렸다.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무슨 일이 있었어?”
그제야 소녀는 겁먹은 얼굴로 혜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이내 울음을 터뜨리며 혜지의 가슴속에 파고들었다.
“이젠 괜찮다.”
혜지는 소녀를 안고 부드럽게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그러나 소녀의 울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혜지는 잠시 더 아무 말도 묻지 않고 그대로 울게 내버려두었다. 소녀의 숨소리가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가자 혜지는 다시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래도 소녀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아무 말이 없었다. 혜지는 누가 볼까봐 소녀의 알몸을 자신의 옷으로 감싸안고 후닥닥 절에 데리고 왔다. 소녀는 혜지의 손을 아플 정도로 꼭 쥐었다. 이윽고 절 앞에 다다랐을 때에야 소녀는 혜지의 손을 놓아주었다.
“스님 감사해요.”
“세상이 바로 이런 세상이에요. 나는 지금도 그 일만 생각하면 온몸에 소름이 끼쳐요. 소녀가 왜 그 지경이 되었는지 그것은 물어보나마나 뻔한 일이잖아요. 그런데 누굴 믿을 수 있겠어요. 사내들은 모두 다 늑대고, 도둑이에요.”
준우는 무릎을 세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작 일어날 걸, 그는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은 것 같았다. 효경 스님의 그 대쪽 같은 성품은 그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방문을 나서면서 그는 말했다.
“스님, 다시 또 만날 수 있겠지요?”
“인연에 따라서…….”
차가운 흙기운이 발바닥을 타고 촉촉하게 종아리로 올라오고 있었다. 준우는 눈을 들어 청빈암이 있는 산을 바라보았다. 한 자락 구름이 그 산에 걸쳐 있었다. 그전에 왔을 때는 저쪽 담장을 돌아서 혜지를 찾아 그 청빈암에 올라갔었다.
그는 문득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합장을 하고 서 있던 효경 스님은 이제 안으로 들어가고 없었다.
준우는 중얼거렸다.
“용서하소서. 나 역시도 어쩌다가 잘못된 이 삶을 용서하소서.”
그는 무엇보다 혜지에게 그 여자의 본능을 눈뜨게 해준 것이 가장 큰 죽을 죄였다. 그것은 아직도 그 파락호 아버지의 더러운 피가 그의 혈관 속에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그 속엔 진실의 피가 한 방울도 들어 있지 않은 것이었다. 그날 밤 제정신이 아니어서 저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혜지를 어떻게 했다는 말은 순전히 거짓말이다. 그는 어쩌면 오래 전부터 그 욕정을 품고 있었는지 모른다.
“전 오늘 같은 이런 속가의 밤은 처음 경험이에요. 살다 보니 이런 밤도 다 있어요. 어려서 출가한 스님들은 대부분 세속에 대한 궁금증이 많거든요.”
그런데 그는 그런 혜지를 방바닥에 거칠게 쓰러뜨렸다. 그리고 마치 그 캐시미론 이불 같은 어둠 속에서 그는 거침없이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눈처럼 희고 탐스러운 혜지의 젖가슴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그는 그 젖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혜지는 콧소리를 내며 얼굴을 약간 찡그렸다. 하지만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가 혀끝으로 밀어 그녀의 입술을 열자, 그녀는 스르르 눈을 감고 그 혀를 깊이 받아들였다.
그는 손을 뻗어 혜지의 허리 곡선을 타고 하반신을 더듬어 내려갔다. 팽팽하게 탄력이 넘치는 그녀의 둔부가 어둠 속에 선명히 떠올랐다. 그 둔부의 오묘한 선을 만족스런 눈으로 핥으며 그는 몇 번이나 목구멍에 침을 넘겼다. 그의 손은 저절로 혜지의 허벅지 안쪽으로 옮겨져 갔다. 혜지는 바르르 둔부를 떨었다. 하지만 그녀는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있어서 그것이 어떤 상태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는 이윽고 혜지의 팬티를 벗겼다.
소녀경(素女經)을 보면 거기 황제가 이렇게 묻는다.
“입상 여인(入相女人)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에 소녀는 대답한다.
“입상 여인이란 천성이 상냥하고 목소리가 아름다우며, 머리칼은 칠흑같이 검고, 부드러운 살결과 가는 골격의 소유자를 말합니다. 나이는 25세에서 30세까지의 아이를 낳지 않은 여인이어야 합니다. 언제나 그곳이 샘물처럼 넘쳐 있는 여인입니다. 이러한 여인은 몸을 요동쳐서 땀을 비 오듯 흘리게 되지만 상대에게 순응하여 행위를 합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결코 몸을 손상시키는 일이 없습니다. 키는 크지도 작지도 않고, 몸은 굵지도 가늘지도 않으며, 가랑이는 길고, 국부에 털이 없고…….”
하지만 혜지는 그곳에 음모가 풀밭처럼 넘치고 있었고 이슬 먹은 풀잎처럼 반짝거렸다. 그는 한없이 두려운 마음으로 그것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죽은 듯이 누워 있던 혜지가 그제야 몸을 꿈틀했다. 하지만 그는 정작 이때부터는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몰라 애가 탔다. 그러다 그는 문득 언젠가 혜지가 청빈암의 마당 끝에 지폈던 모닥불이 떠올랐다.
그도 서툴게 그곳에 불을 붙였다.
장작의 상태가 매우 양호해서 그 불은 단숨에 타올랐고 혜지는 뜨거워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녀는 두 팔로 그의 목을 힘껏 감았다. 혜지의 얼굴에는 불의 날개가 황홀하게 파닥이고 있었다. 그는 다시 불 속에 장작개비를 한 개 더 집어넣었다. 가쁜 숨을 헐떡이며 혜지는 금방 배뇨를 하고 싶을 때의 그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불은 한 순간 더 맹렬히 타올랐다. 성에 대한 본능은 어쩔 수가 없는가. 혜지는 분명 비구니가 아닌 여자의 몸으로 그 성의 쾌감을 완벽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울었다.
“이 한 순간을 얻기 위해 중생들은 서로를 사랑하나요?”
다 타버린 잿더미를 보며 뭔가 공허하고 서글픈 마음이긴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그는 아직 그 한 순간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피는 못 속인다는 것인가. 그래도 한 가지 아버지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그 뒤 다시는 그녀의 근처에 얼씬거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 죄의 대가는 너무도 비참하다. 그 죄로 인해 죄 없는 한 생명이 서럽고 억울하게 태어났지 않는가.
2
버스는 들판을 가로질러 끝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혜지는 그 소녀를 자기 집에 데려다 주고 나서 이제 용담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무심히 창 밖 하늘에 눈을 주었다. 해는 아직 중천에 놓여 있었다.
한 줄기 도로를 중심으로 양쪽에 바둑판처럼 펼쳐진 논에서는 농부들이 한창 가을걷이에 여념이 없었다. 한쪽에서는 누렇게 익은 벼를 베기도 하고, 또 한쪽에서는 경운기로 그걸 실어 나르고 있었다. 오직 한가롭게 보이는 건 높푸른 하늘의 흰 구름밖에 없었다. 바람도 바쁘게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소녀가 주지 스님 앞에 털어놓은 얘기는 이랬다. 학교에 갔다 오는 길이었는데 웬 난데없는 승용차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다짜고짜 소녀를 집어 태웠다. 그 남자는 삼십대 후반 정도로 보였는데 어찌나 힘이 센지 저항하다 잡힌 소녀의 손목이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차는 곧장 교외의 어느 한적한 여관으로 달려갔다. 방을 하나 잡고 들어간 그 남자는 소녀를 침대 위에 앉혀 놓고 전화로 주인에게 술과 안주를 시켰다. 소녀는 그 남자의 징그러운 눈초리에 질려 울지도 못하고 덫에 걸린 토끼처럼 몸을 떨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맥주병과 마른안주를 쟁반에 담아 든 주인이 들어왔다. 다급해진 소녀는 주인의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며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주인은 처음엔 몹시 놀라는 눈치이더니 그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그냥 비굴하게 히죽 웃었다.
주인이 나가자 화가 난 그 남자는 기가 막혀 서 있는 소녀의 뺨을 갈기며 몸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수치스럽고 원망스런 시간들이 흘렀다. 소녀는 밤새도록 뜬눈으로 웅크리고 있다가 그 남자가 술에 곯아떨어진 틈을 타서 정신없이 여관을 빠져나왔다. 급히 서둘러 도망쳐 나오다 보니 옷은커녕 신발 한 짝 꿰어 신지 못했고 그 남자가 뒤쫓아올까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무작정 뛰다보니 여기저기 알몸에 생채기가 생겼고 뾰쪽한 돌부리에 걸려 발이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다. 소녀는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고 지나가는 차를 세워 태워 달라고 하기에도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소녀는 알몸을 숨기기 위해 산 속으로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소녀는 죽고 싶다고 말했다. 주지 스님은 절대로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소녀를 야단쳤다.
“정말로 사람들이 참 밉다. 정이 뚝뚝 떨어진다.”
그래서 주지 스님은 그처럼 남자에 대한 피해망상에 시달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소녀는 주지 스님이 우선 몸이나 가리라고 내준 승복을 걸쳐 입더니 죽어도 자기 집에 돌아가지 않고 여기서 그대로 입산을 하겠다고 생떼를 썼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며칠 더 데리고 있다가 오늘 혜지가 직접 소녀를 자기 집에 데려다 주고 온 것이었다. 이제 그 소녀의 장래가 어찌 될지 그것도 심히 걱정이었다.
버스는 이제 작은 마을을 하나 왼쪽 옆구리에 끼고 산모퉁이로 숨듯이 돌아가고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끝없이 맑고 깊었다. 해도 아직 그대로 중천에 놓여 있었다. 큰스님은 지난번 다친 허리가 다 나았을까.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자 다시 시원스럽게 터진 콩밭이 펼쳐지고 있었다. 여기저기 고추잠자리가 꼬리를 물고 날아다녔다. 혜지도 크게 원을 그리며 날고 있는 고추잠자리의 꼬리를 물고 잠시 파닥거렸다.
그래도 그분은 이런 세상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사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21살, 아직 어리다면 어린 그 나이에 벌써 깨달음을 얻었고, 35살 때는 스승으로부터 전법게(傳法偈)를 받아 불조(佛祖)의 정통 법맥을 계승한 한국의 마지막 선지식이다. 경허의 3대손이요, 석가모니의 제78조이다.
그런데 혜지가 지난번에 찾아갔을 때는 용담이 산에서 일하다가 허리를 다쳐 뚱하게 자리에 누워서 창 밖만을 시름하게 내다보고 있었다. 힘들게 일을 하고 있어서인지 얼굴도 꺼칠해 보였다.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 다만 자기 자신을 꾸짖기 위해서 그리 힘들게 노동을 하는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혜지는 무엇 때문에 아직도 그 앞에만 가면 오금을 펼 수가 없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무슨 일로 왔느냐?”
한참 후에야 용담은 퉁명스럽게 한 마디 내던졌다.
“큰스님께 보여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혜지는 용담 앞에 종이 한 장을 꺼내놓았다. 그 종이에는 게송(偈頌)이 적혀 있었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용담을 찾아간 것이었다. 그녀가 그 섬의 시간 속에 살면서 유일하게 한 것은 그걸 하나 얻은 일이었다. 얼마나 수없이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절망을 거듭했던가. 그 인연의 절박감 때문이었다.
趙州無誰敢得悟
佛開口下殺人劍
若人問我當何事
昨夜三更月呑月
“이것은 바로 그 무자 화두에 대한 것이 아니냐?”
누워 있던 용담이 종이를 냉큼 집어 들더니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렸다. 혜지의 눈끝은 간절하게 타고 있었다. 용담의 입 끝에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떠올랐다.
“조주의 무자를 누가 감히 깨달아 얻을 것인가? 부처라도 입만 열면 살인검이 내리리. 무슨 일이 있었는가 묻는 이가 있다면, 어젯밤 삼경에 이미 달이 달을 삼켰다고 하리라. 그렇다면 이것은 오도송(悟道頌)이 아닌가? 그렇다면 네가 분명 무엇을 보았다는 얘기가 아니냐?”
조그맣게 소리 내어 게송을 번역해서 읽어보더니 용담이 벌떡 일어나 자리에 앉았다. 용담의 얼굴이 잠시 심각해졌다. 갑자기 그 눈에 찬바람이 일었다.
혜지는 가슴이 마구 떨렸고, 그녀는 마치 설원(雪原)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용담은 혜지에게 윗목 구석에 놓인 보따리를 가져오라고 손짓을 했다. 혜지가 일어나 보따리를 들고 오자 용담은 그 속에서 책을 한 권 꺼냈다. 용담이 혜지에게 책을 펼쳐 보였다.
금오에 천추 달이요
낙동에 만리 파로다.
고기 잡는 배가 어느 곳으로 갔는고?
의구히 갈대꽃에서 자더라.
金烏千秋月
洛東萬里波
漁舟何處去
依舊宿蘆花
“이것은 용성 선사의 오도송이다.”
용성(龍城)은 기미년 독립 선언서에 만해 한용운과 더불어 서명한 불교계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용담은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오도송이야말로 그대로 만인의 향기로운 등불이다. 용성 선사는 낙동강을 건너면서 이 오도송을 지었다 하며, 그분이 뒷날 대각교를 창설했을 때 종지(宗旨)의 구(句)로 삼았다고 한다. 그런데, 보라.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은유가 너무 깊고 어렵긴 하나 세상에 이보다 더 확실한 불법(佛法)이 어디 있겠는가. 참으로 더없이 아름답구나. 누가 되었든 이 오도송의 뜻만 알면 그 역시도 그대로 견성이다. 그렇다면 고기 잡는 배는 무엇을 뜻함이며, 갈대꽃은 어디에 있는가?”
용담은 마치 진맥이라도 하듯이 혜지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혜지는 가슴 깊이 숨을 들이 삼켰다.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다. 아니, 솔직히 그녀의 귀에는 아무런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실은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 조사(歷代祖師)들이 바로 그 갈대꽃에서 안신입명(安身立命)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자리가 바로 무문인(無文印)이다. 글발 없는 인(印)이다. 마치 인장을 허공에 찍은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심인(心印)이다. 공(空)이면서 공이 아니요, 공이 아니면서 또한 공이다. 다시 한번 자세히 들여다보라. 이 가운데 어디에 티끌이 한점 묻어 있는가. 팔만대장경 속에는 글자가 있지만, 그러나 이 오도송 속에는 글자가 한 자도 없다. 그야말로 불립문자(不立文字)다. 그럼에도 이것은 팔만대장경의 결집이요, 그 마지막 돌파구이다. 하지만, 이걸 보라.”
천상천하에 제일 가는 부자라고 자랑했더니
돈 한 푼으로 말미암아 쇠사슬에 묶이고 말았네.
크게 웃고 욕하는 사람 많이 있기를 바라노니
뼈를 가루 내어 참회하려 하여도 다하지 못하네.
曾誘宇宙第一富
却因一文被萬縛
願賜大笑痛罵辱
粉骨碎身不得懺
“내가 굳이 누구라고 이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겠지만, 자기가 이미 참회를 잘 해놓고도 스스로 그 도리를 모르고서 오히려 엉뚱하게 ‘뼈를 가루 내어 참회하려 하여도 다하지 못하네’라고 말하고 있으니, 실로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이냐? 죄가 본래 어디에 따로 있던가. 하지만 오히려 그 한 구(句)가 다시 죄가 되는 것이다. ‘크게 웃고 욕하는 사람 많이 있기를 바라노니’까지 세 구는 잘 되었는데 마지막 한 구를 잘못 놓아 네 구가 몽땅 다 사구(死句)가 되고 말았다.”
혜지는 짐짓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까닭없이 죄스러웠다.
용담은 다시 핏대를 올렸다.
“그럼에도 이런 사람들이 가장 높은 곳에 앉아 남들을 가르치고 있으니, 이 나라 이 민족 앞에 심히 부끄럽고 슬픈 일이다. 오도(悟道)를 하지도 못하고서, 감히 어떻게 그 경지를 상상으로 더듬어서 오도송을 짓는단 말인가? 오도송이 제대로 된 것이라면 그 속에 글자가 단 한 자도 없어야 한다. 글자가 있으면서 또한 글자가 없다. 글자가 있으면 그것은 똥이다. 두고두고 냄새가 나는 고약한 똥이다.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그렇게 싸는 대로 다 똥밖에 될 것이 없다. 그 똥으로 대체 누구를 속이겠는가? 그렇다면 이제 네 입으로 직접 한번 말해 보거라. 조주는 어째서 무라고 했는가?”
용담이 혜지에게 다그쳐 물었다.
“…….”
하지만 혜지는 선뜻 대답을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왜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을 못하느냐? 그럼, 본성품을 확실히 보지도 못하고서 네가 어떻게 그런 오도송을 지을 수가 있었단 말이냐?”
용담이 무섭게 혜지를 노려보았다.
혜지는 겨우 입을 열었다.
“그것을 어떻게 말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그렇다고 본성품을 보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미 본성품이 아니지 않습니까. 본성품은 원래 볼 것이 따로 없는 까닭입니다.”
“사실인즉 그러하다. 함정미토(含情未吐)로다. 뜻은 품고 있어도 아직 토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 말이 바로 나올 때까지 다시 더 밤을 아껴 정진을 해 보거라. 그래도 이제 겨우 갓은 돌았구나.”
용담의 입 끝에 다시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떠올랐다.
혜지는 그제야 가슴에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용담을 향해 다시 삼배를 올렸다.
3
한낮의 햇살이 문창호지에 사락사락 스며들고 있었다. 사시마지를 올리고 있는지 법당에서는 카랑카랑 염불소리가 들렸다. 용담은 방안에 앉아 톱을 손질하고 있었다. 쇠줄을 들고 톱날의 사이사이를 꼼꼼하게 간다. 그러다 그는 쓸쓸히 머리를 흔들며 두 눈을 지그시 내리감는다. 갑자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언뜻 그 얼굴에 낯선 시간의 그림자가 서성거린다.
“준구 형.”
하고 그는 낮게 불러본다. 이제 그만큼 세월이 흘렀으면 잊힐 만도 한데 그에게는 언제나 가슴 깊은 곳에서 선명히 떠오르는 두 얼굴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직도 가끔 힘들게 일을 하는 중에도 문득 그 시절로 돌아가는 버릇이 있었다. 그 시절의 한이 얼마나 가슴속에 깊이 못 박혔으면 그런 것일까.
“그리고 할머니…….”
그때 문 밖에서는 자운이 방에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때렸다. 마음이 춥고 쓸쓸한 가을이었다. 문득 그녀의 시선 끝에서 산벚나무 이파리가 몇 점 허공을 가르며 파르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자운은 비를 맞은 듯 마음이 한없이 축축해지다가도 용담 앞에만 오면 금세 마음이 차분하게 맑아지는 것이었다. 그 힘은 대체 용담의 무엇에서 오는 것일까. 그래서 그녀는 그 당당함을 잃지 않고 언제나 용담 앞에 꼿꼿하게 고개를 쳐들고 앉아 똑바로 눈을 마주볼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 용담은 일하다가 허리를 크게 다쳐 며칠간 자리에 누워 있었다. 하긴 사실 그 나이에 힘든 노동을 하는 것도 무리였다. 자운이 줄곧 선방을 전전하며 정진을 하고 있는 사이 그는 더 몰라보게 늙어 있었다. 그럼에도 이상하지. 자운의 눈에 그 얼굴은 언제 봐도 늘 같은 빛을 띠고 있는 것이다. 복사꽃 두어 송이 피어오르는……! 도대체 어디다 그 뿌리를 두고 살기 때문일까. 자운은 다시 문득 붓을 들어 그 얼굴을 그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녀는 아직도 그 얼굴을 한번 그려보는 게 소원이다. 하지만 어떻게 깊은 샘물이 은은히 흐르고 있는 그 내면의 얼굴을 붓끝으로 그릴 수 있을까.
자운은 아직도 빈껍데기같이 어설프기만 한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떠올려보았다. 한 줄기 찬바람이 그 속을 훑고 지나갔다. 언젠가 용담은 결국 수행은 스스로 자기의 자화상을 그리는 행위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 신심이 부족한 탓일까. 이 세상 오직 용담만을 믿고 몇 년을 한결같이 지내온 자운이었다. 그래서 여태 버린 것은 무엇이고 얻은 것은 무엇인가.
“그동안 얼굴이 많이 상했군.”
처음 자운이 찾아왔을 때 그녀의 핼쑥하게 여윈 얼굴을 보며 용담은 짐짓 혀를 찼다. 자운은 힘주어 입가에 미소를 물었다.
“이 어리석은 업보 중생을 불쌍히 여겨 밝게 인도해 주십시오.”
“그렇게 너무 조급하게 서두를 것 없어. 하긴 나도 한때는 그랬지. 그 비원(悲願)을 품고 출가를 했으니까. 하지만 그까짓 조금 늦어지면 또 어떤가. 선(禪)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그건 선이 아니야.”
“…….”
“무릇 닦는다고 하는 것은 별다른 게 아니야. 다만 그 한 생각을 비울 뿐이지. 그래서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고 훌륭한 생각일지라도 출가인에게는 다 망상인 거야. 어리석은 자기 탐욕인 거야. 그래서 닦는다고 하는 놈이 오히려 허망한 거야. 그런데 왜 그것을 복잡하고 어렵게 생각하는가? 지금 세상에는 중생제도를 말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래서 사실은 그 무엇도 중생제도가 아니야. 그 해탈을 구하는 마음이 바로 생사이거니.”
“그런데 제가 오면서 어떤 책을 보니 거기 전강 선사(田岡禪師)는 무자 화두에 대해 이렇게 법문을 하고 있었어요.”
자운은 용담의 시선을 붙들고 잠시 파닥거렸다.
―여기 이 무자 화두에 대한 좋은 비유를 하나 들자면,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임금님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 양귀비의 정부 안녹산은 양귀비를 빼앗긴 후 잊지 못해서 그 궁성 밑에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습니다. 양귀비는 자기의 몸종인 소옥을 아무 할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불렀습니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요?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녹산에게 알리는 데 본뜻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라고 말씀하신 조주 대사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참상(參想)하지 말고 ‘무’를 말씀하신 조주 대사의 의지(意旨)를 참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용담은 이 말을 듣고 금세 얼굴빛이 변했다.
“전강 스님이 그렇게 말했을 리가 있나.”
그는 설레설레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제가 본 그 책에는 분명히 그렇게 씌어져 있었어요.”
“그렇다면 그거 아주 큰일이군. ‘무’자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참상하지 말고 ‘무’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해야 한다고? 어림도 없는 소리야. 감히 조사 공안(祖師公案)을 더럽히면 지옥 가기 화살이지. 하긴 뭐 어디 그 스님뿐이겠는가. 지금 조계종 종정 진제 선사(眞際禪師)도 전혀 다르게 무자 화두를 가르치고 있더군.”
“그럼 그 무자 화두를 어떻게 들어야 하나요?”
“그 ‘무’라고 한 것이 바로 조주 스님의 뜻이며, 이미 그 ‘무’로써 일체가 다 끝난 경지야. 그러므로 이제 그 ‘무’ 다음에 입만 벌리면 머리가 두 쪽으로 박살이 나는 거지. 이것이 바로 조주 스님의 뜻인 거고, 이외의 다른 뜻은 없어. 번뇌가 곧 보리요, 어둠이 곧 밝음이니, 어둠이 스스로 어둠을 아는(自覺) 그것이 바로 밝음이야.”
“…….”
“그런데 그 진제 종정 스님은 더구나 서산 대사가 44세 때 저술한 <선가구감(禪家龜鑑)>에 ‘이치로는 깨달았어도 습기는 없애지 못했다(理卽頓悟 事非頓除)’고 했다 해서 ‘그것은 모순이다. 육조 대사도 금을 캐서 녹여 잡금을 제하면 순금이 된다고 하셨다. 물에 있으나 산에 있으나 순금은 변하지 않는 것과 같이 견성을 하면 습기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번뇌가 곧 보리, 완전히 진리로 돌아갔는데 번뇌에 놀아나게 되겠는가.’ 라고 반박을 했지.
하지만 그 또한 꿈에도 견성을 하지 못한 말씀이지. 어째서 그런가 하면, ‘견성을 하면 습기와는 상관이 없다’고 하는 그 말이 바로 습기이기 때문이다. ‘완전히 진리로 돌아갔다’고 하는 그놈이 오히려 돌아가지 못하고 번뇌에 놀아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다가 남의 다리를 긁는 격이지. 깨달으면 자연히 알게 될 뿐, 섣불리 따져서 그 도리를 알려고 해서는 안 돼. 진실로 깨달으면 바로 그 자리이지만, 깨닫지 못하면 아득히 멀고 컴컴하지.”
자운은 무심히 눈을 들어 먼 산을 바라보았다. 산빛들이 불그죽죽 을씨년스럽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때 읍내에서 철물점을 하고 있는 보살이 자운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자운은 흘끗 그 여자를 보고 나서 자기 방을 향해 등을 돌렸다.
“저, 잠깐만요. 여기 처사님을 만나려고 왔는데…….”
철물점 보살이 얼른 말했다.
“안 그래도 진작 돈을 갖다 드리려고 했는데 내가 좀 늦었군요.”
언제 방에서 나왔는지 마루 끝에 어정쩡하게 서며 용담이 말했다. 그는 예의 그 멋쩍은 웃음을 입가에 물었다. 언젠가 읍내에 나간 김에 그 집에서 톱을 하나 외상으로 사온 일이 있었다. 그래서 용담은 그 돈을 받으러 온 줄 알았다.
그러나 여자는 손을 홰홰 내저었다.
“그것 때문에 온 게 아니에요.”
외상값 얘기가 나오자 어이가 없는지 여자가 픽 웃으며 용담을 흘겨보더니 산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저를 좀 따라와 보세요.”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줄레줄레 여자의 뒤를 따라 나간 용담은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저만큼 산문 밖에서 미리 택시까지 대기시켜 놓고 한 여자가 먼 산빛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용담은 갑자기 등줄기가 땀으로 끈적끈적 젖었다.
그 여자 역시 그의 남루한 옷차림을 보고 깜짝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여기에 있는 줄을 어떻게 알고……?”
그러자 철물점 보살이 얼른 받았다.
“내가 말해 준 거예요. 그때 처사님이 우리 집에 와서 톱을 사갈 때 보니 이 애가 말하는 그 절머슴같이 생겼기에 냉큼 알려주었죠. 이제 알고 보니 이 애하고 같이 대학까지 다녔다면서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왜 이렇게 사실까. 그 공부가 아깝기도 하지.”
“전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어요. 서산에 살고 있는 이덕기 씨를 만났어요. 대전에서 우연히. 묻지도 않았는데 그분이 먼저 석준 씨의 얘길 들려주더군요.”
함께 택시를 타고 산 아래로 한참이나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을 때에야 윤명희가 말했다. 배의 속살처럼 사근사근한 목소리였다.
용담도 그제야 어색하게 눈을 들고 윤명희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살이 많이 빠지긴 했지만 여전히 고운 그 얼굴이었다. 눈가의 잔주름 속에는 아직도 지난날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여자는 다행히 곱게 늙고 있었구나. 용담은 무심히 자신의 꺼칠한 몰골을 만져보았다.
“우리 그냥 여기서 내려 걸어가지 않겠소?”
용담은 공연히 앞에 앉은 철물점 보살이 눈에 걸렸다. 저 보살하고는 대체 어떻게 되는 관계일까.
“차라리 그게 더 낫겠어요.”
윤명희도 얼른 맞장구를 쳤다.
그러자 철물점 보살이 눈치 빠르게 내뱉었다.
“그럼 나 먼저 갈 테니 알아서 잘해 보라구.”
그들을 내려놓고 택시는 이내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읍내 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하지만 그들을 내려놓은 곳도 이미 산 아랫마을의 한복판이었다.
“우리 저기 가서 술이나 한잔 하지 않겠소?”
길옆에 꾀죄죄하게 나앉은 술집에 눈길을 주며 용담이 말했다. 몇 번 들른 적이 있는 집이었다. 그것도 무슨 병인가. 그는 이따금 산에서만 내려오면 술 생각이 간절했다. 오늘은 얼떨결에 꿈을 꾸듯 끌려 내려와서 한층 더했다.
“그럼 그렇게 해요. 학교 다닐 때 제가 석준 씨 술 많이 사드렸어요.”
윤명희의 표정이 문득 밝아지고 있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부군이 작고했다는 말은 이덕기 그 친구한테 들었소.”
술집의 골방에 들어가 마주앉은 뒤에야 용담은 이 말을 했다.
“저도 그분이 말해 줘서 석준 씨가 이젠 그냥 이렇게 살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아까 그 이종사촌 언니 집에 찾아왔다가, 그 언니가 자주 청암사에 다닌다기에 혹시나 하고 물어보았어요.”
“그랬군.”
하지만 그 여자는 어쩌다 사월 초파일 같은 날이나 한 번씩 절에 찾아오는 신도였다.
“결국은 이렇게 되려면서, 아무도 모르게 두 번씩이나 그렇게 훌쩍 떠나버렸나요?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딨어요. 그러고 보면 사람이 살아가는 길도 참 여러 가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지 않나요?”
용담은 힘없이 머리를 주억거렸다.
“바깥어른은 어떤 분이었소? 한때 아버님의 조교였다는 말은 들었소만.”
그녀의 아버지는 그들이 다니던 대학의 농학과 교수였다. 강의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어쩌다 캠퍼스에서 오가다가 스칠 때 보면 참 인자한 모습이었다. 이제는 그분도 벌써 저 세상 사람이 된 지 오래였다.
“그이도 불쌍한 사람이었어요. 고아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결국 병으로……. 오래 되었어요. 애들이 어릴 때 가셨는걸요.”
목마른 사람처럼 소주를 두 잔이나 거푸 비우고 나서 그녀가 말을 받았다.
용담이 마지못해 한잔 더 채워주자 그녀는 또 금세 잔을 비웠다.
“하지만 석준 씨도 참 바보였어요. 누군 뭐 그런 갈등도 없이 살아온 줄 알아요?”
윤명희는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용담을 쳐다보았다.
그는 마음이 착잡하게 내려앉았다. 문득 그날 밤의 그 서툰 키스가 혀끝에 아리게 떠올랐다. 그의 하숙집 대문 앞에서였던가. 하지만 그것이 그들에게는 마지막이었다. 무엇 때문이었던가.
“이젠 이미 다 지나간 얘기요.”
이제는 피차 다 늙어가는 나이였다.
하지만 윤명희는 단호하게 말했다.
“전 아직 지나가지 않았어요.”
용담은 측은한 눈길로 윤명희를 건너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한 줄기 시린 바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인연이란 게 대체 무엇인지. 이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라는 것이.
그에게 있어 윤명희와의 만남은 아픈 운명이었다. 용담은 처음 그녀와 서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것을 이미 느끼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 유난히도 흰 얼굴에 산머루처럼 검게 박혀 먼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눈. 그것은 이상하게 어린 날 준구 형과 제각의 느티나무 아래 앉아 이름없는 별이 되던 그 슬픈 밤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그들은 또 같은 학과였다.
그가 대학에 입학할 때 무식하게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어머니는 물었다.
“국문과라. 그러면 거시기, 문교부장관이 되는 것이냐?”
하지만 용담은 그녀의 눈을 보기 위해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지 모른다. 언제나 문득 그 눈을 열고 들어가면 거기 그 전설 같은 밤이 기다리고 있었다. 때로는 그 눈에 먼 섬이 보였다. 그 적막한 섬기슭에 하얗게 파도 부서지는 소리.
그렇게 용담은 그녀와 자연스럽게 가까워져 갔고, 강의시간마다 항상 붙어 다녔으며, 강의가 없는 날은 그녀가 그의 하숙방에 놀러와 긴 하루를 보내곤 했다. 그의 하숙집은 학교 바로 뒤에 있었다.
그런데 준구 형이 난데없이 그를 찾아온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실로 6년만의 해후였다.
“네가 보고 싶어서 왔다. 그날 밤 그 역전에서 너와 그렇게 헤어진 뒤 나는 한번도 너를 잊어본 적이 없었다. 할머니도 편안히 계시겠지?”
“지금 할머니는 형이 죽은 줄로 알고 있어.”
그러나 용담은 차마 그 소문들을 다 말할 수는 없었다.
“내가 죽긴 왜 죽어? 하긴 뭐 죽도록 고생은 했지.”
그러면서 준구 형은 그에게 그때 돈 20만 원이나 주고 갔다. 그 돈은 당시 한 학기의 등록금이었다. 준구 형은 그 돈을 그에게 주고 싶어 달려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용담은 그것이 더 못 견디게 가슴이 아팠다.
준구 형은 울먹이며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어머니는 어떤 집으로 개가를 했을까?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 왜 나를 한번도 안 찾았을까? 또 나 같은 아들도 낳았을까?”
이때 다시 용담의 갈등은 처절하게 시작되었다.
자기의 가정사가 심히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는 것이었다. 벌써 6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준구 형은 끝내 그의 어머니에 대한 원한을 잊지 않고 있었다. 할머니의 말마따나 역시 악연이었는가. 할머니도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지만 준구 형은 그의 어머니 때문에 그쪽으론 영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가 있겠는가.
용담은 차츰 윤명희와의 거리가 서먹해져 갔다. 그가 마침내 출가를 결심한 것은 이때였다. 대학 3학년이었다. 그때까지도 준구 형의 이 말은 그의 귓가를 아프게 울리고 있었다.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내 딱한 처지를 알고 여러 사람이 도와주려고는 했지만 끝내 야간 학교엔 못 들어가고 말았어. 그 대신 돈은 좀 벌었지. 그런데 한 가지 견디기 어려운 것은, 어찌나 네 얼굴과 할머니의 얼굴이 자꾸만 번갈아 떠오르는 것이었는지 사람들 앞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질 때였어. ……아, 지금쯤은 할머니도 퍽 늙었을 거다. 퍽 늙었을 거다.”
“지금도 그 성격은 여전하시겠죠?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나요?”
윤명희는 다시 자기 잔에 술을 채웠다. 그녀는 이제 숫제 혼자서 자작으로 술을 따라 마시고 있었다.
“…….”
용담은 그제야 자기 앞에 놓인 술잔을 집어 들었다.
생각해 보면 그는 윤명희한테 본의 아니게 큰 죄를 진 셈이었다. 그래서 그도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 괴로워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는 끝내 용기가 없어 자기의 가정사를 고백하지 못했다. 차마 자기 입으로 어떻게 그 준구 형의 억울한 불행을 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제는 그 준구 형이 죽은 지도 이미 오래 전이다. 그때부터 그는 다시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내가 그동안 석준 씨를 얼마나 찾았는지 모르지요? 절마다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예요.”
윤명희는 바르르 몸을 떠는 시늉을 해 보였다.
“왜 아직도 나 같은 놈을 못 잊고 있는 거요?”
용담은 시들하게 내뱉었다. 그는 아무 볼품도 없이 뒤틀어진 자신의 몰골을 생각했다. 이제는 피차 다 늙어가는 나이다.
하지만 그녀는 냉큼 입을 열었다.
“석준 씨가 스님이 되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석준 씨는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거예요. 그 덕분에 나도 좀 나름대로 불교에 대해 공부를 했지요. 알고 보니 사람이 산다는 거 그리 복잡한 게 아니더군요.”
“그렇긴 하지요.”
그는 밖을 내다보았다. 닭들이 발톱으로 땅바닥을 허적이며 모이를 쪼고 있는 게 보였다. 차라리 인간도 저처럼 단순히 밥만을 먹기 위해서 사는 거라면 오죽이나 좋을까.
“우리 그 시절의 일들 생각 안 나나요?”
그때가 언젠데, 라고 하려다가 용담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는 다시 밖을 내다보았다. 닭들은 여전히 바쁘게 금싸라기같이 깔려 있는 햇살을 쪼아대고 있었다.
“과거는 과거로서 이미 다 충분히 아름다운 법이요. 그것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인생은 그다지 쓸쓸하지 않을 거요. 난 이제 그만 일어나봐야겠소. 절에 올라가 할일도 있고…….”
마당 끝에는 어느새 감나무 그늘이 길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어디서 문득 바람소리가 서늘하게 들렸다. 용담은 그녀와 더 마주보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뭔가 공허한 울림만이 자기 안에 가득했다.
윤명희의 얼굴에는 애달픈 미소가 떠올랐다.
“여기서 이렇게 살 테면 차라리 우리 집에 와서 나를 좀 도와줘요. 두 딸이 있었는데 큰딸은 몇 년 전에 결혼을 했고, 지금은 말을 못하는 작은 애와 둘이서 외롭고 힘들게 과수원을 경작하며 살고 있어요. 오천 평 남짓이나 될까요. 아직 키 작은 나무의 사과밭이지만 그래도 두 모녀가 가꾸어 나가기엔 힘이 부쳐요.”
밖에서는 누가 또 술청에 들었는지 떠들썩했다.
“이제 난 정말 일어나봐야겠소. 시간이 너무 늦었소.”
용담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가 먼저 그의 몸을 잡았다. 용담은 가만히 머리를 흔들었다. 밖에서는 다시 사람들의 소리가 떠들썩했다. 윤명희는 그대로 그의 몸을 잡은 채 잠시 파닥거렸다. 그는 물끄러미 윤명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윤명희는 그의 몸을 놓아주었다.
“너무도 외로워서 이젠 수치심까지 다 잃었나 봐요.”
그걸 마시고 벌써 취한 것일까.
이번에는 윤명희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채 윤명희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윤명희는 다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이 못난 사람……. 우린 대체 전생의 어떤 인연으로 이렇게 만나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이제 또 내세에는 어떤 관계로 만나질까요? 이 못난 사람…….”
윤명희의 손은 어느새 그의 가슴을 헤집고 들어와 맨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용담은 불편하게 앉아 우울한 눈으로 윤명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릿결에서는 은은히 미역 냄새가 감겨오고 있었다.
“하긴 그 내세를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현세의 자기 자신도 부정하는 일일 거예요. 내세로 건너가는 그 영혼이 없다면 아마 밤의 꿈도 없을 거예요. 그러고 보면 죽음이라는 것도 잠시간의 잠에 불과한 거예요. 다만 옷처럼 이 몸만을 바꿔 입을 뿐이니까요.”
“…….”
“나도 요즘 폐가 너무 안 좋아요. 좀더 두고 여러 가지 정밀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의사는 아무래도 폐암일 가능성이 높다고 해요. 말도 못하는 벙어리 딸을 놓아두고 어떻게 그런 일이……. 남편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거든요.”
사람의 명이란 일정한 정상(頂上)이 없어 얼마만큼 살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모르면서 산다. 하지만 누구든 이 죽음에서 빠져나갈 수는 없다. 제아무리 용을 쓰며 버텨 봐도 결국은 처참하게 오고야 말 죽음이다. 또 아무리 백년을 산다 한들 실로 풀끝의 이슬이다.
그래서 일찍이 석가모니도 다만 이 생사 일대사(生死一大事)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를 했지 않는가. 그럼에도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저 무작정 일생을 허송한다. 그렇다면 진정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용담은 가만히 팔을 벌려 윤명희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더없이 성품이 깔끔하고 지순한 여자였었다. 얼핏 보니 윤명희의 감은 눈에서 소리없이 한 줄기 눈물이 비어져 나오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나를 좀 도와주세요. 그렇다고 아직은 이대로 슬프게 체념을 하긴 싫어요.”
용담이 그나마 세상 사는 맛을 다 잃어버린 것은 그 준구 형의 죽음을 보고 나서였다.
용담이 출가한 지 5년쯤 되었을 무렵이었다. 그때 그는 강원도의 어느 오지 암자에서 도반과 둘이서 지내고 있었다. 산세가 워낙 험한 탓으로 신도는커녕 스님들마저 찾지 않는 빈 절이었다. 그래서 며칠씩 교대로 멀리 나가 탁발(托鉢)을 해서 겨우 연명을 했다.
그런데 준구 형이 용케도 찾아온 것이었다. 용담은 생각할수록 참 신기하기만 했다. 하지만 준구 형은 폐결핵 말기였다. 보건소에서 주는 약을 꾸준히 먹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어서 마음이나 편하게 쉬고 싶어 조계사에 가서 스님들한테 물어물어 찾아왔다며 입가에 애달픈 미소를 떠올렸다.
“어떤 한 스님은 너를 아주 잘 알더군. 나는 역시 석준이 너밖에 없구나. 너라도 있으니까 좋다.”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한 얼굴이 목불인견이었다.
“잘 왔어. 여긴 경치가 정말 기막히게 좋고 공기가 맑은 곳이니까 금방 몸이 좋아질 거야. 봐, 저기 저 산들을. 그리고 저 아무 오염되지 않은 계곡물도 이가 시리게 차다고. 이제 그 물로 가슴을 씻으면…….”
준구 형은 그 여름 내내 병마와 힘들게 싸우고 있었다. 약은 용담이 탁발한 돈으로 떨어지지 않게 열심히 사다 날랐다. 그러나 준구 형은 용담의 정성도 아랑곳없이 갈수록 더 식은땀을 흘리며 꺼멓게 까무러졌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마치 꼭 무슨 악몽을 꾼 것만 같구나. 나는 전생의 그 무슨 업보로 이리도 섧게 살아왔는지 모르겠구나.”
그러면서 요란하게 기침을 해댔다.
“정말로 미안하다, 석준아. 이제 후생에 가서는 네 은혜를 꼭 갚으마. 너는 부디 관음보살 같은 큰 인물이 되어야 한다. 부처가 되어야 한다.”
그러다가 뜬금없이 이런 말을 묻기도 했다.
“할머니는 어떻게 돌아가셨냐?”
하지만 그 순간은 용담의 두 눈에도 왈칵 눈물이 솟았다. 그 할머니도 끝내는 악독한 어머니한테 모진 구박을 받고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런데 이제는 준구 형의 차례인가.
어느 날 준구 형은 용담이 탁발을 나갔다가 돌아오니 빈 절에서 혼자 외롭게 죽어 있었다. 함께 지내던 도반은 준구 형이 오자마자 떠난 지 오래였다. 용담은 피눈물을 흘리며 혼자서 땅을 파고 자신의 삶까지 함께 묻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4
청암사의 산문에 들어서자마자 혜지는 먼저 후원으로 눈길을 주었다. 용담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절에 올라와 장작을 패고 있었다.
혜지는 성큼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때 등 뒤에서 자운이 그녀를 불렀다. 순간 혜지는 아랫도리가 휘청거렸다. 햇살이 눈가에 가시처럼 따끔거렸다. 자운은 화장실 쪽에서 오고 있었다. 청암사는 화장실이 산문 밖에 있었다. 그쪽 칙칙한 잡목 숲은 금방 뱀이라도 기어나올 것같이 으스스했다.
혜지는 자운을 외면했다.
아직까지 그 감정이 남아 있는 건 아니지만 그때 자운이 핏대를 올린 일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그날 자운은 마치 꿈틀거리는 지렁이라도 보듯이 혜지를 대했다.
그런데 자운이 뜻밖에도 마음을 활짝 열고 있는 것이었다.
“혜지 스님, 그땐 정말 앞뒤를 가리지 않고 나도 모르게 말을 너무 마구 해서 죄송해요.”
“나도 자운 스님 마음 다 이해해요.”
혜지는 부드럽게 그녀의 눈빛을 받았다.
“나는 혜지 스님이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공부를 한 줄은 몰랐어요.”
“……?”
“큰스님한테 오도송을 지어서 드렸다면서요. 큰스님한테서 얘길 다 들었어요.”
햇빛이 강렬하게 자운의 두 눈에 반짝이고 있었다.
“오도송은 무슨.”
혜지는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차라리 이 산의 이름없는 풀꽃이 된 것만 같겠어요. 그것이야말로 본래 구도자의 진정한 모습일지 모르지요. 이 산 속 바위틈에서 아무 욕심 없이 저 혼자 피었다 지는 꽃. 또, 이런 얘기도 있잖아요.”
자운은 언젠가 혜지를 만나면 이 말은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신라 문무왕 때 처를 거느리고 살림을 하면서 도를 닦은 광덕(廣德)이라는 스님이 있었어요. 그는 엄장(嚴莊) 스님과 매우 친하게 지냈는데 그들은 굳게 약속한 것이 있었어요. 먼저 서방 극락세계로 들어갈 때는 서로 알리기로 하자는 것이었지요.”
자운은 힘주어 말했다.
“그때 광덕 스님은 서라벌의 분황사 서쪽 마을에서 처와 함께 수도를 하였고, 엄장 스님은 남산에서 혼자 수행을 했는데, 세월이 흘러 어느 날 엄장 스님의 창 밖에서 광덕 스님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나는 이제 서방 극락세계를 가니 그대는 잘 있다가 속히 나를 따라 오게나.’ 그래서 이튿날 엄장 스님이 광덕 스님을 찾아가니 그는 전날 이미 죽음의 길로 떠난 뒤였어요.”
혜지는 찬찬히 자운의 눈 속을 들여다보았다. 자운이 무엇 때문에 굳이 또 그런 얘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일까.
자운은 사뭇 진지하게 눈빛을 파닥였다.
“엄장 스님은 광덕 스님의 아내와 함께 장사를 치른 뒤에 말했어요. ‘친구도 떠나갔으니 이제 나와 함께 사는 것이 어떻겠소?’ 그러자, 광덕 스님의 처도 쾌히 승낙을 했어요. 하지만 그날 밤 엄장 스님이 동침을 요구하자 그녀가 말했어요. ‘스님이 서방 극락세계를 원하는 것은 나무에서 고기를 잡으려는 것과 같습니다’라고요.”
혜지는 갑자기 피로가 아랫도리로 휘적휘적 몰렸다. 그녀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을 편하게 가지면서 그녀는 더 들었다.
“그래서 엄장 스님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물었어요. ‘친구도 그랬는데 어찌해서 나는 서방 극락세계에 못 간다는 것이오?’라고요.”
혜지는 다시 마음을 편하게 먹었다.
자운은 슬쩍 혜지를 곁눈질했다. 혜지는 시무룩한 얼굴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자운은 이제 이 말을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단정히 앉아서 말했어요. ‘그 스님은 저하고 10년을 같이 동거했지만 단 한번도 동침한 일이 없고 매일 수도에만 전념했습니다.’ 이에, 엄장 스님은 크게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 길로 원효 대사를 찾아가 일심으로 수행을 했다고 해요.”
혜지는 어금니를 꾹 물었다.
그것은 아직도 혜지를 그리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자운의 끝없는 아집일 터였다. 혜지는 심히 안타까웠다. 여기 와서 자운한테 다시 그런 얘기를 들으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자운은 그런 모진 말을 하고도 여전히 태연한 얼굴이었다.
혜지가 다시 후원에 갔을 때는 용담은 이미 방에 들어가고 거기 없었다. 바람만 부드럽게 그녀의 두 뺨을 만져주고 있었다.
덩달아 뒤 따라온 자운이 말했다.
“혜지 스님 먼저 방에 들어가세요. 나는 차를 좀 준비해서 들어갈 게요.”
혜지는 자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나서 착잡한 마음으로 방문 앞에 두어 번 기침소리를 냈다. 방문을 열어주며 용담은 뜻밖에도 대뜸 반색을 했다.
“그러잖아도 너를 많이 기다렸는데 마침 잘 왔구나.”
그렇게 생각을 해서 그런지 그 목소리도 옛날처럼 따뜻하게 느껴졌다.
혜지는 한쪽 구석에 걸망을 벗어놓고 용담을 향해 삼배를 올렸다.
“지난번 네가 주고 간 오도송을 다시 한 번 더 읽어 보았다. 그것은 역시 제대로 잘 되었더구나. 방망이 처리도 제법 깨끗하게 잘 되었고. 그 정도면 칭찬을 해줄 만하다. 너를 키운 보람을 느꼈다.”
용담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스쳤다.
그 말을 듣자 혜지는 더 용기가 나서 처음으로 용담 앞에 고개를 똑바로 들고 앉았다. 여태껏 그 앞에만 서면 바짝 주눅이 들어 오금을 못 펴던 그녀였다. 혜지가 차츰 나이를 들면서부터 용담은 엄해지기 시작했다.
“저도 큰스님을 뵙고 돌아간 뒤 다시 더 다그쳐서 정진을 해보았어요.”
그때 찻쟁반을 들고 자운이 방에 들어왔다. 그들의 대화가 잠시 멈칫해졌다. 넌지시 자운을 한번 바라보고 나서 용담이 말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그 무자 화두의 답을 말해 보거라. 조주는 어째서 무라고 했는가? 그 조주의 ‘무’라고 한 뜻을 바로 알아야 생사 해탈을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삼세 제불의 골수요, 역대 조사의 안목이다. 조주는 어째서 무라고 했는가?”
“무!”
용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혜지는 큰 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용담은 희뜩 혜지를 건너다보았다.
“그래 보았자 반밖에 이르지 못했다. 다시 일러라. 어떤 이는 다만 촛불을 보고 태양이라 하고, 어떤 이는 가로등을 태양이라 하고, 어떤 이는 반딧불을 태양이라 하고, 별빛, 달빛, 심지어는 다비장의 벌건 숯등걸을 태양이라 하기도 한다.”
“무!”
혜지는 다시 또 용담의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큰 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는 용담이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옳다. 그렇지만 아직 그것으로는 인가(印可)를 할 수 없다. 이리 [[와서 그 무라고 한 뜻을 내 귀에 대고 직접 말해 보거라.]]”
“그럼 제가 나갈까요?”
자운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걸 용담이 말렸다. [[막았다.]]
“그럴 거 없어. 혜지는 이리 와서 말해 보거라.”
혜지는 잠시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아무래도 그녀는 자운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혜지는 용담의 곁에 가까이 다가가서 귀엣말로 조근조근 말을 했다.
“지금 네가 그렇게 말을 했느냐?”
수굿이 듣고 있던 용담이 고개를 몇 번 끄덕거렸다. 혜지는 다시 제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그녀의 두 눈은 투명하고 조용하게 생기를 띠고 있었다.
“그래서 ‘무’인 것이지, 개가 불성이 없다는 뜻에서 ‘무’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그러므로 그것이 바로 불성이 아니겠습니까?”
용담은 허공을 향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렇다. 틀림이 없는 견성(見性)이다. 조주가 그것을 집어삼키고 무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제 다시 그 ‘무’ 다음에 입을 열면 목숨을 잃는 법이다. 이미 그 ‘무’로써 일체가 다 끝난 경지지. 천칠백 공안의 대의가 다 그 ‘무’ 속에 들어 있느니. 누가 감히 그 한 맛을 알겠는가.”
아주 큰일을 했다는 얼굴이었다.
그제야 자운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틀림없는 견성이라고? 자운은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 정말 놀랍고 그녀로선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 못할 일이었다. 그녀는 까닭없이 서러웠다. 그럼에도 자운은 눈짓으로 용담 앞에 놓인 찻잔을 가리켰다. 어서 차를 드시라는 뜻이었다. 그때까지도 찻잔은 그대로 말없이 식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용담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너야말로 그 영원한 처녀성을 되찾았구나. 네가 과거에 무슨 짓을 했든 이제 그것은 모두 다 소멸되었다. 그래서 그걸 지우기 위해서 도를 닦는 것이다. 장하다. 정말 기특하다. 일생을 바쳐 처절하게 공부를 하고서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그냥 가는 수도승들이 허다하거늘. 하긴 심산유곡의 물을 마시고 나물을 먹으며 참선을 한다고 어찌 다 부처를 이루랴. 그래서 옛사람도 말하지 않았는가. ‘그 여실히 참구하여 실지로 깨달은 도인은 금일에만 상봉하기 드문 것이 아니요, 옛날에 있어서도 또한 일찍이 다수를 볼 수 없었느니라.’라고. 이것은 네가 결국 남을 위해 자신을 비우고 산 그 헌신의 대가다.”
그 순간 혜지는 그 섬의 시간 속에 같이 살고 있는 지선이 문득 눈앞에 떠올랐다. 그날 밤 포구의 방파제에 정박해 있는 뱃전들의 불빛을 바라보며 지선은 말했다.
“……저녁때가 가까워지자 엘리에셀은 우물가로 갔어요. 이제 곧 여자들이 물을 길러 나올 거예요. 우물가로 올 많은 여자들 중에서 어떻게 이삭의 아내를 고를 수 있을까. 엘리에셀은 조용히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어요.”
어선에서 흘러나온 불빛들이 반은 물속에 잠긴 채 그 긴 꼬리를 처연히 흔들고 있었다. 지선의 목소리에 다시 조용히 생기가 돋아나고 있었다.
“그 기도를 끝내자마자 엘리에셀의 내부에서 무엇인가가 그에게 고개를 들라고 알려주었어요. 거기 마침 어깨에 물항아리를 멘 한 처녀가 보였어요. 엘리에셀은 그 처녀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 버렸어요.”
지선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만 같은 눈이었다. 그 여자가 얼마나 아름답고 청초하게 생겼기에 지선은 그렇게도 부러운 것일까. 이상하게 지선도 그 부분은 절대로 때가 묻지 않는다.
“젊고 날씬한 처녀였어요.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엘리에셀은 좀더 강력하게 그녀가 자기 기도의 응답이라는 것을 감지했어요. 그 처녀가 바로 리브가였어요. 엘리에셀은 넋이 나간 채 중얼거렸어요. ……심히 아리땁고 지금까지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구나.”
그렇다면 지선도 다시 그 순결을 찾을 수 있을까. 지선은 오직 그것만이 소원이었다. 그 리브가의 순결이.
자운은 다시 눈짓으로 용담에게 찻잔을 가리켰다. 어서 차나 드시지요. 하지만 이제 그녀의 얼굴에는 힘이 다 빠져나가 버리고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안개 속을 헤매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용담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자운은 마치 컵 속의 더러운 물을 버리듯 그렇게 부단히 애써 왔는데도 왜 아직 그 근처에도 못 가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전 아직 그것을 모르겠어요.”
자운이 냉큼 말대꾸했다. 그럼 무엇을 더 버려야 한단 말인가? 자운은 언제나 용담 앞에서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하지만 그 자운 역시 바로 용담의 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그들 두 비구니는 용담의 다른 두 면을 각각 흠모하고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었다.
“자운은 아직도 그 버려야겠다는 생각은 못 버리고 있기 때문이야. 그게, 그 생각이 바로 어리석은 자기 탐욕인 거야. 자운은 여태 그 탐욕으로 도를 구한 거야. 그러니 그게 잘될 리가 있겠나. 그것부터 버려야지. 그것을 버렸기 때문에 혜지는 영생(永生)을 얻은 거라고. 좀더 큰 분심을 가져야지.”
용담은 그제야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자운은 창 밖 한 조각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속으로 아득히 용담의 모습이 멀어져 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사람이 한번쯤 적당히 타락도 해보고 갈 데만큼 가봐야 그 마음에 관용이 생겨 나를 쉬 버릴 수 있고, 깨달음도 그만큼 가능한 거야. 이것이 바로 상근(上根)이지.”
하지만 자운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럼 그 알몸까지도 다 버려야 한단 말인가? 그녀는 쓰게 찻잔을 집어 들었다.
“그래서 중국의 부대사(傅大士)는 낮에는 품을 팔고 밤에는 아내 묘광(妙光)과 함께 설법을 잘하여 오히려 많은 명승(名僧)들이 모였다고 하지 않는가. 옛날에는 오히려 그렇게 재가(在家)에 도인들이 더 많았지. 소를 잡다가 도를 깨친 사람도 있고, 숯을 굽다가 활연 대오를 한 사람도 있고 말이지.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니, 깨달으면 내가 바로 불교야. 이 절간이 불교가 아니고.”
자운은 두 눈에 바들바들 힘을 모아 용담을 노려보았다. 문득 어떤 오기가 생긴 거였다. 그녀는 정말로 길고 불행한 하루였다.
하지만 용담은 다시 천천히 뜸을 들이며 말했다.
“이제 혜지는 어떻게 살든 그건 네 자유다. 머리를 깎고 산에서 살아도 좋고, 머리를 기르고 산을 내려가서 살아도 좋다. 네가 살고 싶은 대로 살면 그뿐이지, 누가 너를 간섭할 수 있겠는가. 스스로 애착을 떠난 마음은 그 어떤 것을 해도 다 그 행위가 그대로 지계(持戒)인 거다.
문득 각지(覺知)를 얻어 본성품으로 돌아갈진대 이것이 곧 영원한 처녀이니라. 다시 무슨 때가 묻으리. 어찌 두 번 다시 승속에 속겠는가. 그래서 승속에 살아도 승속을 떠났다는 얘기다. 그래서 중생들은 산에 들어오지만 오히려 성인(聖人)은 산을 내려가는 법이다.”
이윽고 자운은 살그머니 일어나 소리없이 방문을 빠져나갔다.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며 용담은 쓸쓸히 머리를 흔들었다.
“그때 네 나이가 몇 살이었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네가 나를 만난 지도 어언 20년이 지났구나.”
지그시 눈을 내리감고 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던 용담이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물었다.
“아홉 살이었어요.”
“그랬었구나. 그런데 그때 너는 참외장수의 리어카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땀을 뻘뻘 흘리며 참외껍데기를 주워 먹고 있었더니라. 아주 무더운 여름이었지.”
용담의 얼굴에 그 적적한 세월의 그림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전 배가 몹시도 고팠어요.”
그 말을 듣자 혜지는 새삼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럼에도 그때 너는 내가 사준 참외를 먹지 않고 있었지. 그래서 내가 왜 참외껍데기는 주워 먹으면서 정작 참외는 먹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너는 할머니에게 갖다 드리고 싶어서 그런다고 말했지. 그때 나는 이미 네 법기(法器)를 보았느니라. 그래서 비구니로 만들어주고 싶었던 게지. 그런 네가 벌써 이렇게 성장했구나.”
저쪽 산막 골짜기에서 철새가 한 마리 불쑥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그쪽에 눈을 주며 자운도 혜지를 따라 가만히 그 자리에 섰다. 그 성격으로 미루어 자운은 끝내 아무런 감동이 없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산문 밖에까지 혜지를 졸졸 따라 나온 것이었다. 이제 그만 들어가 보라고 몇 번이나 만류를 했는데도 자운은 굳이 혜지를 배웅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걸 보고 혜지도 다시 금방 자운에 대한 마음이 밝아졌다.
“그런데 혜지 스님은 어떻게 해서 그 무자 화두를 깨닫게 되었나요? 나도 지금껏 어딜 가나 오직 그 무자 화두 한 생각뿐이었는데 전혀 길이 안 보여요. 그래서 이젠 차츰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어요. 나한테도 좀 그 특별한 방법을 가르쳐 줘요.”
자운은 이어 혹, 하고 아프게 한숨을 토해 냈다.
조주는 어째서 ‘무’라고 했는가? 그러나 그 생각의 끝에는 언제나 산이 우뚝 가로막고 서서 길을 비껴주지 않는다. 무. 요지부동이다. 산은 그 어떤 방법도 용납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길이 거기서 끊어진다. 은산철벽이다.
“자운 스님이 너무 거창한 서원(誓願)을 세웠나 봐요. 그리도 화두 드는 생각이 무거운 걸 보면.”
혜지는 공연히 애달팠다. 지금 자운의 그 심정은 어떠할까.
“난 애당초 그런 서원은 단 한 번도 품어본 적이 없어요. 깨달음을 얻으면 그때 가선 어떨지 모르지만.”
자운이 혜지를 향해 하얀 이를 가지런히 드러내보이며 수줍게 웃었다.
“하지만 거기에 무슨 특별한 방법이 있겠어요. 다만, 진실로 그 마음만 비우면 몸은 있으나마나지요. 조주가 말한 그 ‘무’는 개 불성과는 무관하게 ‘무’인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비록 개 불성의 유무(有無)를 물었지만, 그보다도 먼저 지금 그것을 묻고 있는 게 누구입니까? 바로 나예요. 내 불성이 지금 바로 그렇게 묻고 있는 거지요. 그러므로 조주의 그 ‘무’는 이미 내게 대한 답인 거예요. 그래서 개 불성과는 무관하게 무(無)예요.”
“스님, 고맙습니다.”
언뜻 보니 자운의 눈에 뜻 모를 눈물이 맑게 묻어 있었다.
혜지는 다시 하늘을 날고 있는 철새에게로 눈길을 가져갔다. 저 새는 어느 낯선 지방에서 이 계절을 지내려고 찾아온 것일까. 그녀는 아까부터 자꾸만 철새의 날개 위에 마음을 얹고 있었다. 오늘따라 무엇이 이렇듯 그 아이를 더 못견디게 간절히 생각나게 하는지 모를 일이다. 그 아이는 요즘 그의 집에서 데려다 키우고 있다고 한다.
혜지는 가만히 한숨을 삼켰다.
“또한 개 불성이든, 내 불성이든, 부처의 불성이든, 조사의 불성이든, 그 누구의 불성이든, 불성은 다 같은 하나예요. 지금 내 불성이 바로 개 불성이에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그렇게 모두들 개 불성에만 집착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에요. 왜 그렇게 한결같이 이 산사(山寺)만을 고집하고 있는지. 그러기에 백년하청이라는 얘기지요. 그렇게 수행을 한들 무슨 소득이 있겠어요.”
철새는 하늘을 한 바퀴 돌고 다시 산막 골짜기로 내려올 듯하더니 그대로 날개를 파닥이며 서쪽 하늘로 날아가고 있었다.
혜지는 망연히 서서 서쪽 하늘 멀리 날아가는 철새를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그녀는 언제든 큰스님으로부터 깨달았다는 인가(印可)만 받으면 다시 돌아가 아이를 키울 생각을 했다. 이제 그 아이는 혜지가 이 지상에서 유일하게 순백의 영혼으로 찾아가야 할 마지막 섬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자운이 갑자기 혜지 앞으로 성큼 나섰다. 그 바람에 혜지는 짐짓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알 수 없게도 자운의 눈에는 다시 강렬하게 햇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데 말예요. 그때 언젠가 혜지 스님이 한 그 말은 역시 맞는 것 같아요. 그 사랑을 떠나서 따로 부처의 사랑은 없다는 말, 나도 이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그것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
혜지는 멍청하게 눈을 뜨고 자운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또 무슨 소리인가. 그녀는 가볍게 머리를 내저었다. 도무지 이 망아지 같은 여자가 또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자운은 어금니에 물고 있던 말을 마저 뱉었다.
“그렇다면 사실 뭐 누가 누굴 사랑해도 사랑은 좋은 거겠지요. 어차피 사랑도 불성처럼 다 같은 하나라면. 그래서 중생들을 측은하게 내려다보는 부처의 자비가 숭고한 것이라면, 당연히 한 남편이 지순하게 자기 아내를 마주보는 그 눈빛도 충분히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이 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하긴 뭐 사랑이 별것이겠어요.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혜지 스님은 남자와 그 사랑을 할 때 어떤 느낌이던가요?”
*강인봉 : 1949년 전북 김제 출생. 1970년 원광대 국문과 재학시절 불교에 입문, 그해 첫시집 <수덕사의 쇠북소리>를 발간하였고, 견성(見性)을 하였으며, 1984년에는 혜암 선사로부터 전법게(傳法偈)를 이어 받았음. 1979년 <한국문학> 1백만원 고료 신인상 당선. 1989년 <문학정신> 제1회 1천만원 고료 소설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구나의 먼 바다(전3권)>, <다시 에덴에서>, <불의 침묵>. 시집 <첫사랑>, <간월도>. 산문집 <풀>, <누가 부처를 보았다 하는가>. 혜암 선사의 법어를 편역한 법어집 <늙은 원숭이> 등을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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