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54호/미니서사/김혜정/잰틀맨
페이지 정보

본문
미니서사
김혜정
잰틀맨
그와 데이트를 시작한 지 두 달째 되었다. 은행에서 창구업무를 맡고 있는 나에게 그는 고객처럼 번호표를 뽑고 기다렸다가 초콜릿을 건네주고 돌아가곤 했다. 다소 엉뚱한 그에게 나는 끌렸다.
엊그제 내가 그의 핸드폰에 찍힌 친구인 미라의 이름을 본 것은 우연이었다. 그는 샤워 중이었고 핸드폰이 탁자에 놓여 있었다. 미라는 얼마 전 애인과 헤어졌다며 폭식을 했다. 미라, 라는 이름이 흔치는 않지만 동명이인이겠지 했다.
마침 미라에게서 연락이 왔다. 저녁이나 먹자면서. 나는 미라가 고기를 질겅질겅 씹어 삼키는 것을 보다가 재미삼아 말을 꺼냈다. 미라의 입에서 나쁜 놈, 이라는 욕이 흘러나왔다. 나 역시 애써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었는데 카메라에 필름이 들어 있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심정이었다.
“넌 왜 그 남자랑 헤어진 거야?”
“꼭 헤어졌다고 할 수는 없어. 잠시 휴지기를 가졌을 뿐이지. 그래야 열정이 식지 않을 것 같아서. 근데 그 새를 못 참고 널 만난 거야.”
“그러니까 양다리? 하필 너랑 나 사이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공교롭게 됐지만, 너무 상처받지 마. 네 몸만 축나니까. 그 사람한테는 우리가 다가 아니야.”
“뭐?”
“또 있어.”
“우리 말고 여자가 또 있다고? 넌 그걸 알고도 사귄 거야?”
“나도 나중에 알았어.”
“세상에! 그 여자도 이 사실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지금 남 걱정 할 때야? 그 여자는 끄떡없어. 오히려 좋아할걸?”
“설마!”
“자기 남자가 여러 여자한테 사랑을 받으면 자기도 그만큼 사랑을 받는 거라고 생각한대. 전에 나한테도 고맙다고 했어.”
“그 여자 제 정신이야?”
“누구나 사랑이란 걸 하게 되면 정신을 반쯤 놓게 되잖아.”
“기가 막혀서. 그 사람, 우리가 친구라는 걸 알면 어떻게 나올까?”
“잰틀맨답게 나오겠지.”
“잰틀맨다운 건 또 뭐야?”
미라가 정색을 하면서 목을 가다듬었다.
“이제 두 분은 그만 저를 떠나주시죠. 저는 더 이상 두 분에게 나쁜 남자가 되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미라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소리 내어 웃었다.
*김혜정 :여수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을 졸업. 199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단편「비디오가게 남자」당선. 소설집 『복어가 배를 부풀리는 까닭은』『바람의 집』『수상한 이웃』장편소설『달의 문(門)』『독립명랑소녀』‘제15회 서라벌문학상 신인상’ ‘간행물윤리위원회 우수청소년 저작상’ ‘송순문학상’ ‘2013 아르코창작지원금 수상’
추천0
- 이전글54호/한시산책/서경희/서경희고향의 산은 달과 내 기억속에만 있다. 15.07.07
- 다음글54호/미니서사/박금산/김기태가 백조라는 말에 대하여 15.07.0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