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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호/책 크리틱/고우란/'이 땅의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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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크리틱
고우란
나는 ‘이 땅의 시인’이다
―古拙한 虛和의 경지에서 나온 怪-관찰시조 고정국의 민들레 행복론
하늘은 맨 처음 농부를 사랑하셨고 그 다음으로 시인을 사랑하셨다. 이 말은 아마 하늘에 대해서 가장 겸손한 이는 농부이고, 마음으로 겸손하여 하늘의 말씀을 받아 세상에 내보내는 이는 시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겸손’이기에 앞서 농부로서 ‘숙명’이고 시인으로서 ‘운명’에 해당되는 말이라 하늘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용의 자세가 아니면 농부의 길을 포기해야하고 시인의 길을 포기해야만 한다. 그러나 지금은 자본주의 물질문명 아래 사람의 삶이 규정되어, 자본의 농업과 자본의 시가 그 본래의 모습을 달리하여 누가 땅의 사제司祭인 농부이고, 누가 또 하늘의 사제인 시인인지 모를 지경(고정국 서울은 가짜다(리토피아)에 이르렀다. 자본이 땅이며, 자본이 하늘인 이 시대에 끝까지 ‘농부’이고, ‘시인’이기를 고집하는 이가 있다. 이미 시조인의 대명사가 되어 버린 그 사람. 고정국이다.
제법 큰 과수원을 경영하는 부농富農이었던 그를 취재하러, 잡지사 기자 선배들을 따라 필자가 처음 만났던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당시부터, 1990년대 틈틈이 들려오는 그에 대한 뜨거운 소문(제주온천 개발지의 열풍과 흥망)으로 빈털터리가 된 그가 2000년대 초반 한국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 지회장이었을 때 후진양성(현재 그의 손으로 배출한 시인만 30명이다)에 전력을 다하는 그를 보았고, 제주도 서쪽 촌구석 금악에서 제자가 마련해준 창고 같은 곳에서 혼자 도를 닦듯 경전을 사경하는 그를 보았고, 그러는 와중에 세계적인 작품 ‘그의 고향 제주도 하고도 위미리 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 울단 장쿨래기, 각’을 발간하는 것을 보았고, 다시 후배이자 제자 하나가 내어준 손바닥만한 텃밭도 그냥 놓아두지 않고 일구어 ‘배추농사 잘 되었다, 다들 와서 가져가라’는 전화를 받았다는 그의 후배이자 제자들을 보면서 필자는 몸살나게 부러워 했고,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시농사 역시 풍작을 거두어 ‘중앙시조대상 신인상’부터 시작해서 ‘유심작품상’, ‘이호우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한국동서문학작품상’ 등을 휩쓰는 것을 보면서도 ‘그라면 뭐 당연히 그러려니’ 생각하다가, 2014년 ‘지금’을 살아가는 순간에도 모 문예지에 실린 작품 「왜가리 사냥법」을 읽고, 이제껏 살아온 고정국시조의 살아있는 완결판 같아 “야, 이거 고정국이 쓴 거 맞어?”라고 말단의 후배 인 필자가 건방지게 까불어도 “고정국 너무 무시하지 말어.”라고 예쁘고 친근하게 눈 흘기는 한 마디를 들었는데, 이 양반이 또 관찰시조 민들레 행복론(지혜사랑)을 냈단다. 이번엔 순전히 시인 따로, 농부 따따로가 아니라 시인이자 농부가 한 몸이 되어 이루어낸 결실에, 이 양반이 이제는 대중을 향해 ‘나는 시인이다’ 선포하고 ‘내 시농사 지은 것. 맛 좀 보시오.’ 외쳐대고 있구나, 직접 독자들의 평가를 받겠다고 거리로 나섰구나, 하는 생각에 역시 그다운 행동이다. 막 박수를 치고 있는 중이다. 독자에게는 즐거움이요, 시를 쓰는 후배들에게는 이 보다 더한 귀감이 어디 있으랴.
시조時調쓰기란 참으로 어려운 학문이다. 먼저 정서적으로 시詩가 되어야 하고, 정형의 형식調律에 합당해야 하고, 또 때時代에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또한 완결도 아니요, 가장 기본이다. 이 기본에서 다시 시작과 출발을 해야 한다. 한마디로 끝이 없는 길이다. 우리나라 고유의 서정抒情이라 가급적 고유어로 써야하며, 고유의 율격이라 궁상각치우(五行의 音階)음색을 내고도, 한국정신(얼)이 깃들어야 하며, 한국적인 미학(멋)으로 삶의 매듭을 올바르게 풀어야 한다. 또한 그러면서도 개성으로서의 괴怪가 있어야한다는 게 시조에 대한 필자의 생각이다. 개인의 내면과 사유만으로도 충분히 인정되는, 개성傀만 있는 자유시가 아니라 한국인 집단 무의식의 정서로서 타당성이 있지 않으면 바로 결점이 드러나 못된 시로 전락하는 것이 시조이기 때문이다. 여기 그의 잘되어 멋들어진 시조 한 수를 올린다. 말 잘하는 사람 앞에서 ‘이 사람은 말을 참 잘하는 사람’이라고 말을 하는 어리석음을 감행하지 않을 것이니 잘생긴 그대로 감상하시라.
쭉 펴면 하늘이고 내리면 바다가 되는
물끄러미, 물끄러미 수평선만 바라보며
외톨이 왜가리 녀석이 조간대에 산단다
바위를 쓰다듬는 노을녘의 밀물처럼
“악법도 법”이라는 사냥법을 펼치면서
반백의 소크라테스도 제주에 와 산다지
느린 듯 어리석은 듯 난세에서 배워 익힌
재래식 사냥기법의 딱 한 발 거리에서
물속에 거꾸로 비친 제 반쪽을 쪼는 새
먹이를 따르려 말고 먹이가 너를 따르게 하라
고요히 파문 짓는 그 오랜 사유 끝에
부리 끝 파닥거리는 시 한 점을 만났네
―고정국 「왜가리 사냥법으로」(≪문학사상≫3월호)
위대한 석학碩學이며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는 제주에 유배이후 말년에 들어서 누구나 쓸 수 있으나,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글을 구가했다. 입고출신入古出新, 즉 고전 속에 들어가 새로운 것을 창출한다는 그의 생애 전반기 사상에서 외래 경향에 심취하여 거기 몰입하고 마는 몰주체적인 학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조선시대 후반기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을 바탕으로한 그 만의 괴怪를 찾아냈기 때문이었다. 그의 ‘개성’이란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괴’일 때 그 온전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 그런 자세는 꾸밈없고 욕심없는 ‘허화虛和’의 경지라 했다. 그가 만년에 이를수록 고졸古拙한 허화의 경지, 졸拙한 가운데 괴怪가 자연스럽게 살아나는 추사만의 예술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이 때문이었다. 필자는 고정국 시집 민들레 행복론을 읽으면서 ‘추사와 제주 수선화’를 생각했다. 그들의 시경詩境은 둘 다 온전히 ‘허화虛和’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을 수 있었다.
고작 한다는 게 화분 두 개를 옆에 끼고
밤새 반쯤 마른 떡잎이나 바라보는
그래서 하루를 여는 내 아침이 가벼워
잘 익은 과일처럼 맛과 향이 넘쳐나는
그런 인생들은 참 재미도 없을 거야
사는 맛 서툴러 좋아, 티격태격 다투며
여기에 여섯 살배기 그 예쁜 일기처럼
바람에 실려 보낼 씨앗들을 꿈꾸는 저들
나 그런 민들레 싹이랑 함께 살아간단다
―「들레의 그림일기」 1, 2, 3연
‘무소유’는 한국인의 정서 중 하나이다. 과거 사대부들의 안빈낙도安貧樂道가 여섯 살짜리 ‘민들레’라는 이름에 민씨 성性을 빼, 더 친근하게 들리는 이름 ‘들레’의 순진한 눈으로, 인생의 묘미妙味란 잘 나가는 풍요로운 삶의 단맛보다 가난한 가운데 떫고, 짜고, 맵고, 시고, 쓴 ‘서툰 맛’에 있다고, 그림처럼 묘사하고, 떠뜸떠뜸 발화發話하는 형식으로 시인은 말을 한다.
사람이 말을 참아, 사람이 욕심을 참아
정녕 그로 하여 사람이 웃는다면
길섶에 민들레 불러 그 웃음을 배운다면
빗물만 마시고도 원망 한 번 않고 사는
낮은데 살면서도 웃음 한 번 잃지 않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나를 둘러 오리니
하여 ‘들레’네 식구 그 행복을 배우리라
빗물 반 그늘 반 멸시 반 배고픔 반
붕하고 하늘로 뜨는 그 씨앗을 보리니
―「민들레 행복론」 4,5,6연
여기에서 그는 ‘행복전도사’로 ‘행복론’을 진술하는 사제司祭의 발화 포즈를 취한다. 그의 이런 모습에서는 국토를 잃고 가난에 찌들리면서도 이타행利他行으로 행복을 운운云云하는 달라이라마가 연상되기도 하며, 어느 시골 변두리에 있는 허름한 개척교회 목사의 ‘마음이 가난한 자여, 다 내게로 오라.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하는 성경 강론을 듣는 것 같다.
말학의 필자가 아는 시조의 형식은 역경易經의 원방각圓方角 이론으로 볼 때 ‘초장 天 머리 ○-△ □ △ □ 3, 4, 3, 4 들고 나고, 들고 나고’, ‘중장 地 ㅡ 몸통 □-△ □ △ □ 3, 4, 3, 4 들고 나고, 들고 나고’, ‘종장 人 ㅣ 다리 △-△ ○ □ △ 3, 5, 4, 3으로, 크게 살아 움직이는 한 사람, 한 얼이 되어 하늘과 땅을 끌어안아 땅에 내림에 사방으로 펼쳐 걸어가, 비로소 새 사람(삶)이 된다’고 하는 천부경天符經의 내용과도 맞아 떨어지고,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우리 별자리 은하수 28宿을 본뜬 한글, 자모음의 배치 五行)은 ‘자연의 道(陰陽五行으로 한달에 초순, 중순, 하순 세 번의 합으로 네 번의 계절을 겪으며 흘러 성숙한 한 해年를 이루어 더욱 커가는)’를 본받는다는 노자의 ‘도덕경’의 이치와도 같은 동양사상의 핵심을 이룬다.
하여 시조는 ‘자연의 도’에 합당하면서도 불경佛經에서 말하는 ‘해탈의 묘수妙數’이며, 끝없이 발전하여 진화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케 하는, 진정 내밀한 ‘인문학’장르인 것이다.
하나를 배우고서 세 가지를 알아야 한다는
성현의 그 말씀이 내겐 아무 상관이 없어
돌아와 하품을 하며 고스톱을 치던 날
공부는 교실에서 여러 학생과 하는 것을
생각은 들녘에서 들꽃들과 하는 것을
딱 하나 씨앗을 물고 꽃씨들이 뜨는 걸
―「꽃씨처럼」 1, 2연
필자는 그의 잘 생겨 먹은 씨알머리 꽃詩가 지식과 관념으로는 더 이상 생生할 수 없어 ‘들녘’이라는 자연의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부화하여 천지사방으로 날아 퍼지는 것을 ‘몸이 생각을 버렸을 때 본색이 탄생하고’, ‘비상을 준비하는 맹금류의 새끼들처럼’ ‘칠십프로 화상에도 배꼽만큼은 무사했다’는 냉정한 삶의 중심으로서의 「배꼽」, 그 힘으로 잡아 ‘양 날개 어둠의 무게를 털어내’는 「초록무늬 하트」를 읽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금, 여기’는 ‘추방된 사막복판’「뱀의 계명·2」이어서 ‘차라리 몸으로 기어 땅의 소리를 듣도록’「뱀의 계명·7」 ‘몸으로 건너온 사막에’ ‘온전히 천상의 별빛이 차가움에 있’다「뱀의 계명·8」고 ‘시조·1 만수 내려 걷기’를 「가장 낮은 길을 찾아」 하면서 미국작가 호손의 「주홍글씨」 주인공 같은 ‘큰 잘못 감추기 위해 작은 진실을 말하는 그대’ ‘끝끝내 죄목 하나는 들먹이지 않’는 열정적인 「칸나처럼」을 만나고, ‘카드 연체 막으려고 은행으로 가는 도중/인도블록 뒤 쪽에서 반말 투로 부르는 소리/폭 늙은 민들레 송이가 십 원 보태 쓰라’「가을 다큐 8」는 친구도 사귀면서, 그의 갓 태어난 손주처럼 한 살짜리가 되어 가는, 거꾸로 가는 시계를 따라 걷는 법을 익히다 숫제, 민들레 품에 폭 안겨 노래하는 풀벌레 소리로 3, 5, 4, 3하고 시를 쓰는 ‘해탈한 대자연인’ 고정국을 보고 말았다.
*고우란 : 2007년 ≪리토피아≫ 신인상. 시집 호랑이 발톱에 관한 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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