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54호/책 크리틱/김석준/실제를 찾아가는 두 여정∙아포리아 혹은 시선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3
댓글 0건 조회 2,776회 작성일 15-07-07 12:52

본문

책 크리틱
감석준

실재를 찾아가는 두 여정 : 아포리아 혹은 시선


시말은 실재를 찾아가는 너무도 인간적인 언어의 여정이지만, 그 실재와 상면하는 방식은 시인마다 천차만별이다. 실재의 앞면이 죽음본능이 구현된 아포리아로의 귀환이라면, 그것의 뒷면엔 삐딱한 시선 위를 질주하는 환상의 노마드가 점점이 박혀있다. 마치 나희덕 시인의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과 권정일 시인의 『양들의 저녁이 왔다』 사이에 실재의 참모습이 고스란히 압축 전치되어 있는 것처럼, 실재는 ‘바로 지금 여기’라는 즉자적 시공간, 즉 눈앞에 현전의 형식으로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노마드로 산종되어 있거나 미궁의 심연에 은거한 채 자신의 본 모습을 완벽하게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다. 말의 노마드도 아포리아의 귀환도 실재 앞에 선 인간의 숙명이자 언어가 상면할 수 있는 말의 궁극적 과제이다. 

1) 아포리아로의 귀환 : 실재와 시간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은 사랑과 죽음이 변주된 광시곡이다. 까닭은 시간의 여정 전체가 아포리아의 문턱에 이르러서 비로소 자신의 본모습을 점묘화법으로 어렴풋이 드러내 보여줄 따름이기 때문이다. 리듬은 즉흥적이고, 파토스는 강렬하다. 공간에 갇히고, 시간의 선분 내부에서 생이 마모된 채 인간학 전체가 미지의 공간으로 귀의하게 된다. 형이상학을 구멍 틈으로 내밀하게 들여다보아도 실재의 전모가 들어나지 않고, 또 더 큰 아포리아로 귀환하여 절망의 심연에 당도하게 된다. 시간이 실재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는 한, 말들은 결코 돌아오지 못하는 레테의 강을 건넌 채 말들 내부에 말해질 수 없는 말들만 점묘화법으로 산종시키게 된다. 말들은 여기저기 파편처럼 흩어지고, 의미가 착종된 채 실재에 접근하지 못한다. 이를테면 나희덕에게 실재를 들어내 보일 방법이 부재한데, 그것은 사랑과 죽음 사이에서 시말을 현동시키기 때문이다.  

조롱은 새를 품은 채 날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철망 사이의 공기 함량이 너무 적었다
조롱의 문제는 무거움보다 조밀함에 있었다
가늘고 촘촘한 정신을 두른 조롱은
새의 눈이 어두워지는 동안 조금씩 녹슬어갔다
녹슬어간다는 것은
느리게 진행되는 폭발과도 같아서
붉게 퍼지는 말들이 조롱을 갉아먹었다
조롱은 녹슨 방주처럼 가라앉았다
새가 가진 것은 조롱 속의 허공,
새가 할 수 있는 일은 울음소리를 흘려보내
조롱 안과 밖의 공기를 드나들게 하는 것이었다
닻줄 구멍에서 닻줄을 끌어내듯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날개를 파닥이는 것이었다
물론 조롱에게는 작은 문이 있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닫고 이내 어디론가 사라졌다
닫힌 문으로 절망은 더 잘 들어왔지만
철망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그들을 견디게 했다
희박해지는 공기 속에서
―「조롱의 문제」전문

아포리아는 생이 탈주하는 강렬한 출구이자 다시 생을 유혹하고 재귀시켜 인간학을 반복으로 이끄는 입구이다. 아포리아는 탈주와 귀환 사이에 혹은 사랑과 죽음 사이에 기입된 운명의 형식이자, 모든 인간학적인 현실이 무의미한 것으로 소거시키는 궁극적인 심급이다. 마치 새―조롱―손 사이의 관계에 매개된 “조롱의 문제”가 아포리아에 위치한 실재의 참모습이듯이, 인간―지구―우주 사이에 존재하는 “빛”이라는 실재 또한 미궁의 위치에서 인간학을 반조하고 있다. 나희덕에게 실재 앞에 새와 인간의 위치는 동일한 것으로 표상될 뿐만 아니라, 인간 역시 조롱 속에 갇힌 새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아니 헤겔적인 의미의 자기의식Selbst Bewußtsein은 인간에게 모든 불행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는데, 그것은 이 세계에 대한 앎에의 의지가 만든 비극의 상이다. 자기를 의식하는 앎에의 과정은 모름의 과정이자, 모든 앎이 아포리아로 귀환하게 되는 “절망”의 과정이다. 마치 새에게 “문을 열고 닫는 것은 조롱 밖의 권한”이듯이, 인간에게 허여된 사랑과 죽음의 광시곡 또한 지구의 권한 밖에 존재하는 실재의 권능이다. 나는 정녕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소거되는지 전혀 말을 할 수 없다. 
생은 조금씩 어두워져 암흑의 세계로 향하고, 아주 느리지만 정확하게 시간이 사라진다. 말하자면 조롱의 문제는 단지 새와 조롱과 손 사이에 존재하는 한계상황만을 내파시킨 것이 아니라, 인간과 실재 사이에 매개된 아포리아에 관한 근원적 문제를 증폭시킨 것에 다름 아니다. “조롱의 안과 밖”은 시간과 공간의 안과 밖에 갇힌 인간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나희덕의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은 인간과 세계 사이에 매개된 사랑과 죽음에 관한 담론적 사유를 시간이라는 실재 속에 응고시킨 것인데, 그것은 비가역적인 따라서 죽음으로만 인식이 가능한 시간의 실재이거나 실재가 조건지어진 시간의 참모습이다. 내가 나인 이유를 나에게 묻지만, 내가 왜 이 시공간 속에 존재하는지 묻고 답을 구하지만, 나는 내가 왜 ‘지금 여기 바로 이 순간’ 속에 존재하는지는 전혀 모른다. 다만 시간이 내놓은 길을 따라가다가 시간은 말들이 돌아오지 않는 시간으로 소거된다는 사실만을 인지하게 된다. 마치 푸코가 지식고고학의 「서문」에서 말한 것처럼, 시간과 공간 사이를 종주하는 인간은 아포리아의 문턱에서 “폭발”하여 산산이 부셔진 채 파편으로 물화될 뿐이다. 인간학적 아포리아에 빠진 푸코의 그것처럼, 레테라는 죽음의 강에 뛰어들게 된다. 폭삭 주저앉고 가라앉아 시간의 운명 앞에 굴복하게 될 따름이다.

어느 날 흰 벽이 찾아왔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저 눈동자

돌연한 흰 벽의 시선에
중심을 잃고 기우뚱거리기 시작한다

물렁물렁한 반죽처럼 던져진
수직의 늪

온몸을 휘감아들일 것 같은 흡반과
손에 잡힐 것 같은 밧줄과
당장이라도 밀고 들어올 것 같은 바퀴들로
술렁거리는 벽

그래, 몸의 힘을 빼고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거야

벽 속으로

저 열린 눈동자 속으로 
―「벽 속으로」전문

시간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보르헤스 식으로 말하자면 시간은 환상이고, 베르그송 식으로 표현하면 시간은 창조적 진화가 가능한 지속이다. 그러나 시간은 양자처럼 안온한 그 무엇으로 표현되거나 상생의 리듬으로만 탄주되지 않는다. 시간의 실재는 죽음의 실재이다. 시간은 “벽”이고, “시선” 위에 응고된 결절점의 집합이다. 시간은 모든 것의 “중심”이지만, 그 중심에 아무 것도 남겨놓지 않는 공동의 중심이다. 무가 일렁이고, “수직의 늪”을 빠진 채 옴짝달싹하지 못한다. “흡반” 같은 시간이 모든 것들을 빨아들이고 고밀도 압축시켜 시간의 벽 내부에 가둔다. 물론 시인의 벽은 “열린 눈동자”에 투영된 존재의 벽처럼 느껴지지만, 따라서 벽은 이 세계와 인간 사이에 놓은 의미적 거리를 확인하는 존재론적 한계상황을 간접적으로 드러내 보여주지만, 그것은 보다 근원적인 한계 상황, 즉 아포리아라는 벽을 시말 속에 응고시킨 것이라 하겠다. 열린 듯 닫혀있는 따라서 천천히 벽 속으로 걸어들어 가야만 하는 운명이 시간 앞에 가로놓여 있다.
“물렁물렁”하지만, 쉽게 벽을 통과하지 못한다. 마치 노자의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所以不失이라는 하늘의 그물처럼, 시간은 인간학 전체를 “흰 벽” 앞으로 이끌어 생 전체를 생이 아닌 것으로 환치시켜 실재를 정면으로 응시하도록 강요한다. 시간은 폭력적인 강요의 형식이다. 우리는 그저 삐딱하게 실재를 곁눈질하는 무기력한 시간의 타자로만 존재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런데 나희덕 시인은 시간이라는 실재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시간 속에 소거되는 운명의 형식을 시말 속에 육화시키고 있는데, 바로 그것만이 실재를 압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설령 인간학 전체가 벽 앞에 당도하여 삶―시간―세계라는 형식 전체가 반드시 아포리아로 휘어진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되지만, 역으로 시간의 타자인 인간에게 그 “벽”이라는 아포리아의 장치만이 우리를 실재 앞으로 데려다준다. 실재는 벽이고, 아포리아로의 귀환이자, 죽음의 형식이다. 우리는 점점 “몸의 힘을 빼고” 시간의 벽 앞에 당도한다. 우리는 천천히 모든 것이 완벽하게 소진된 죽음의 근방에서 언 듯 언 듯 비추는 실재의 잔영만을 감지한 채 시간의 타자로 소거된다. 아무리 궁리를 해도 어찌 해볼 도리 없는 아포리아가 실재를 에워싸고 있는 까닭에 우리는 진리의 실재를 그저 어렴풋이 밑그림을 뿌옇게 그린 채 시간의 저편으로 한 발 내딛고 있을 따름이다.

그들의 표류 앞에 나의 유랑은 덧없고
그들의 환멸 앞에 나의 환영은 부끄럽기만 한 것
―「아홉번째 파도」일부

어쩌면 라캉이나 지젝이 말한 것처럼, 생명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실재와 절대로 접촉할 수 없거나 상상계적 소타자로 존재한 채 실재의 왜곡된 모습만 환상 속에 응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삶과 죽음을 가르는 분할면 위에 실재가 존재하는 한, 한평생 떠도는 생은 의미 없는 “유랑”이고, 생 내부에 기입된 모든 의미의 체계는 뜯겨지고 파열한 채 산산이 조각나 미망의 덫 속으로 사라진다. 죽는다. “波高”에 떠밀려 죽고, 소외된 노동에 의해 투신해 죽는다. 실재 앞에 모든 의미의 체계가 죽음으로 표상되는 한, 혹은 죽음만이 냉혹한 실재와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것으로 인지되는 한, 생명에의 형식은 실재와 만남을 한없이 차연시키는 것이 최선일지도 모른다. 역으로 죽음만이 실재를 인지하고 통찰한다고 가정되는 한, 우리는 그 실재의 참모습을 영원히 발화시키지 못한다. 그저 실재를 아포리아에 응고시킨 채, 차이와 반복이라는 혹은 동일성과 비동일성이라는 아포리아의 귀환한 채, 영원의 끝자락으로 내달리고 있을 따름이다.  

2) 삐딱한 시선 혹은 완성을 위한 말의 노마드
“실체”나 “실재”(「자서」중)를 찾아 떠나는 사유의 여정을 언어로 발화시키는 것은 가능한가? 사실 실체나 실재에 관한 사유가 “몽상”(「배웃음」중)이나 “말의 풍경”(「벤자민.J.창문」중)을 통해서 논파되어질 수 없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일 때, 삐딱한 시선이나 말의 노마드를 통해서 실재의 의미를 정확하게 지시할 수 있는가? 실재와 말 사이에 결코 봉합이 불가능한 균열이 자리하고 있을 때, 시말은 말의 완성을 통해서 실재의 어떠한 면모를 드러내 보여주는가? 사실 이 지점이 중요한데, 그것은 바로 금번 상재한 권정일 시인의 양들이 저녁이 왔다의 시적 정체성이 고스란히 노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삐딱한 시선점 위에 말의 가능한 축조술이 총체적으로 노정되어 있는 것처럼, 시인은 자신에게 속한 말의 잠재적 역량을 삐딱한 일탈의 시선 위에 응결시켜 실재와 현상 사이의 의미적 거리를 가늠하고 있다. 때론 “웃음의 길”(「작약감정」중) 위를 “라온제나”(「배웃음」중) 라온제나 외치며 생의 황홀한 순간들을 투명하게 채색하면서, 때론 “거추장스런 문법의 외투”(「화법」중)를 완벽하게 벗어던진 채 말의 날것들과 극적으로 조우하면서, 시인은 자신에게 속한 시말 내부에 “열애의 빛”(「혼인비행」중)을 찬란하게 채색하고 있다. 말을 사랑하는 시인, 말의 잠재적 가능성을 다양하게 실험하는 시인, 그것이 바로 권정일의 참모습이자, 양들의 저녁이 왔다의 시적 정체성이라 하겠다.

선사시대를 지나 르네상스를 지나 조선을 지나 강점기의 악수를 지나 애이불비, 애이불비 옷고름을 지나 흑백을 지나 칼라를 지나 오 오, 미니스커트의 포옹을 지나 전쟁을 지나 평화를 지나 나르시시즘을 지나 금기를 깬 웃음과 금기의 울음을 지나 꽃과 구름과 새를 지나 유토피아를 지나 점점 번져 검은 음각이 키운 시각(視覺)
―「그늘의 기원」일부

니체(걸어온다) 파이프를 문 하이데거(앉아있다) 나는 루쉰과 중국을(동행한다) 맑스 (혁명을한다) 화요일이었던 남자 모리씨(연애를한다) 알랭 드 보통(불안을집필중이다) 촌철살인의 시인들(턱을괴고) 삐딱하게 정말 삐딱하게… 일제히 쏟아져 나오는 불립문자들
―「내 방 주위의 여행」일부

말은 “충동”(「팝콘 효과」중)적이지만, 늘 “근원”(「4B 연필을 깎다」중)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다. 불가능한 “파란 꿈”(「블루 로즈」중)이 꾸어진다. 이를테면 권정일 시인이 갈망한 완성에의 꿈은 “모순을 편애”(「까마귀의 시간」중)하는 말의 운동이자, 말을 노마드로 산종시키는 말의 신기원에 대한 열망이다. 설령 “시 한 편의 가격”(「완전한 책」중)이 120원 가량으로 평가되지만, 따라서 자본의 이념의 최고조에 달한 후기산업사회에 시적 가치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시인은 자신에게 속한 시의 역량을 쏟아 부어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완전한 책”을 완성시키기를 열망하고 있다. 말이 세계를 주유하고, 시선의 움직임 위에서 시간이 매개된다. 말하자면 시인에게 “시각視覺”은 시간의 서사가 기입된 통시의 역사성을 관통하는 이 세계의 표정이자, 현대성을 관통하는 언어의 “건축”술에 다름 아니다. “다육의 시간”(「입술의 원근법」중)을 원근법적 시선으로 포착하여 혹은 “우연과 필연”(「완전한 책」중)이 직조하는 “최초의 문장”(「2월」중)을 시말로 고양시키면서, 시인은 자신의 고유한 언어의 “리듬”(「휴일」중)을 시말 속에 응고시켜 완전한 책을 완성시켜가고 있다.
그러나 시인의 시선은 불온하고 삐딱하다. 아니 권정일이 펼쳐낸 시말의 전모는 최대한 새로움을 말과 말 사이에 이접이나 연접의 방식으로 노마드를 시키되, 그것을 “뜨거운 진실”(「완전한 책」중)로 구조화시키는 것이라 하겠다. 최대한 삐딱하게 이 세계를 응시하지만, 그 삐딱한 시선은 언제나 실재나 실체에 이르는 언어의 축조술로 휘어진 순정한 언어의식이다. 때론 “幻”(「그 복도 이야기」중)이 만들어내는 “인간들의 진열장”을 집요하게 응시하면서, 때론 “불립문자”에 새겨진 인간학적 진법을 괄호 속에 우겨넣으면서, 시인은 이 세계의 다양한 표정들을 시말 속에 응고시키고 있다. 마치 “니체”에서 출발해 “알랭 드 보통”을 경유해 시인에게 이르는 사유의 도정은 “불안”과 “연애”와 “혁명”이 벌어지는 전위의 운동이자, 이 세계를 새롭게 구획 짓는 강렬한 역사의 운동이다. 말하자면 권정일 시인에게 삐딱한 시선은 지젝의 징환에 휩싸인 채 삐딱하게 보는 상상계적인 소타자의 태도가 아니라, 진리의 가능적 조건을 새로운 시선으로 응결시킨 완전한 책에의 열망이라 하겠다. “아갈마”의 “푸른 섬광”(「별의 기슭」중) 같은 이성과 굉기를 시말 속에 매개시키면서 “순수한 모순”으로 존재하는 실재의 정체를 시말로 압박하고 있다. 왜냐하면 시인에게 언어가 지시하는 “희망”의 체계는 이 세계에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실재를 완벽하게 묘사해내는 데 있기 때문이다.  

나의 문장은 슬픔의 탁란이었고
종이의 문장은 흰 유목이었다
―「종이의 유목」일부

*…… 이 책 그리고 이 책 너머에는 운명의 바퀴와 픽션과 논픽션의 땅이 있고 하늘이 있고 바다가 있고 음악이 있다. 거기에는 시인과 우화작가와 신화와 신화 아닌 설화들이 살고 있다.
―「완전한 책」일부

말의 노마드는 밝고 투명한 창조적 몽상만으로 구조화되어 있지 않다. 말의 노마드는 화려한 “화해의 색”(「토마토」중) 옆면에 항상 “죽음의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황홀한 이야기”(「문의 분위기」중)를 흩뿌려놓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운명적 서사와 시인의 슬픔 사이에 놓인 금기의 언어를 “종이”에 써내려가는 행위라 하겠다. 말의 유목은 시인의 시선이 이동하는 의식의 지점이자, 이 세계의 다양한 서사와 극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아주 강렬한 순간이다. 종이에 “슬픔”이 매개되고 하염없이 “눈”이 내린다. 어쩌면 권정일 시인에게 종이는 “마음의 심금”(「완전한 책」중)을 울리는 인간학의 공명판인지도 모른다. 종이의 말을 받아 적는 시인. 종이 위에 노마드로 표류하는 인간학의 문양들을 기입하는 시인. 종이의 말은 “하얀 독”으로 표상되는데, 그것은 아버지에게로 향하는 아픈 사랑의 슬픔이다. 미처 말하지 못했던 운명의 전언이 종이 위에 하나의 “문장”으로 발화되고, 그것이 문득 “슬픔의 탁란”이라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시인에게 말의 노마드는 단순하게 실재와 만남을 시도하는 앎에의 의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승화시키는 지난한 행로와 정확하게 대응된다. 말의 행로는 삶이 만들어내는 오욕칠정의 행로이자, 그 감각의 세계를 승화시키는 시인만의 독특한 언어의 전술이다. 술에 늘 취해 있던 아버지의 모습이 종이 위에 말의 행로 사이사이에 반조된다. 
어쩌면 완전한 책은 완성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완전에의 열망이 강렬하면 할수록 꼭 그만큼의 강도로 말은 모순어법에 휩싸인 채 완전을 불완전으로 기술하게 된다. 시인에게 말은 운명의 서사이고, 노마드는 필연이다. 말이 운명처럼 구조화되어 있는 한, 말은 아포리아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한 채 실재 근방만을 배회할 따름이다. 따라서 완전한 책은 불완전한 책으로 승화된다. 불완전을 불완전으로 기술하는데 가장 완전한 책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권정일 시인의 완전한 책에의 열망은 불완전한 서사로 휘어져 인간과 세계의 의미를 끊임없이 노마드로 표류하는 말의 순정한 운동으로 승화되어 실재의 근방에 시말을 위치시키게 된다. 따라서 모든 말은 시인의 「자서」에서 의도했던 실체나 실재를 완벽하게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환청”(「노릇」중) 같은 환상에 붙들린 진실의 언저리를 종이 위에 기입하게 된다. “운명의 바퀴”가 시간이 아닌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가 “신화”와 “설화”를 이 세계에 흩뿌린다. 완전을 열망하는 신화, 완전을 개연성으로 승화시킨 설화만이 완전한 책의 이념에 접근하게 된다. 말하자면 완전은 실재처럼 불완전한 것으로 드러나거나, “무한대(∞)로 분열”하여 파편으로 조각조각 흩어져 있을 뿐이다. 그저 삐딱한 시선으로 실재의 위치를 가늠하면서, 종이 위에 실재의 조각들을 몽타주로 재배치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오늘이 조금 더 노랗게 피는 형식을
내일이 조금 더 노랗게 지는 형식을
완성한다
―「양들의 저녁이 왔다」일부

완전한 책은 “형식”이지 내용으로 결코 완성될 수 없다. 형식은 자유이고, 실재는 억압이다. 따라서 실재를 찾아 떠나는 말의 여정 전체가 노마드로 리좀으로 증식 분열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이다. 오묘한 “먹이사슬의 자유”(「축제」중)가 억압으로 구현되고, 정교하게 운행되는 자연이 “비구상의 자연”(「완전한 책」중)으로 코드변환된다. 형식은 “불과 춤과 기도와 죽음” 사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여러 生이 접힌 서랍 속의 설화”(「완전한 책」중)을 “슬픔의 자장”(「발화」중)으로 발화시킨다. 형식은 완성의 조건이자, 완전한 책을 기획하는 실재의 작용이다. 마치 “밀봉했던 소원”(「간빙기」중)이 형식으로 완성되어 양들의 저녁이 왔다로 탄생하였듯이, 권정일 시인이 행한 일련의 시말운동은 양의 비극적 생에의 형식을 언어의 형식으로 위무하면서, 말의 심연에 실재의 참모습을 다양한 방식으로 부조시키고 있다. 때론 인간과 세계 사이에서 벌어지는 그 모든 서사의 층위를 삐딱한 시선으로 응시하면서, 때론 생의 서사 내부를 관통하는 슬픔과 기쁨을 상호 상면시키면서, 시인은 말의 역동적인 운동을 다양한 형식으로 완성시켜가고 있다.

*김석준 : 충남 아산 출생. 1999년 ≪시와시학≫(시), 2001년 ≪시안≫(평론)으로 등단. 시집 기침소리. 평론집 비평의 예술적 지평, 현대성과 시, 감히 시인에게 말을 걸다, 무덤 속의 시말, 의미의 곡면. 미네르바 작품상(평론) 수상.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