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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신작시/안영미/이모티콘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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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신작시/안영미/이모티콘 외 1편
안영미
이모티콘 외 1편
지난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표정이 표정을 삭제하고 따라왔던 걸까
감탄사가 감탄 없이 자라고 있었어
꼭 답장할 필요는 없었는데
웃고 있지만 앙다문 입이 보여
가면 안쪽의 쓸모는 잊어버려
아침 8시, 네가 없는 침대 위
나의 표정은 너무나 잘 알고 있잖아
오늘은 손이 바빠지고
기도가 난무하는 일요일일 뿐이야
요리와 기도 뒤에 그림자가 잔뜩 슬어 있어
숨길 수 있는 비열함의 시작과 끝이 궁금해
상태와 기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웃고 싶을 땐 우는 가면을 ,
울고 싶을 땐 화난 가면을 쓰면 되니까
조롱이 혀끝에 걸렸어
말들이 테두리를 치고 있어
유쾌한 가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얼굴을 닮은
원시적인 표정을 보여줘
단순한건 언제나 처음에 가까우니까
누구를 위한 건지도 모를
근심은 다운로드 할 필요가 없어
삭제조차 낭비야
연민은 간명하니까
휴지통이 삼킨 말들 앞에서
이젠 수신 거부할 순간이야
보유한 표정은 많지 않아도
대답은 매번 하나로 귀결되니까
자학을 위한 감탄사는 늘 넘쳐나니까
믿거나 말거나 마지막 터치는 늘 유보할 거야
용서는 끝까지 나만의 것이니까
메멘토모리*
오래된 집 처마 밑
거미줄에 허공 한쪽이 붙잡혀 있다
꽃등에가 붙어 발버둥친다
여기 살다 간 늙은 영혼을 알고 있었다면
조금만 더 거미줄은 조심했어야 했다
허공은 언제나 너머의 투명을 품는다
유리에 부딪혀 죽은 새들과
거울에 갇혀 죽은 나의 표정과
명품점 쇼윈도 앞에서 붐비던 나의 치욕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너머의 세계가 도처에 깔려있다
그저 날개가 원하는 것은
위험조차 느낄 수 없는 허공 바깥이다
그러니 허공이 깃털처럼 가볍다는 말은 금지다
나비잠을 겨우 붙들고 할딱거리고 있는 어린 꽃등에의 호흡은
끝까지 힘겨워야 하는가
들깨 구슬 같은 눈으로 말하는 허공의 기척과
첫 날갯짓이 맞물려 있는 시간
기도는 하늘을 향하지 말고 새근거리는 체온을 붙잡아야 한다
너머의 허공이 흔들리고
내 눈동자도 따라서 흔들린다
어른거리는 꽃등에 앞
거미의 집요한 입이 오늘을 삼키려다
꽃등에와 함께 툭 떨어진다
신이 소리친다
메멘토모리 메멘토모리
꽃등에 날개에 붙은 거미줄을 걷어낸다
피식, 우주 하나 펼쳐진다
*‘죽음을 생각하라’, ‘죽음을 잊지 마라’라고 하는 의미의 경구驚句.
*안영미 2019년 《열린시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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