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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신인상(시)/고영숙/당선작 나를 낳아주세요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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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신인상(시)/고영숙/당선작 나를 낳아주세요 외 4편
고영숙
나를 낳아주세요 외 4편
오늘도 엄마를 뽑고 있어
구석에 기대 쉬는 엄마는 뽑기가 쉬워 오늘은 팔뚝이 굵은 엄마를 뽑고 내일은 다크서클을 드리운 엄마를 뽑을 거야 눈썹 문신을 한 엄마도 있어 세상엔 거짓말처럼 웃고 있는 엄마들이 수없이 많아 엄마는 팔딱이는 소문들로 요리를 하지 가끔 지루해진 소문을 한 번 더 끓이면 엄마 냄새가 나지 나는 길쭉하게 자라고 있어 날마다 내 생일이야 매일 나를 낳아줄 엄마가 필요해 갈색 골목에 레드카펫을 깔고 모든 저녁을 기다리는 엄마 떨리는 손목으로 꽃잎을 뿌리며 우아하게 걸어가고 있어 반값으로 할인된 엄마도 갓 인화한 증명사진을 들고 전속력으로 달려가던 엄마도 두근두근 증후군을 앓고 있어 일류도 지나고 나면 가볍고 간단히 오류가 되어 버리는 세상 어제는 건너편 마트에서 엄마를 세일하고 겨울 언덕바지에 떨어지는 음악은 항상 슬로모션으로 녹았다 얼기를 반복해 유통기한이 줄어들수록 손때 묻은 엄마들이 하나씩 늘어나고 있어
내일 아침은 엄마가 또 나를 낳을 거야
인공눈물
너, 내 안에서 시작하는 물살이라면
나비처럼 맨발로 모래언덕으로 걸어간다면
울컥할 때마다 조금씩 포개어보는 한날한시
뛰어내려 허공에서 어긋난다면
바람이 아슬아슬하게 나를 비껴간다면
한때 어슬렁거리던 밀물과 썰물처럼
눈 밖의 물비늘들이 나뒹구는 투명한 무덤
소용돌이치는 눈빛이 눈시울을 건너는 중이라면
솟구치는 것, 곤두박질치는 것, 뭉개어지는 이목구비는
혀끝에 매달린 말들
뚝 뚝 떨어지는 기척,
퇴화하기 전 눈물 한 방울이 사구에 닿는 거리
한 치 앞에 엇갈린 수평선을 걸어 두고
글썽거리는 짐승 한 마리 물살을 견디는 중이라면
일정한 방향으로 출렁거리는 속설이
멀리 벗어나지 못한 물의 발목을 잡는다면
끌어당겼다 살짝 떨어뜨린다
능숙하게 티끌을 훑어 내리는 흔적이라면
수만 갈래로 휘청거리는 해일이라면
마지막 분리해서 버리는
일회용 파도가 섬을 만든다면
눈물은 절벽을 흐르고 떨어져 내려
나비처럼 사뿐히 날아 눈가에 맺히는
둥둥둥 떠가는 인공섬이라면
인공의 눈물이라면
물의 무용담武勇談
―취업을 준비하는 k에게
물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그런 날
천리天理를 보고 물때를 아는 사나운 짐승들이
세상의 밤을 여닫는다지
거친 물살을 들이받지도 날아오르지도 못하고
독기 바짝 오른 물소리를 가산점으로
흐르는 물처럼 사는 게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입을 벌리며 휘몰아치는 빙산들
신이 없는 것을 아는 종족들은
밤마다 이빨이 길어진다지
흰 뼛조각 위로 모여드는 비린내
포말이 이는 눈꺼풀에 접안한 한 잔 두 잔
파닥거리는 비정규직 이력서에 파문이 일고
삼키지도 못한 채 서로 뒤엉키며
급물살을 타는 물살의 울음소리
검푸른 가계家系를 떠받들던 몸의 경계,
한사코 벼랑으로 흐르던 표정을 건져내고
비틀거려도 겨루어 보고 싶은 그대들의 신이고자
아슬아슬하게 물의 무늬를 찢고 걸어 나오는
한때 웅덩이 밖 끓어 넘치던 쇳물, 그 환호성
열 개의 손톱이 행간을 빠져나가는 쓰나미
유빙流氷의 경전을 통과한다
겨를
시간을 기록하는 톱니바퀴
비탈길을 올라온 발바닥이 조심조심 오늘의 패를 뗀다
다른 데로 돌릴 수 있을까
검은 나뭇잎을 뒤집으면 낯선 이름으로 새겨지는 풍속風速
창끝에 깊게 찔릴수록 보이지 않는 배후
낯선 도형의 냄새가 난다
밤의 잎들이 흘리는 검은 눈물이 아득한 극점을 돌고 돈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어둠
숨죽이고 사라지는 미래
빛나는 술잔을 들고 가장 높은 곳에서 펄럭이는 슬픔
오늘 하루 신神의 운명을 가로질러 온 검은 형상
내가 믿는 건 길게 드리운 창끝
당신은 스페이드 에이스 카드 안의 섬광
톱니와 톱니 사이에서 잠깐 머무는 겨를
마블링의 쓸모
죽은 사람과 살아있는 사람이 반씩 섞여 있다.
눈물이 나는 대리석 무늬 균일한 감정은 오래된 성역,
한 번 맛본 식감을 맹신하는 입, 가장 슬펐을 때 붉어지는 기억,
사방에서 밀려드는 낯선 체온,
오빠를 하늘로 날려 보내고 퍽퍽한 슬픔만 골라 먹는 엄마
선명할수록 걸쭉해지는 통증들
신神을 바라다 본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
잘 지내고 있는지, 매일 아침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앞뒷면이 같은 통증
│심사평│
폭넓은 시적 탐색과 언어를 다루는 감각 뛰어나
시를 다른 장르와 구별할 수 있는 기본적인 3요소를 추리라면, 비유trope, 이미지image, 상상력imagination을 꼽겠다. 현상이나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진술하는 것이 설說,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논論이라 하는데, 이는 대상(현상)을 직설하는 글이 된다. 반면에 시는 대상(형상)을 직설하지 않는다. 그것이 비유의 시작이다. 이러한 비유는 이미지로 발현되어야 하고, 이미지는 상상력을 통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이 세 요소는 시에서 불가분리의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여기에 시적 의미(주제)의 깊이가 있으면 또 다른 맛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고영숙의 시 「나를 낳아주세요」 외 4편의 시를 소개하는 마음이 즐겁다. 앞서 말한 세 요소에 한 가지가 더해진 그의 시들을 읽다 보면 녹록지 않은 습작의 이력을 짐작하게 한다. 시적인 상상력이 돋보일 뿐만 아니라, 언어를 부리는 부분에서도 다양한 감각을 활용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인형 뽑기에서 시적 이미지를 원용한 「나를 낳아주세요」와 오빠의 죽음을 자아의 죽음으로 인식하고 절망적 삶을 사는 어머니의 삶을 그린 「마블링의 쓸모」는 엄마에 대한 강렬한 애정과 연민이 담겨 있다. 험한 세상의 소용돌이를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 청년의 통증을 그린 「물의 무용담武勇談」은 시인의 현실문제를 대하는 태도를 짐작하게 한다. 「인공눈물」과 「겨를」에서는 자아의 내면을 깊이 있게 탐구하는 시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소개하는 다섯 편 이외의 시편들에서는 시적 소재나 내용도 가족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취업문제를 비롯한 사회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도 살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대부분 시편의 성취가 고르다는 것 또한 심사하는 이들을 안도하게 했다는 점도 고영숙을 신인으로 선보이는 이유다.
/심사위원 백인덕, 남태식, 장종권(글)
│수상소감│
나는 운이 좋았다. 종종 마음 약한 신화神話를 만났으나
내 안의 신神은 좀처럼 일어서는 법이 없었다. 빛이 닿지 않는 웅크린 절벽 앞에 얇아진 실핏줄을 한껏 세워보지만, 번번이 무릎을 꿇었다. 신이 풀어놓은 가파른 두루마리마다 밤새워 받아 적던 일그러진 문장들, 운명처럼 나를 조이는 건 관습이었다.
오랫동안 엎드린 시간이었다. 신의 그림자는 슬픈 기원이라 믿었다. 홀로 던져져 흐릿한 신전의 기둥마다 새겨놓던 노역의 문장들, 막막하게 신의 뒷모습을 숭배했던 시간들이 숨죽이며 출렁인다.
치열하게 신에게 다가서지도 못했다. 목숨 거는 방법도 몰랐다. 막막하게, 뿌리 내리지 못한 채 허공을 바라보는 나를 믿고 기다려준 다층동인들, 또 다른 나의 신화들에게 가슴으로 특별한 고마움을 대신한다. 당신들이 펼쳐보는 나의 미래는 푸른 시절이었으면 좋겠다. 시에 기대어 살아온 나의 한때가 남루해도 내일은 조금 더 나은 모습으로 답했으면 좋겠다.
부족한 내가 당신의 이름을 가졌다. 더 늦기 전에 당신들을 만나서 다행이다. 고개 숙여 깊이 감사드린다. 조금은 더디어도 끝까지 살아남겠다. 어떻게든 잡아야겠다. 쏟아지는 빛살 속에 퍼져나오는 아련한 색채를.
시로 맺은 인연, 모든 당신들이 참으로 눈부시다. 살아서 파닥이는 푸른 신화이기를, 이 다음도 당신들과 함께이기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길을 열어 맞아주신 리토피아 가족들께도 감사의 인사 올린다.
/고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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