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77호/미니서사/김혜정/봄이 오면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1
댓글 0건 조회 313회 작성일 22-12-30 15:46

본문

77호/미니서사/김혜정/봄이 오면 


김혜정 소설가


봄이오면



나는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바람이 제법 날카롭고 군데군데 눈이 얼어붙어 있었다. 돔형의 간이무대 뒤로 그늘진 곳에는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잠시 후 그녀가 나왔다. 한자복 위에 연보라색 카디건을 걸치고 감색 캔버스화를 신은 차림이었다. 간병인은 흰색 슬리퍼를 신고 성큼성큼 잔디밭을 가로질러왔고, 그 뒤로 천천히 그녀가 따라왔다. 그녀는 간병인의 말처럼 기운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얼굴은 이전보다 훨씬 수척하고 머리칼도 푸석푸석했다. 사고가 나기 전의 그녀라고는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천천히 얘기 나누세요. 하지만 너무 오래는 안 돼요. 면회 시간이 길면 길수록 환자가 적응하는 시간도 그만큼 길어지니까요.”

예,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병인이 사라지는 것을 그녀와 나는 가만히 눈으로 뒤쫓고 있었다. 간병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녀가 내 옆에 앉았다. 

“몸은 괜찮아? 운동은 꾸준히 하고?”

응, 하고 대답하고는 그녀는 운동화 앞코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새 한 마리가 나뭇가지에서 날아올랐다.

“우리가 여행할 돈은 충분히 마련했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여기를 나가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야.”

“말도 안 돼. 내가 그 돈을 마련하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조금 전에 새가 날아갔던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굵은 가지 사이에 구름이 걸려 있었다.  

“이 세계에 출구 같은 건 어디에도 없어. 내가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는 한.”

“내가 옆에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그녀는 운동화 뒷굽으로 땅 위에 원을 그렸다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 모르겠어. 나는 옳고 그름을 비교해볼 수 있는 척도가 되는 기억이라는 것을 빼앗겨버렸잖아.”

“네가 혼란스러워한다는 건 잘 알아. 하지만 우린 이겨낼 수 있을 거야.”

“안전한 세상 같은 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아. 하지만 여긴 비교적 안전해.”

그녀는 손이 시려운지 손을 호호 불고 무릎 위에 놓고 비벼대더니 카디건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넌 다만 일시적으로 기억을 잃고 마음을 앓고 있을 뿐이야. 이곳은 너에게 맞지 않아.”

“아니, 우리가 함께 있으면 둘 다 망가져버리고 말 거야. 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알고 싶지 않아. 나는 이미 내 자신을 잃어버렸어.”

“너는 너를 잃어버린 게 아니야. 단지 기억이 네 안에 숨어있을 뿐이야. 하지만 기억이 숨어 있다고 해도, 네 마음은 그대로야. 넌 나를 기억하고 있잖아. 그게 너야.”

다만 그것뿐이라고 중얼거린 뒤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머리 위에서 햇살이 소리 없이 빛나고 있었다.  

“네 마음은 지금 네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어. 누구도 네게서 마음을 빼앗을 수 없을 거야.”

그녀는 젖은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간병인이 팔을 휘휘 저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면회 시간이 지난 것이다.

“간병인은 우리가 만나면 무슨 일이 있지 않을까 의심해. 간병인이 물으면, 나랑 마음이 잘 안 맞아서 아무 얘기도 못한 것처럼 해.”


“어땠어요? 오랜만에 만나서 즐거웠나요?”

간병인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나는 말하고 고개를 저었다.

“겨울이니까요. 봄이 오면 나아질 거예요.” 

“정말 그럴까요?”

“당연하죠. 봄은 그런 계절이잖아요. 죽었던 꽃들이 피어나는.” 





*김혜정 199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비디오가게 남자」 당선. 소설집 『복어가 배를 부풀리는 까닭은』, 『바람의 집』, 『수상한 이웃』, 『영혼 박물관』. 장편소설 『달의 문門』, 『독립명랑소녀』. 간행물윤리위원회(우수청소년 저작상) 수상. 송순문학상 수상.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