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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책·크리틱/신종호/이것이 농담 같나요? ―김보숙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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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책·크리틱/신종호/이것이 농담 같나요? ―김보숙의 시
신종호 시인
이것이 농담 같나요? ―김보숙의 시
1. 불편의 접점
‘서평書評’은 늘 조심스럽다. ‘평評’이란 것이 좋고 나쁨, 잘하고 못함, 옳고 그름의 판단을 논하는 주관적 형식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한 조심의 등背에 텍스트 해석의 논거와 기준이 적절한지를 묻는 자기검열의 무의식적 부담이 짐처럼 얹히게 되면 조심스러움은 급기야 소심함이 되기도 한다. 속칭 주례사 비평이라 일컬어지는 글들의 면면은 해석의 소심함이자 관계의 조화만을 드러내려는 편리한 타협일진대 이러한 편리의 유혹(?)을 애초부터 차단시켜 서평의 본래면목에 집중케 하는 경우가 있다. 서평을 해야 할 작품의 메시지 혹은 저자가 드러내는 세계관이 아주 강렬해서 ‘평評’이라는 행위에 수반되는 주관적적 판단의 완고頑固함이나 해석의 편의를 뒷전에 물러앉게 만들 때 그렇다.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들은 내가 이해하는 세계와 저자가 이해하는 세계가 어떻게 상충하고 교섭하는지를 먼저 묻게 만든다. 그런 물음들은 대개 진실의 실체에 대한 이해와 맞닿아 있으며, 그것들은 불편의 접점을 만들어낸다. 불편하지만 불편의 이면을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은 평자나 독자들로 하여금 은폐된 세계의 본질과 마주하도록 강요한다. 김보숙 시인의 시집 『절름발이 고양이 튀튀』에 실린 시편들이 그렇다. 첫 페이지에 실린 ‘시인의 말’부터 마지막에 실린 시 「호랑이 연고」의 “남의 집 소포를 찢을 수 없어 나는 한 번 더 울었다.”는 마지막 문장까지 세계의 추함과 실존의 고통을 격정적인 어조로 서사화한 산문시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한 산문시들은 자신의 몸에 각인되고 기록된 ‘고통에 관한 보고서’(「변신byeonsin」)이자 가족과 이웃 그리고 사회가 여성들에게 강제強制한 ‘검붉은 내력’(「낭만적 엔딩에 관하여」)을 담고 있는데, 그 내용의 면면이 독자들에게 당혹감을 주는 경우가 많다. 그 당혹감은 “얘야, 지금 나는 나의 더러움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는데, 너는 왜 큭큭 웃고만 있는 거니.”(「초코파이 사용설명서」)라는 표현에 담긴 ‘나’와 ‘너’, ‘더러움’과 ‘웃음’의 엇갈림처럼 시인의 진술과 그것을 수용하는 독자의 감성이 쉽게 접점을 찾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불일치는 시집 『절름발이 고양이 튀튀』에 나타난 ‘추’醜의 서사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2. 거짓말의 역설
김보숙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나는 거짓말로 시를 쓴다. 이 시집의 모든 시는 거짓말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러한 선언은 자신의 시에 나타난 추의 서사에 대한 자구책으로 읽혀진다. 자신의 모든 시가 거짓말이라는 시인의 표명은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라는 에피메니데스Epimenides의 ‘거짓말의 역설’을 떠올리게 한다. 에피메니데스는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 크레타의 예언자이자 시인이다. 에피메니데스의 명제가 참이라고 가정한다면, 크레타 출신인 자신도 거짓말쟁이가 되어야 하므로 모든 크레타인이 거짓말쟁이라는 그의 명제는 거짓이 된다. 반대로 명제가 거짓이라고 가정한다면, 적어도 ‘어떤’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가 아니게 되어 명제는 참이 된다. 사람들을 골치 아프게 만드는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은 사실을 말하면 거짓이 되고, 거짓을 말하면 거꾸로 참이 되는 곤혹의 사태를 지칭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시집의 모든 시는 거짓말이다.”는 진술도 그런 역설의 맥락에 닿아있다. 그 진술이 참일 경우 “이 시집의 모든 시는 거짓말이다.”는 진술은 거짓이 되고, 반대일 경우에는 참이 된다. 따라서 “이 시집의 모든 시는 거짓말이다.”는 진술은 참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다는 역설의 상황을 드러낸다. 김보숙 시인은 그런 역설의 곤혹을 오롯이 독자의 판단에 맡기면서 이 시집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모종의 압박(?)을 가한다. 이는 “네가 거짓말을 말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진실을 말한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역설의 전제를 독자들의 몫으로 과감히 내던진 셈이다. 의도했건 혹은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시인의 말에 내포된 역설의 논리는 자신의 경험을 사실이라고 강변剛辯하기보다 거짓이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감내했던 실존의 상황을 극화劇化하려는 시적 전략으로 활용한다. 문제는 그러한 전략에 따른 판단의 선택지들이 독자들에게는 편치 않다는 것이다. 그 편치 않음의 출처는 시인의 “나는 거짓말로 시를 쓴다.”는 역설의 이면에 내포된 개연성蓋然性에 있다. 이를테면,
생일이 지났다. 생리대가 없을 땐 신문지를 오려 팬티에 깔곤 했다. 뒤에 피 묻었어, 라는 말을 들은 뒤부터 난 뉴스를 믿지 않았다. 성기에서는 잉크 냄새가 났고, 신문지에서는 생리 냄새가 났다. 피 묻은 체육복 냄새를 맡느라 큰 아버지가 정신없을 때면, 큰 어머니는 내 머리에 대야를 씌워 놓고 저녁밥을 지었다. 우리 아드님들 포크를 들고 뛰어다니다 넘어지면 다쳐요, 차례를 지키셔야죠, 누구의 포크인지도 모르고 나는 찔렸다. 성기를 씻으면 나오는 구정물, 네 엄마를 닮아 예쁘구나, 미친 큰 아버지는 내 생일이면 좋다고 시를 지어서 낭송하였다.
-「사육사」 전문
라는 시 「사육사」의 내용에서 독자들은 모종의 불편함을 느낀다. 그 불편함은 시의 내용에 대한 태도, 즉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는 개연성의 세계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 불편의 개연적 감정을 향해 자신의 시적 진술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되묻는 절박함의 고백이 바로 “나는 거짓말로 시를 쓴다. 이 시집의 모든 시는 거짓말이다.”라는 시인의 말이며, 시집 『절름발이 고양이 튀튀』에 실린 시편들이 독자들의 판단을 향해 던지는 역설의 논리다. 생리대가 없어 신문지를 오려 착용하는 것이, 피 묻은 체육복 냄새를 맡는 큰아버지의 행동과 그것을 묵인한 채 자기 아들들의 안위만 걱정하는 큰어머니의 모습이 과연 사실일까? 이 물음에 담긴 곤혹의 감정을 누구도 회피할 수 없게 만드는 문제제기 방식이 시 「사육사」와 『절름발이 고양이 튀튀』에 실린 시편들의 서사적 전략이다. 아도르노Theodor Wiesengrund Adorno가 「추·미·기술의 카테고리」라는 논문에서 현대예술은 “추한 것으로서 저주받는 요인들을 자신의 문제로 삼아야 한다.”고 선언했던 것처럼 김보숙 시인의 시편들은 추醜의 서사를 통해 이 세계의 추함을 탄핵하고 고발한다. ‘미친 큰 아버지’로 표상된 추의 세계가 자신에게 가한 상처와 고통을 “성기를 씻으면 나오는 구정물” 등과 같은 추의 이미지들을 통해 맞받아치면서 은폐된 세계의 추를 노출시키는 시적 구도構圖가 시집 『절름발이 고양이 튀튀』에 실린 시편들의 일관된 흐름이다. 그러한 구도를 통해 가족과 사회를 감싸고 있는 도덕과 윤리의 허위를 적나라하게 파헤침으로써 이 세계의 추가 무엇인지, 그 세계에 의해 사육되고 있는 실존들이 겪어야 할 고통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자기고백의 형식을 통해 가감 없이 드러낸다. 따라서 우리는 김보숙 시인의 시에 드러난 사건들의 사실 여부를 묻기보다 이 세계를 감싸고 있는 추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3. 추醜의 서사
김보숙 시인의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지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는 개연성의 인식으로 불편의 서사를 자체적으로 순화한다. 나 또한 그런 경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문제는 불편의 수용 여부가 아니라 개연성의 태도에 내재된 우리들의 안일安逸함이다. 안일은 추를 은폐하는 심리적 기제機制로 작동한다.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는 것들 속에서 추의 실체는 공공연히 은닉된다. 그로 인해 공허한 아름다움과 실체 없는 행복의 서사가 난무하게 되고, 그러한 사태가 추의 세계를 더욱 공고히 하여 추의 악순환이 거듭된다. 독일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가 시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에서 자신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하는 힘은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이 아니라 “엉터리 화가에 대한 경악”이라고 말한 것은 누구도 추의 세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인식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엉터리 화가’로 비유된 히틀러에 대한 경악은 곧 추에 대한 경악이며, 그것은 추를 자각한 시인들로 하여금 서정시를 쓰기 힘들게 만드는 근본적 동인動因이다. 김보숙 시인의 시가 서정성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추의 세계를 고발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김보숙 시인은 자신의 추를 통해 이 세계의 추를 고발한다. 추를 고발하기 위해 자신의 추를 드러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코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의 추의 세계다. 김보숙 시인의 시에 나타난 추의 이미지들과 서사는 윤리적 차원에서 판단될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추에 대한 고발의 차원에서 수용되어야 한다. 따라서 추하고 불편한 이미지들로부터 우리가 읽어내야 할 것은 세계의 경악에 맞서는 용기勇氣의 서사일 것이다. 용기의 서사는 추를 추로써 고발하는 전복顚覆의 사유로 드러난다. 시집 『절름발이 고양이 튀튀』에 실린 많은 시편들에 드러난 추의 이미지, 특히 신체와 질병에 관련된 추의 서사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억압과 그로 인한 편견으로 고통 받는 실존의 모습, 특히 가부장적 권위 하에서 여성들이 겪는 억압을 강렬히 드러낸다는 것이 특징이다. 대표적인 예를 살펴보면,
며칠 전 통조림 속에 들어있던/말 못할 부위를 먹은 이후로,/나는 말 못할 부위가 조금씩 가려운 중이에요./말 못할 부위를 맘껏 긁고 싶은데/부엌에서 말 못할 부위를 긁으면 죄가 될까요./말 못할 부위를 긁은 손으로/당신의 식사를 준비하면 그것도 죄가 될까요. 돼지고기 핏물을 빼다가,/말 못할 부위를 긁다가,/쌀을 씻다가,/말 못할 부위의 피를 닦다가,/그만 손톱이 빠져버렸어요./그래서 말인데요./혹시 당신의 숟가락을 좀 빌릴 수 있을까요./죄가 되지 않는다면,/당신의 숟가락으로 말 못할 부위를 긁고 싶어요.
-「메트로니다졸」 부분
를 들 수 있다. 시 「메트로니다졸」은 당혹스런 인상을 준다. 시인이 전하려는 메시지보다 ‘말 못할 부위’, ‘긁은 손’, ‘핏물’ 등의 이미지가 환기하는 추의 감각성이 먼저 인식되기 때문에 그렇다. 신체의 염증은 단순한 질병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적으로 은유화되면 환자에 대한 도덕적 결함으로 확대된다. 질병의 은유는 일종의 폭력이다.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질병의 은유가 환자들에게 신체적 고통보다 더 큰 고통, 즉 환자를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어 수치심을 갖게 만든다고 설명한다. ‘말 못할 부위’를 먹어서 ‘말 못할 부위’에 염증이 생겼다는 것은 어떤 대상과의 접촉을 통해 전염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당신’의 ‘말 못할 부위’를 먹어 자신의 ‘말 못할 부위’에 염증이 생겼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화자가 호소하는 가려움증은 ‘당신’으로 표상된 전염원傳染源, 즉 ‘추’와 접촉해 얻어진 은유로서의 질병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자신을 전염시킨 ‘당신’에게 자신의 ‘말 못할 부위’를 ‘긁은 손’으로 ‘식사’를 준비하는 과정은 오염원汚染源에게 질병의 은유를 되돌려주는, 즉 추를 추로써 고발하는 전복顚覆의 사유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사유는 “부엌에서 말 못할 부위를 긁으면 죄가 될까요.”라는 물음과 “당신의 숟가락으로 말 못할 부위를 긁고 싶어요.”라는 의지의 표명으로 구체화된다. 손톱이 다 빠질 정도로 말 못할 부위를 긁어야만 하는 신체적 고통은 죄가 아니다. 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죄가 될까요?”라는 묻는 것은 질병을 은유화해 여성을 혐오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당신’의 은유적 폭력에 대한 반문이고, 가부장적 권위에 대한 도전이다. 하여, ‘당신의 숟가락’으로 ‘말 못할 부위’를 긁고 싶다는 것은 그 숟가락으로 밥을 먹어야 하는 ‘당신’에 대한 탄핵으로 읽혀진다. 즉 추를 추로서 탄핵하려는 의지의 발현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살펴 본 것처럼 김보숙 시인의 작품에 나타난 추의 서사는 가부장적 권위에 의해 고통 받는 여성들의 내력을 드러내는 바, 그 특징은 질병으로 은유화된 여성의 신체적 고통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큰구두광견병 엄마(「그해 가장 시시콜콜한 이야기」), 치매에 걸린 할머니(「파래지다」), 정신병원에 입원한 광식이 엄마(「목화문방구」), 매독에 걸린 경자 언니(「가족 같은」), 낙태를 하고 돌아오던 친구(「간단한 말」), 한쪽 눈을 잃은 여관 아줌마(「장미여관 203호」) 등등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여성들의 내력은 “여자의 허벅지를 찌르던 포크”(「아들들」)로 상징화된 남자들의 폭력에 기인한다. 그러한 폭력은 여성들의 두통(「구름의 뼈」), 구토(「제일병원」), 우울증(「마이보라」)을 유발한다.
4. 농담과 나쁜 상상력
김보숙 시인의 시에 나타난 현실은 추하다. 그 추함은 말 같지 않은 농담으로 성적 희롱과 폭력을 일삼는 남자들의 무책임한 세계와 관련이 있다. “언제 하자고 할지 몰라 마이보라를 못 끊는 나는 새한약국 아저씨가 서비스로 주는 박카스를 마시며 생각한다. 애인이 시에 써달라고 하던 박카스에 관한 농담을. 나는 박았스, 너는 박혔스, 시는 그러면 안 되니?”(「마이보라」)에 나타난 바처럼, 남자들의 농담은 여자를 ‘박혔스’의 존재로 희화화한다. 그런 남자들의 농담에 대해 시인은 “농담을 모르는 나는 이제 그만 농담이 물든 유니폼을 벗고 싶었어요. 농담이 물든 유니폼 안에서 파르르 웃고 있는 젖꼭지를 이제 그만 가여워하기로 했어요.”(「대화체 제목」)라는 인식을 통해 여성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을 찾으려는 의지를 내보인다. ‘박았스’의 표상된 남자들의 가학적加虐的 폭력을 거부하려는 의지는 시 쓰기에 대한 열망으로 표출된다. “시인하지 마세요. 시인은 시인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니 시인하지 마세요. 시인은 시인을 해야 하고 시인이 시인하고 나면 시인은 시인을 부정할 수 없으니 시인하지 마세요.”(「사랑은 신신홀에서」)라는 당부는 어떤 사실을 ‘시인是認’하지 않는 것이 시인詩人이 되는 것이라는 뜻으로 읽혀진다.
시인是認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남자들의 농담과 가학적 폭력이다. 더불어 ‘마이보라’를 끊지 못하는 여성들의 예속적隸屬的태도도 시인是認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시집 『절름발이 고양이 튀튀』에 내재된 김보숙 시인의 관점이라 여겨진다. 그렇다면 시인是認하지 않는 것, 즉 남성의 폭력과 세계의 추에 대한 부정否定의 정신은 어떻게 형성이 되는 것인가? 그에 대한 답은 “당신은 나쁜 상상력을 해본 적이 있나요?”(「제일병원」)라는 정도로 제시되고 있어 충분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시집 『절름발이 고양이 튀튀』가 여성들의 ‘검붉은 내력’과 ‘고통에 관한 보고서’에 충실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추의 서사를 통해 여성들의 실존적 고통을 충실하게 드러냈다는 점만으로도 김보숙 시인의 첫 시집은 독자들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것이 농담 같나요?”(「대화체 제목」)라는 시인의 반문反問은 서두에 언급했던 “나는 거짓말로 시를 쓴다. 이 시집의 모든 시는 거짓말이다.”라는 시인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농담’과 ‘거짓말’이라는 두 단어는 추와 서사와 고통의 내력을 견인하는 핵심 키워드라 할 수 있다. 농담일 수 없는 농담과 거짓말일 수 없는 거짓말로 첫 시집의 포문을 연 김보숙 시인의 다음 시집이 어떻게 ‘나쁜 상상력’으로 무장하고 나타날지 자못 기대가 된다.
*신종호 1997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사람의 바다』, 『모든 환대와 어떤 환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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