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77호/책·크리틱/문신/투명하게 빛나는 진실한 풍경들 ―황길엽 시집 『무심한 바람이 붉다』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1
댓글 0건 조회 316회 작성일 22-12-30 16:10

본문

77호/책·크리틱/문신/투명하게 빛나는 진실한 풍경들  ―황길엽 시집 『무심한 바람이 붉다』 


문신 시인


투명하게 빛나는 진실한 풍경들  ―황길엽 시집 『무심한 바람이 붉다』



서정시를 두고 ‘엿들어지는 독백’이라고 말한 사람은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이다. 그의 말에서 우리는 서정시가 비밀스러운 고백에 가까우며, 그때의 고백은 화자가 곧 청자가 되는 자기 고백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다가간다. 이를테면 서정시란 자기의 내밀한 비밀을 스스로 확인하고 인정하기 위한 독백에 가까운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서정시는 언어로 표현되어서는 안 되는 발화이며, 설사 언표되더라도 화자의 입에서 화자의 귀로 곧장 소비되어야 하는 발화여야 한다. 그러자 운 좋게도 우리는 화자의 입술을 떠난 고백을 엿듣는 행운을 종종 얻기도 한다.

이렇게 시 읽기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가 시인의 내밀한 독백/고백을 엿듣는 일이라고 한다면, 시를 쓰는 즐거움 또한 엿들려주고 싶은 욕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욕망의 밑바닥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기 확인의 순간이 가라앉아 있을 것이고, 시인은 시의 언어를 통해 그 ‘나’를 수면 위로 건져 올리고자 하는 어쩌지 못하는 몸부림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몸부림의 한쪽 끝에서 진땀 같은 한 편의 시가 비어져 나온다. 따라서 시는 엿들려주고 싶은 시인의 내밀한 욕망이 고백/독백의 형식으로 제출되는 자화상이 된다. 시를 읽는 일이 시인의 잠재된 자화상을 탐색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나아가 시인이 고백하는 자화상 속에서 독자는 억눌려있는 자신의 모습을 목격하기도 한다. 이렇게 화자(시인)와 청자(독자) 사이에 구축되는 ‘엿들어지는 독백’의 매카니즘이 서정시의 창조적 생명력을 낳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황길엽 시인의 시집 『무심한 바람이 붉다』는 독자의 내적 욕망을 향해 조준된 고백으로 읽힌다. 시인의 고백에 치명적으로 매혹당하는 일은 독자가 그의 독백을 얼마나 잘 엿들었느냐의 문제가 될 것이다. 독백은 발화되는 순간 쉽게 휘발하는 특성이 있고, 고백은 오독이라는 위장술에 능하기 때문이다. 다음 시에서 그 한 단면을 확인할 수 있다.


기억이라고 쓰고 기역이라고 읽는

지나간 날들이 기역 안에 있는지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시간



늘 뒷모습으로 멀어진다


산 능선에 걸쳐놓은 하늘빛

바다였을 거라 믿어버리는

기역 아닌 기억

풍덩 뛰어들었던 곳 

그곳의 시작은 

투명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맨발로 서서

조금씩 찍어놓았던 어제와 오늘

발밑으로 숭숭 줄지어 놓여있는

구멍 난 삶의 흔적들



기억에서 기역이라고 읽을 수 있음이 

다행이다 


-「기억과 기역」 전문


이 시에서는 ‘기억’이 발화되는 방식으로 ‘기역’의 문제를 제안하고 있다. ‘기억’이 발화되어야 하는 시인의 내적 자화상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발화되는 방식은 ‘기역’이라는 구체적인 언술이다. 이렇게 발화 내용과 발화 형식에 균열이 발생하는 것은 발화되어야 할 것의 발생 시점과 발화되는 시점 사이에 놓인 “투명한 시간” 때문이다. 시차의 문제가 개입함으로써 시인의 고백/독백은 오독의 가능성이 농후한 상태로 엿들어지는 것이다. 독자들은 시인이 고백하고 있는 “발밑으로 숭숭 줄지어 놓여있는/구멍 난 삶의 흔적들”을 엿들어야 하는데, 구멍이 나서 투명해져버린 삶은 때로는 ‘기억’되기보다는 억제할 수 없는 힘으로 ‘기역’되는 경우가 많다. 황길엽 시인은 우리의 삶이 ‘기억’이라는 기의(의미)로 규정되는 시대가 아니라, ‘기역’이라는 기표(기호) 위를 계속해서 미끄러져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을 지운 여자/웃는 모습은 슬프고/눈물 흘리면서도 웃는다”(「기억이 지워진 여자」)에서 보듯, 황길엽 시인의 기억은 웃음과 눈물의 반복적인 순환에 갇히게 된다.

황길엽 시인이 투명한 시간을 통해 삶의 의미를 유예해가는 방식은 그의 시적 방법론에도 적용되고 있다. 그가 “젖은 심장 안에/채웠다가 지워지는 것들/사월의 몸짓이다”(「흔들리는 사월」)라고 썼을 때, 채움과 비움, 유와 무, 존재와 부재 같은 대립되는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그는 발화의 순간으로부터 휘발되는 그 잠깐의 사이에 “사월의 몸짓”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대립의 쌍이 엄밀한 의미에서 대립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채움이란 비움의 부재 형식이고, 비움 또한 채움의 부재 형식으로 나타난다. 유와 무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서로를 내포하거나 함축하고 있는 대립 구조는―고백/독백이 자기 응시를 통한 자기 확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고백/독백의 형식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형식을 활용하여 황길엽 시인은 엿들려주기라는 서정시의 화법을 누구보다 감각적으로 잘 활용한다.

그렇다면 시인이 엿들려주는 것이면서 독자가 엿들어야 하는 고백/독백은 무엇을 조준하고 있는가? 미리 말하자면, 시를 포함한 모든 예술이 겨냥하는 지점은 진실의 폭로이다. 허구의 구조물인 예술이 진실을 향해 눈을 치켜뜨게 되는 아이러니가 시의 존재 이유이고, 아이러니가 탄생하는 지점에서 인간 삶의 진실이 목격된다.


잠시 정신을 내려놓고 

과거, 현재, 미래를 향한다

소녀는 삐뚤삐뚤 퍼지는 기억에 매달려

내장을 컴퓨터 화면에 걸어두고


깊은 잠 속에 갇혔다가 

잔잔한 바다를 유영해 보는

정박 중인 유람선으로 승선하고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던 여운을 붙잡는다


감았던 눈

무거운 무게로 짓누르는데

낯익은 목소리 꿈결인 듯 아련해


병실문은 사람들의 손에서 달랑거려

풀렸던 의식이 제자리를 찾는 동안

온몸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녔던 바람 

무기력하게 늘어졌던 육체

폐허 속에 내던져지고

다시 뜨거운 바람이 돈다


-「수면내시경」 전문


프로이트는 진실이 존재하는 좌표에 관해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던져준 바 있다. 플라톤이 이데아라는 외부 세계를 진실의 좌표로 지목한 것처럼, 우리는 오랫동안 진실을 미지의 세계에서 발견하고자 했다. 그럴 때 이데아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할 것으로 ‘믿어지는/믿어야 하는’ 세계였다. 그러나 이데아는 어느 곳에도 ‘존재할 수 없는/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와 다르지 않았다. 이데아의 세계나 유토피아의 세계는 본질적으로 진실의 세계가 될 수 없었다. 외부 세계에서 발생하는 진실의 불가능성을 새로운 관점에서 추적한 사람은 프로이트였다. 그는 인간 삶의 바깥으로 추방되었던 진실의 세계를 인간 삶의 내부로 돌려놓았다. 꿈과 무의식이야말로 인간의 욕망을 가장 진실하게 드러내는 계기로 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수면내시경」은 ‘수면’이라는 의식의 부재 상태와 ‘내시경’이라는 자기 응시의 방법이 결합하면서 자기 고백/독백을 위해 진실의 순간을 예비하고 있다. 이 순간에는 현실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다. 황길엽 시인이 현실 원리가 부재하는 진실의 순간으로 진입해가는 이유는 현실의 세계에는 “변덕스럽게 흔들어대는 욕망”(「가벼워지기」)이 작동하는 “미완성 인생”(「낮게 흐르는 노을 속으로」)의 세계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변덕과 미완의 삶은 고백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그가 “잠시 정신을 내려놓고” “깊은 잠 속에 갇혔다가” 깨어나는 일은 진실의 순간을 경험하는 일이며, 그럼으로써 그는 “무기력하게 늘어졌던 육체/폐허 속에 내던”질 수 있게 되었다. 그에게 ‘육체’의 세계는 변덕과 미완의 현실 세계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자기 응시 속에서 이 시는 “다시 뜨거운 바람이 돈다”는 각성된 순간에 도달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가 고백/독백의 지점까지 나아간 것은 아니다. 그에게 ‘다시’ 돌기 시작한 ‘뜨거운 바람’의 정체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은 아직 없다. 그러나 우리는 황길엽 시인이 ‘뜨거운 바람’을 통해 엿들려주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과 우리가 그것을 엿듣고 싶어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시집 『무심한 바람이 붉다』를 통해 황길엽 시인이 엿들려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시집 곳곳에 고백/독백하는 화자의 그림자를 숨겨두고 있다. 가령 “하얗게 머리 풀고 앉아 한생을 비우는 낯선 곳으로 흐르다 또 다른 길 만들어가는 가벼운 영혼으로 슬픈 눈동자 검게 그을린 외등으로 섰습니다”(「희미해지는」)라거나 “위태롭게 퍼질러 놓은 기억들//바람으로 지나가고//가끔씩 찾아오는 감기 같은//가슴에 생채기로 남은//잊히지 않을 만큼 그림자로 서성이는//등 굽은 동백나무 붉습니다”(「이방인」) 같은 시행을 통해 우리는 고백/독백하는 자가 얼마나 진실의 순간에 근접했는지 알 수 있다.

문제는 우리는 그의 고백/독백을 얼마나 충분하게 엿들었느냐이다. 시집 『무심한 바람이 붉다』를 읽어 가다 보면 “허공을 건너간 아득함으로 펼쳐진 진실”(「거짓」)과 마주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 우리의 “헛헛한 목에 뼈처럼 걸린 메마른 침묵”이 “높게 솟은 하늘 벽에/수천 개의 창을 열어젖히고/눈부시게 펼쳐놓은 풍경”(「풍경1」)을 만나기도 한다. 그 투명하게 빛나는 진실한 풍경 속에서 ‘가벼운 영혼’을 볼 수 있다면, ‘등 굽은 동백나무’를 그려낼 수 있다면, 우리는 황길엽 시인의 고백/독백을 제법 잘 엿들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황길엽 시인은 그의 시를 통해 독자들이 충분히 엿들을 수 있게 해준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만으로도 시집 『무심한 바람이 붉다』는 충분히 고백/독백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신 200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시), 201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문학평론) 당선. 시집 『물가죽 북』.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