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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집중조명/강순/신작시/기린의 에티켓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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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1
댓글 0건 조회 302회 작성일 22-12-30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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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집중조명/강순/신작시/기린의 에티켓 외 4편 


강순


기린의 에티켓 외 4편



당신과 만나 악수합니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나는 기린입니다)


당신이 다음 말을 찾을 때

나는 목을 더 늘이며 말합니다

(나는 새 초원을 찾고 있어요)


당신이 묻습니다

어떤 차를 시킬까요?

나는 앞 다리를 살짝 구부리며 웃습니다

(초원에는 풀들만 있는 게 아니네요)


당신이 묻습니다

어제는 연락이 안 되더군요

(나는 종일 빈 방에서 목을 늘였거든요)


당신이 또다시 묻습니다

요즘 하시는 일은 잘 되는지요?

(나는 요즘 새 초원을 구상하고 있어요)


당신이 말합니다

여기 커피가 맛있군요

(내 키가 좀 더 자라서 이제 당신이 덜 두렵습니다)


당신이 웃습니다

인상이 참 좋아 보이십니다

(긴 다리로 당신을 걷어찰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오늘 만나 뵈어서 참 좋았습니다

(당신이 나를 공격하면

나는 다리로 당신 머리통을 부술 것입니다)


당신이 돌아서서 사라져갑니다

다시 뵙기로 하지요

나는 숨긴 침묵으로 귓구멍을 쓱쓱 씻어냅니다


안녕히 가세요 다음에 또 뵈요

내가 사는 초원에는 

나처럼 목뼈가 일곱 개인 당신이 살고 있습니다





오늘의 처방전



어제는 몇 개의 목적어를 잃고 귀가했습니다 당신이 내 목적어 중 하나를 습득했다면 발견하는 대로 속히 연락 바랍니다


나는 어제 태풍 속 벽오동처럼 많이 흔들렸습니다 의사는 어려운 말들을 대롱대롱 가지에 늘어놓았습니다 가지가 바닥을 향해 출렁이자 줄기가 허공으로 크게 흔들렸습니다


오늘 내가 쓴 문장은 주어가 여러 개여서 당신도 내 문장들 속 주어가 되었습니다 햇살이 좋은 세 시쯤 당신이 내가 잃어버린 목적어들과 교합할 때 꽃잎이 잠시 반짝였습니다


나의 서술어들은 집으로 돌아와 쉬고 있습니다만 내일은 어떨지 잘 모르겠습니다 의사는 운동 요법도 함께 처방 내리며 경과를 보고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끝을 흐렸습니다 정직한 서술어는 종종 어간과 어미를 혼동하며 말끝이 밟히는 습관을 지녔습니다


한숨을 매단 느낌표가 나타나서 의사가 진단내린 문장을 자주 반복적으로 따라다녔습니다 나는 가구 위로 날아다니는 예민한 느낌표를 잡아다가 어제 저녁 과감하게 서랍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그 후 서랍 속에는 하루 세 번의 처방약을 먹고 말줄임표가 마구 자라납니다 침묵이 보약이 될지 몰라 누구의 전화도 받지 않을 예정입니다 많은 말들을 서랍에 구겨 넣었더니 오늘 밤 책상 위에는 나라는 단독 주어만 남았습니다


당신의 물음표가 한밤중에 침대에서 발견되어 허겁지겁 일기장에 잘 보관해 두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도 같은 일이 반복될 것 같아 만년필을 침대맡에 두었습니다 당신의 물음표는 색깔과 크기가 매번 달라집니다


그래도 오늘은 의사를 만나고 왔으니 안심입니다 내 증상에 대해 의사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왼쪽으로 이십삼 점 오 도 정도 기울이며 잃어버린 목적어를 빨리 찾아보라고 조언했습니다 의사는 지구의 자전축 각도만큼 해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내일은 바람과 꽃잎이 함께 쉴 수 있는 의자를 마당에 내놓을 생각입니다 당신의 물음표를 거기다 올려놓을 테니 나 몰래 언제든 다녀가시기 바랍니다 





시베리아행



밤을 문지르면 덜컹이는 기차가 어둠 속으로 달려간다 밤의 입구를 열어젖히고 밤의 중심을 향해 긴 몸을 출렁이는 것은 뼈가 두터운 어둠 둔중한 척추가 꿈틀거린다 밤의 중심에는 어둠의 제왕이 아직도 권좌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등의 껍질이 단단한 그것을 조금 만져본다 손끝에 닫는 어둠은 이빨이 날카롭다 물리면 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어둠 당신이 등 돌려 가버린 어둠 희미하게 떠오르다 캄캄하게 큰 아가리를 가진 어둠 단단한 몸통뼈로 위협하는 어둠 기차는 어둠의 중심 쪽으로 몸을 깊숙이 밀어넣는다 밤 속으로 미끄러지며 밤의 나신과 몸을 교합한다 신음이 어둠 속에서 새어나온다 


어제의 통증을 애써 찾지 않아도 되는 밤 바이칼 호수에 빠져 죽어도 되는 밤 당신의 얼굴을 기어이 떠올리는 밤 매달린 슬픔을 따 먹어도 되는 밤 밤이라는 말을 키웠다가 흔들어 떨구는 밤 슬픔을 주워서 구워먹고 싶은 밤 껍질을 깨부수고 싶은 밤 알맹이는 도망가고 가시만 남은 밤 배가 고파 당신 얼굴을 조금씩 파먹는 밤 벌레 먹은 당신 이름을 내던지는 밤 당신과 나의 길이 달라서 안도하는 밤 어둠이 기차를 한 좌석씩 삼키는 밤 당신이 어둠에게 잡아먹혀 평화가 생겨나는 밤 밤의 위세에 눌려 당신을 잘 모른다고 선언하는 밤 


  당신은 기억의 26C 칸에 여전히 타고 있는데 

기차는 시베리아로 끝없이 향한다 어둠의 제왕 앞으로 덜컹이며 다가간다 어둠의 등을 조금 쓰다듬으면 한 마리 거대한 슬픈 짐승 나의 형벌은 언제 시작되었나 죄를 싣고 달리는 기차를 당신이 멈춰 줄래? 





안구건조증



눈을 감고 있는 순간이 많아졌다

눈을 감고 있어도 보이는 것들이 많아졌다


강물은 침묵을 키우느라 거친 호흡을

밤은 고백을 듣느라 예리한 귀를


봄은 자신의 권좌를 가장 크게 증명하기 위해

요란하다 거짓말 같은 소문들이

자주 출몰하는 계절


눈을 질끈 감아 버려

버려, 는 지상 최고의 외로운 말

목적어를 버리고 고립된다는 말

서술어를 강물 속에 빠뜨려도 된다는 말

주어를 내려놓고 도강渡江해도 된다는 말


버려, 다시 시작이다

숨겨 둔 고깔모자와 지팡이를 꺼내 와

새로운 주문을 외워 보자


하나, 얼음을 깨며 강물이 오줌 싸는 소리

둘,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의 혓바닥소리

셋, 꽃잎들이 바닥으로 하강하며 옷 벗는 소리

……당신도 거기 있나요?


눈꺼풀 속에서 시간은 한낱

시침과 분침의 노예

멈춘 시계가 가장 권력적이다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 사이

나무에서 애인들이 떨어지고

지구가 와르르 흔들렸다


그러나 지구의 척추는 아직 부러지지 않았다





사과 혹은



우리는 한때 서로의 사과


사과를 앞에 놓고

사과 뒤에 있는 

서로를 생각하는


달콤한 문장들을 먹다가

갖다 바치다가 

버리는 


사과를 열지 못해

사과를 닫고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는


우리는 우리의 표절

당신에게, 사과할게요


명징하지 못한 오후를

나누며 말라가는


아무것도 남지 않아

마른 껍질만 보여주는

달콤하다는 기억만으로 

어제를 지배하는


먹다 남은 자리에 남아

오늘을 바라보는





시론


어릿광대 씨, 오늘도 안녕?



나의 시 속 어릿광대는 내게 나를 넘어설 것을 요구한다. 나를 넘어서서 당신에게 말을 걸고 당신의 목소리를 들으라고 요청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인가? 당신은 내게 낯선 문장을 먹이로 물고 오는 한밤의 새인가? 어둠을 뚫고 나를 흔들거나 나를 어둠 속에 더욱 묻히게 하는 나무인가? 불면의 밤에 나는 당신과 우두커니 마주한다. 예의바르게 당신이라는 목적어를 책상 앞에 세운다. 


심지가 타들어가는 양초를 바라보며 나의 잃어버린 서술어를 당신이 숨겼는지 반복해서 물어본다. 당신을 자꾸 의심한다. 당신의 서술어를 내가 숨긴 적이 있었던 것처럼, 나는 내 안에 자라나는 의심덩어리 문장을 목도한다. 그럴 때 우리의 대화 방식은 침묵. 음악이 우리 사이를 헤집고 들어올 때도 있지만 우리는 주로 침묵을 통해 감정과 정서, 믿음과 의심, 은유와 환유, 패러독스와 아이러니 같은 것들을 흥정 없이 교환한다. 나는 “작가는 자신의 아픔, 소중히 여기던 근심 걱정이나 뛸 듯한 기쁨으로부터 텍스트에 정신적인 어릿광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라르메의 말을 떠올린다. 그러므로 어릿광대는 나이면서 동시에 내가 아니다. 당신이면서 동시에 당신이 아니다.


늦은 밤, 책상 앞에 앉아 나는 당신을 듣는다. 그리고 끊임없이 질문한다. 타자를 듣는 것은 나의 세계를 깨고 당신의 세계로 나아간다는 의미이다. 골목을 헤집고 다니는 거짓 풍문을 들으며 당신과 함께 혹은 다르게 분노한다, 직장에서, 카페에서, 책 속에서, 대중매체 속에서 당신과 나눈 수많은 대화를 환기한다. 그것은 당신과 ’사랑을 한다’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사랑을 한다’라는 말의 내부에는 삶의 허무를 베고 희열을 얻어내려는 어릿광대의 의지와 욕망이 작동한다.


나는 우선 어릿광대에게 긴 침묵을 강요한다. 당신의 문장을 읽기 위해 그는 오래 침묵하며 극단을 기다린다. 극단의 순간에 접하는 정서와 사유를 포획한다. 그래서 당신의 문장과 나의 문장이 만나고, 그의 입과 손을 빌려 새로운 문장이 탄생한다. 그 순간 나는 그를 빌어 나의 문장을 정의 내린다. 비록 아침이면 의미가 퇴색되어 버리는 휘발성 문장일지 모르나, 어릿광대에게 양도하는 문장들을 위해 나는 한밤중에 깨어 조용히 펜을 드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에는 속을 감춘 기린이 된다. 넓은 초원의 초식성 순한 기린이 되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되지 못한다. 오히려 당신을 경계하며 의심하는 때 묻은 기린이 된다. 당신과 카페에서 만나 커피를 마시며 나의 정체를 숨기고 예의 바른 척 나의 교활을 숨기는 기린이 된다. 그러므로 나는 기린이거나 기린이 아니다. 


어느 날 당신은, 내가 쓴 문장의 낯선 주어가 된다. 그 문장은 내가 발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당신이 내 안에서 나를 조종하는 것이다. 원래 그것은 당신의 것이어서 내게는 한없이 낯설게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말을 순순히 받아 적는다. 나의 무지와 한계를 당신이 일깨워주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당신과의 대화는 규칙적이거나 혹은 즉흥적이며 부드럽거나 혹은 예민하다. 피상적이거나 혹은 본질적이며 황량하거나 충만하다. 그러므로 나는 밤의 중심을 향해 긴 몸을 출렁이는 뼈가 두터운 어둠 속에서 고독하다. 한밤, 어둠의 둔중한 척추가 꿈틀거릴 때 당신은 기억의 26C 칸에 여전히 타고 있다. 어둠의 등을 조금 쓰다듬으면 한 마리 거대한 슬픈 짐승이 느껴진다. 그것은 당신이거나 혹은 나, 혹은 내 어릿광대이다, 아니다, 그 모두가 아니거나 그 모두이다.


눈을 질끈 감아도 목적어와 서술어와 주어는 내 문장들의 뼈대들이라서 버릴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시계를 멈추고 기억 속에 앉아 사과를 꺼내 먹는다. 당신은 사과 속에도 있다. 나는 당신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당신의 문장들을 달콤하게 먹어 치워서 미안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문득 당신에게 사과할게요, 라며 서술어 하나를 건넨다.


당신은 내게 극복해야 할 대상이거나 추구해야 할 염원이 아니다. 실존일 뿐이다. 나는 상징계 속 나의 실존을 찾기 위해 당신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당신은 결국 나의 부재와 실존의 증거이고 증인인 셈이다. 당신은 골목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거나 실종된 아이들을 찾는 전단지에 눈길을 주거나 혹은 폭력과 권력, 부조리와 모순에 촛불을 드는 정의로운 인간이다. 아니다, 당신은 그저 이기적이고 퇴락한 천민자본주의를 겨우 살아내는, 나만큼 부끄럽고 무기력한 소시민이다. 


어느 날, 나는 당신을 색다르게 만나기 위해 망토를 꺼내 입고 마력을 보여주는 마녀가 된다. 그러면서 계속 당신을 통해 나를 읽는다. 읽고 대화하고 사유하며 ‘사랑을 한다’. 그것이 내 문장을 생성시키는 과정이다. 그리하여 지구의 허파까지 읽는 것, 지구의 거짓말과 폐허를 읽는 것, 우주의 희망과 허무를 읽는 것, 그리하여 결국 나라는 미지의 행성에 조금씩 다다르는 것, 결국 내게는 당신과 내 어릿광대가 전부이다. 아침마다 눈을 뜨는 순간 제일 먼저 인사한다. 어릿광대씨, 오늘도 안녕?





*강순 199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이십대에는 각시붕어가 산다』, 『즐거운 오렌지가 되는 법』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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