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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집중조명/임지훈/시평/길들여지지 않는 밤이면 노래를 불렀지 ― 강순 시의 기척들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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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집중조명/임지훈/시평/길들여지지 않는 밤이면 노래를 불렀지 ― 강순 시의 기척들에 대해서
임지훈
길들여지지 않는 밤이면 노래를 불렀지
― 강순 시의 기척들에 대해서
1. 느낌표와 물음표 사이에서 약동하는 서정
“나는 가끔 물살이 빠른 그곳에 발을 담근다”(「사춘기」)고 말하며, 시적 약동을 표류의 이미지로 전달하던 사람. 저장하겠느냐는 컴퓨터의 물음에 “아니오”를 누르며, “<오늘, 지금 이 순간>이 <아주 가볍게> 사라져”버리게 만들던 사람. “그냥”이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8월의 햇살에 걸려 죽어 가는 영혼을 바라”(「8월, 그 유혹」)보는, 무심함 속에서 슬픔을 향해 시선을 던지던 사람. 언어라는 형식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징계의 주민으로서, 언어적 형식 그 자체에 대한 극도의 충실함이 곧 언어에 대한 가장 강한 일탈이 될 수 있다는 역설을 보여주었던 시인이 내가 기억하는 강순이라는 시인의 일면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순이라는 시인은 언어를 일종의 사건처럼 사유하면서 언어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힘들을, 다른 시인들에게서는 미처 현재화되지 못했던 잠재성을 현실화시키는 시인이었다고 평가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면면은 문장 구조를 통해 자신의 삶을 조망하는 「오늘의 처방전」에서도 두드러지는 어떤 것이기도 하다.
어제는 몇 개의 목적어를 잃고 귀가했습니다 당신이 내 목적어 중 하나를 습득했다면 발견하는 대로 속히 연락 바랍니다
나는 어제 태풍 속 벽오동처럼 많이 흔들렸습니다 의사는 어려운 말들을 대롱대롱 가지에 늘어놓았습니다 가지가 바닥을 향해 출렁이자 줄기가 허공으로 크게 흔들렸습니다
오늘 내가 쓴 문장은 주어가 여러 개여서 당신도 내 문장들 속 주어가 되었습니다 햇살이 좋은 세 시쯤 당신이 내가 잃어버린 목적어들과 교합할 때 꽃잎이 잠시 반짝였습니다
나의 서술어들은 집으로 돌아와 쉬고 있습니다만 내일은 어떨지 잘 모르겠습니다 의사는 운동 요법도 함께 처방 내리며 경과를 보고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끝을 흐렸습니다 정직한 서술어는 종종 어간과 어미를 혼동하며 말끝이 밟히는 습관을 지녔습니다
한숨을 매단 느낌표가 나타나서 의사가 진단내린 문장을 자주 반복적으로 따라다녔습니다 나는 가구 위로 날아다니는 예민한 느낌표를 잡아다가 어제 저녁 과감하게 서랍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그 후 서랍 속에는 하루 세 번의 처방약을 먹고 말줄임표가 마구 자라납니다 침묵이 보약이 될지 몰라 누구의 전화도 받지 않을 예정입니다 많은 말들을 서랍에 구겨 넣었더니 오늘 밤 책상 위에는 나라는 단독 주어만 남았습니다
당신의 물음표가 한밤중에 침대에서 발견되어 허겁지겁 일기장에 잘 보관해 두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도 같은 일이 반복될 것 같아 만연필을 침대맡에 두었습니다 당신의 물음표는 색깔과 크기가 매번 달라집니다
그래도 오늘은 의사를 만나고 왔으니 안심입니다 내 증상에 대해 의사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왼쪽으로 이십삼 점 오 도 정도 기울이며 잃어버린 목적어를 빨리 찾아보라고 조언했습니다 의사는 지구의 자전축 각도만큼 해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내일은 바람과 꽃잎이 함께 쉴 수 있는 의자를 마당에 내놓을 생각입니다 당신의 물음표를 거기다 올려놓을 테니 나 몰래 언제든 다녀가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처방전」 전문
시의 구조를 약간의 변형을 거쳐 단순화시켜보자면, 화자는 어제로부터 오늘을 거쳐 내일에 대해 말한다. 그 순서는 문장 성분의 목적어/주어-서술어/문장부호의 순서에 대응한다. 다만 여기서 문장 부호는 오늘과 내일 양면에 걸쳐있는 것으로, “느낌표”는 오늘에, “물음표”는 내일에 놓여 있다. 서사적으로 요약해보자면, ‘어제’ 목적어를 잃어버린 나는 ‘오늘’ 의사를 만나고 돌아와 ‘내일’에 대해 생각한다. 어제로부터 오늘을 거쳐 내일로 이어지는 일련의 선형적 흐름이 풍성하게 느껴지는 것은 시인이 시의 곳곳에 배치해놓은 운동성들 덕분으로 생각된다. 예컨대 흔들리고 반짝이는, 운동성과 연계될 수 있는 표현들이 그러하다. 이러한 표현들이 선형적인 시의 전개에 약동하는 느낌을 불어넣기에 시는 일상과 비일상 사이에서 서정적 진동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러한 서정적 진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일까. 많은 시인들이 실수하는 것은 이러한 서정적 진동이 일탈적 언어의 활용을 통해 가능하리라 생각하는 것인데, 이 점에 대해서 강순은 정반대의 안정감을 보여준다. 그녀의 문장에는 비문이 없으며 표현들은 자신이 전달하려는 바를 명확하게 말하고자 최선을 다한다. 강순의 시에서 나타나는 서정적 진동은 안정적이고 명확한 문장들로부터, 그 속에 숨겨진 아주 약간의 기척들로부터 시작된다. 그녀의 시적 표현을 활용하여 말해보자면, 마침표라는 일상을 축으로 삼아 느낌표와 물음표의 기척들에 대한 떨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언어에 대한 충실성을 통해 언어의 폐쇄성으로부터 일탈하려는 시도라고 표현한다고 해서 딱히 과장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밤의 기척에게 슬픔의 눈빛을
하지만 내가 강순이라는 시인에 대해 기묘한 애정과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따로 있다. 사실 이는 앞서 표현한 강점들을 ‘일면’이라고 축약한 것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일 텐데, 이러한 형식에 대한 관찰, 시인의 언어에 대한 조망만으로는 감지될 수 없는 서정의 영역이 늘 강순의 시에 함께 해왔기 때문이다. 섣불리 어떠한 희망에 대해 논하지 않는, 어떤 대상에 자신을 함부로 의탁하지 않으려는 의지 또한 여기에 한몫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루어보고자 하는 지점은 이러한 부분들에 대해서이다. 강순이라는 시인이 보여주는 떨림들은 어디에서 기인하며 그 떨림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지점들에 대해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밤”이라는 시공간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시인은 그러한 밤의 기척들을 소중히 하며, 그것을 정교하게 가다듬어진 언어로 표현하는 것에 남다른 능력을 보여준다.
밤을 문지르면 덜컹이는 기차가 어둠 속으로 달려간다 밤의 입구를 열어젖히고 밤의 중심을 향해 긴 몸을 출렁이는 것은 뼈가 두터운 어둠 둔중한 척추가 꿈틀거린다 밤의 중심에는 어둠의 제왕이 아직도 권좌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등의 껍질이 단단한 그것을 조금 만져본다 손끝에 닫는 어둠은 이빨이 날카롭다 물리면 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어둠 당신이 등 돌려 가버린 어둠 희미하게 떠오르다 캄캄하게 큰 아가리를 가진 어둠 단단한 몸통뼈로 위협하는 어둠 기차는 어둠의 중심 쪽으로 몸을 깊숙이 밀어넣는다 밤 속으로 미끄러지며 밤의 나신과 몸을 교합한다 신음이 어둠 속에서 새어나온다
―「시베리아행」, 부분.
이번에는 그녀의 시 「시베리아행」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먼저 시의 전개를 상세히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위에 인용한 부분은 「시베리아행」의 전반부이다. 이 시에서 화자는 “밤을 문지르”며 “어둠 속으로 달려”가는 기차에 탑승해 창밖의 어둠을 관조한다. 어둠은 “밤의 입구를 열어젖히고 밤의 중심을 향해 긴 몸을 출렁”인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피사체라기보다는 능동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갖고 움직이는 무언가에 가까워 보인다. 이제 화자는 그러한 어둠을 향해 손을 내밀며 그것을 손끝으로 감각한다. 손끝의 감각을 통해 느껴지는 어둠은 “단단”하고 “날카”로우며 나를 “위협하는” 사물이다. 이제 기차는 어둠의 중심을 향해 점점 더 나아가며, 기차에 탑승한 나 또한 어둠에 삼켜져가는 듯 보인다.
위의 장면에서 어둠은 “밤”을 구성하는 내용물이면서, 밤 그 자체와 교류하는 별개의 사물이다. 시인은 먼저 그것을 “밤을 문지르면 덜컹이는 기차가 어둠 속으로 달려간다”고 말하며 둘을 분리시킨다. 이러한 분리 이후에 화자는 어둠의 속성을 세부적으로 구성하며 그것의 의미를 정교화 시키는 과정을 거친다. 정교화 과정에서 밤과 분리되는 어둠은 시적 생명력을 얻으며 마치 살아있는 생물인 것처럼 움직인다. 그렇다면 우리가 제기해야 할 질문이 다소 명확해진다. 어둠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시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어제의 통증을 애써 찾지 않아도 되는 밤 바이칼 호수에 빠져 죽어도 되는 밤 당신의 얼굴을 기어이 떠올리는 밤 매달린 슬픔을 따 먹어도 되는 밤 밤이라는 말을 키웠다가 흔들어 떨구는 밤 슬픔을 주워서 구워먹고 싶은 밤 껍질을 깨부수고 싶은 밤 알맹이는 도망가고 가시만 남은 밤 배가 고파 당신 얼굴을 조금씩 파먹는 밤 벌레 먹은 당신 이름을 내던지는 밤 당신과 나의 길이 달라서 안도하는 밤 어둠이 기차를 한 좌석씩 삼키는 밤 당신이 어둠에게 잡아먹혀 평화가 생겨나는 밤 밤의 위세에 눌려 당신을 잘 모른다고 선언하는 밤
당신은 기억의 26C 칸에 여전히 타고 있는데
―「시베리아행」 부분.
어둠의 의미를 밝히기 이전에, 시인이 다루고 있는 “밤”에 대해 조망해보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어둠”과 분리된 것으로서 밤은 “껍질을 깨부수고 싶은 밤 알맹이는 도망가고 가시만 남은 밤”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내용이 덜어내져 있다는 의미에서 빈 공간을 내부에 담지하고 있는 시공간, 혹은 그 의미가 다소 비워져 있는 장소라고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화자에게 밤이란 비워져 있는 시공간으로써, 자신의 사유들과 행동들이 실현될 수 있는 잠재성의 장소이다. 그러한 잠재성으로부터 현실화되지 못했던 사유와 행동들이 화자에 의해 꺼내어진다. 기억의 통각과 죽음에 대한 유혹, 부재하는 타자의 부분적인 몸에 이르기까지 그 장소에서는 여러 가지가 피어오르게 되고, 역설적으로 이러한 시적 상상력의 만개를 통해 밤은 어둠을 제하고도 그 자체로서 다종다양한 의미화가 가능해진다. 마치 확장하는 물회오리처럼 점점 더 그 외연을 확장해가는 화자의 밤에 대한 상상력은 그렇다면 어디로 향해 나아가는가.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은, 그리고 강조되어야 하는 점은 강순 시인에게 있어 시적 상상력의 확장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경우가 드물고, 오히려 그러한 확장이 첨예화를 가능하게 하는 시적 토대로써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이 지점에서도 강순 시인의 밤에 대한 상상력은 확장을 거듭할수록 오히려 하나의 극점을 향해 나아가는 시적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확장을 통한 첨예화라는, 어찌 보면 모순적이고 역설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시적 전개 속에서 그녀의 화자가 대면하는 것은 타자이다. 상상력을 통해 그 외연을 확장한 밤의 수많은 의미들이 이제는 타자라는 하나의 대상에게로 귀착된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일어나는 바, 타자는 그 의미를 다양하게 확장해가기 시작한다. 상투적인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에로티시즘적인 욕망이나, 혹은 부재하는 대상에 대한 애도의 형태 등 보편적인 의미들로 확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나’에게만 가질 수 있는 의미로서의 특수한 양태로 변화를 일으킨다. 그것은 현실에 의해 윤색되어버린 과거의 이름이자, 내던지고 싶음에도 여전히 나의 주변을 떠도는 이름이고, 나를 여전히 뒤흔드는 이름이면서 내가 모르는 척 하고 싶은 이름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화자는 한 번 더 반전을 거듭한다. 그 반전은 다종다량한 의미들의 변주 속에서 일종의 다소곳함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적 포즈를 다시금 취하는 것으로써, 확장된 상상력을 갈무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은 기억의 26C 칸에 여전히 타고 있는데”라고 말할 때, 여기에서 상기되는 것은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다. 타자의 이름이 기차로 알레고리화된 나의 몸속에 여전히 살아 있으며, 그것이 사랑이라는 단순한 이름으로도, 혹은 상상력의 점진적인 연쇄를 통한 외연의 확장으로도 정의될 수 없는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구심력과 원심력이 이루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나의 몸속에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포즈의 변화는 시의 완급조절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시의 분위기를 일시에 진정시키는, 독자의 시선을 순식간에 사로잡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어쩌면 이러한 시적 전개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리해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밤과 어둠, 그리고 기차라는 모티브들 사이를 항해하는 화자에게, 타자란 그 끝에 다다르게 되는 일종의 목적지인 것은 아닐까. 나의 내면에 항상 존재하는 그 대상에게 가닿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밤으로부터 어둠을 떼어내고, 그 어둠의 등뼈를 만지면서 밤의 속으로 침잠하는 과정이 필요한 셈이다. 조금의 관념어들을 보태어 말하자면, 이 시에서 타자란 나의 내면에 있으면서 내가 곧바로 가닿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바깥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나의 내면의 지점, 나의 외부에 있는 대상에 대한 시적 항해의 끝에서야 비로소 다다를 수 있는 내 안의 타자의 지점인 셈이다.
기차는 시베리아로 끝없이 향한다 어둠의 제왕 앞으로 덜컹이며 다가간다 어둠의 등을 조금 쓰다듬으면 한 마리 거대한 슬픈 짐승 나의 형벌은 언제 시작되었나 죄를 싣고 달리는 기차를 당신이 멈춰 줄래?
―「시베리아행」 일부
하지만 화자의 의지와 관계없이 기차는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계속해서 나아간다. 춥고, 건조하며, 어떠한 생명의 낌새도 느껴지지 않는 시베리아를 향해서 나아간다. 나의 몸과 나의 의지가 늘 하나의 군체로 작동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감각과 감정들이 몸을 이끌어가기도 하고, 몸이 감각과 감정을 이끌어가기도 하는 법이다. 여하간 이 시의 마지막 대목에서, 화자는 시베리아를 향해 끝없이 나아가고, 어둠의 등을 쓰다듬으며 그것이 “거대한 슬픈 짐승”이라고 읊조린다. “끝없이 향한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시베리아는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로써 사용되는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과거와 현재에 의해 점차 귀결하게 될 형벌의 장소이고, 이 밤의 끝에서 마주하게 될 영원한 표백의 공간이다. 어둠이 그 속성으로 인해 검은 빛의 색채로 감각된다면, 이러한 의미에서 시베리아는 어둠-밤이라는 요소와 대비되는 장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시인에게 어둠이 나를 위협하는 사물로써 존재했던 것을 떠올려보자면, 그 형벌의 끝이 시베리아라는 장소로 표현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일순 떠올리기에 시베리아는 어떠한 자극도 없이 천천한 바람에 모든 것이 정지된 백색과 고요의 공간이라 할 수 있을 터인데, 어둠은 스스로 살아 날뛰며 나를 위협한다는 의미에서 그 공간과는 대비되는 사물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화자는 그 잔잔한 고요보다 날뛰는 어둠에 손을 뻗고 있는 것은 아닐까. 비록 나를 위협한다 할지라도, 당신을 잡아먹어 당신을 품고 있는 어둠을 차라리 원하는 것은 아닐까.
화자의 태도를 통해, 우리는 강순이라는 시인이 가진 어두운 이면을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무채색의 영점지대보다는, 차라리 나를 상처 입힐 지라도 살아 숨 쉬는 어둠에 손을 내밀며 그것과 교신하고자 하는 태도 말이다. 그러니 화자가 “죄를 싣고 달리는 기차를 당신이 멈춰 줄래?”라고 말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태도일 것이다. 당신이 없어야 나는 평화를 얻을 수 있지만, 당신이 없는 평화를 얻느니 당신에 의해 어둠과 함께 밤 속을 유영하겠다는 비극적 서정의 태도 말이다.
3. 와르르, 너의 기척을 느끼는 일
하지만 오해해서는 안 되는 사실이 하나 더 있다. 시인에게 “당신”은 결코 완전한 대상으로서 나의 모든 불화를 종식시켜줄 신적 존재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것은 나의 내면에 있으면서 나를 괴롭게 하고, 나의 일상을 뒤흔드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기묘한 그리움과도 엮여 있는 다면적인 존재에 가깝다. 이 복잡다단한 타자는 나의 내면에서 사라지지 않는 얼룩처럼 남아 있고, 그것은 나에게 「시베리아행」에서처럼 밤과 어둠을 통해 기척을 내비친다. 아니, 반대로 이야기를 해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온전한 그 이름으로 간직하기에는 차마 버틸 수 없기에, 기척으로 남아버린 것이 타자라는 이름이라고. 그렇다면 여기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잊지 않기 위해 타자를 기척이라는 형식으로 나의 내면에, 몸의 안쪽 깊은 곳에라도 보존해보고자 스스로의 상처를 무릅쓰는 그 태도가 아닐까. 아마도 강순이라는 시인이 지니고 있는 서정의 발원지는 이러한 태도에 있을 것이다. 나의 견딤과 타자의 보존이라는 대립되는 사정 속에서, 둘 다를 충족시키기 위한 형태로써의 기척들에 대한 시선. 그리고 거기에서 항상적으로 은은하게 퍼져 나오는 서정성. 이것이 강순이라는 시인이 일궈낸 시적 영토이지 않을까. 그러한 관점에서 다음의 시를 천천히 음미해보자.
눈을 감고 있는 순간이 많아졌다 눈을 감고 있어도 보이는 것들이 많아졌다 강물은 침묵을 키우느라 거친 호흡을 밤은 고백을 듣느라 예리한 귀를 봄은 자신의 권좌를 가장 크게 증명하기 위해 요란하다 거짓말 같은 소문들이 자주 출몰하는 계절 눈을 질끈 감아 버려 버려, 는 지상 최고의 외로운 말 목적어를 버리고 고립된다는 말 서술어를 강물 속에 빠뜨려도 된다는 말 주어를 내려놓고 도강渡江해도 된다는 말
―「안구건조증」 일부
「안구건조증」이라는 일상적인 용어를 제목으로 하는 이 시에서, 화자는 역설적인 순간에 대한 진술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눈을 감고 있는 순간이 많아졌”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눈을 감고 있어도 보이는 것들이 많아”졌음을 감각하게 하는 순간이다. 본다는 것, 시각의 메커니즘을 떠올려 볼 때 눈을 감는다는 것은 대상에 대한 외면을, 즉 무관심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대상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견지하려 할 때, 대상에 대한 마음은 오히려 더 커진다. 강물과 봄으로 은유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내가 “침묵을 키우”려고 노력할수록, 오히려 거친 호흡을 갖게 되고, 이것이 끝내는 “고백을 듣느라 예리한 귀”가 되는 셈이다. 그러한 시인에게 “봄”은 기척들이 소란스러운, 요란한 계절이다. 소문들이 출몰하고 나의 마음을 소란스럽게 만든다. 그러니 화자는 그 소란스러움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눈을 질끈 감아 버”리지만 그러한 행위가, 목적어를 버리고 고립되려는 그 행위가 오히려 화자의 감각을 더욱 예민하고 영민하게 만드는 것 같다. 버려, 다시 시작이다 숨겨 둔 고깔모자와 지팡이를 꺼내 와 새로운 주문을 외워 보자
하나, 얼음을 깨며 강물이 오줌 싸는 소리
둘,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의 혓바닥소리
셋, 꽃잎들이 바닥으로 하강하며 옷 벗는 소리
……당신도 거기 있나요?
눈꺼풀 속에서 시간은 한낱 시침과 분침의 노예 멈춘 시계가 가장 권력적이다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 사이
나무에서 애인들이 떨어지고 지구가 와르르 흔들렸다 그러나 지구의 척추는 아직 부러지지 않았다
―「안구건조증」 일부
그렇기에 화자에게 버린다는 것은, 기실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로 번역된다. 버린다는 것, 외면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나의 몸과 감각들에 마술적인 변이를 일으킨다. 강물에, 연어에, 꽃잎들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은 이처럼 무언가를 버리는 순간으로부터 가능해진다. 그러니 화자에게 버린다는 것은 단순히 대상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면을 비워냄으로써 무언가 외부의 것이 나의 내부에 담겨질 수 있도록, 타자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는 행위라고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화자는 타자의 언어적 촉각은 「시베리아행」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그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타자를 더듬는다. 언어적 촉각이 예리해질수록 시간은 더디 흐르게 되고, 종국에는 시간이 멈출 정도로, 타자를 향한 화자의 감각은 예민해져만 간다. 그 속에서 화자가 발견하는 것은 사랑이 낙하하는 순간이다. 그것은 화자의 세계를 “와르르” 뒤흔든다.
그러한 뒤흔듦에 대해서 화자는 비교 대상으로 “지구”를 내세운다. 나의 내면에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타자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것을 더듬는다는 것은, 나에게 “지구의 척추”가 부러질 만큼 내면적 진동을 불러일으키는 순간이다. 하지만 이 흔들림의 순간에 대해, 화자는 “지구의 척추는 아직 부러지지 않았다”고 부정함으로써, 그것이 특별하고도 개인적인 일임을 강조한다. 그런데 오히려 이 순간에 일어나는 시적 효과는 그 특별하고도 개인적인 내적 진동이 보편적인 다수의 사랑의 경험으로 치환되는 일이다. 화자로 지칭되는 ‘나’의 내면의 흔들림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흔들림으로, ‘우리’의 사랑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앞서 「시베리아행」이 상상력의 확장으로부터 역설적으로 초점화되는 방식을 취했다면, 여기에서 시인이 선택하는 것은 그것의 반대 과정, 초점화되는 가운데 특별한 것이 보편적인 일로 고양되는, 우리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타자에 대한 그리움을 일깨우는 공감의 과정이라고 해볼 수 있겠다. 이러한 양자가 가능한 것 또한, 나의 견딤과 타자의 보존이라는 첨예한 대립 속에서, 그 대립관계를 지속시킴으로써 양자를 모두 가능하게 만드는 시적 태도를, 작은 기척들에 대한 시선을 시적 상상력을 통해 유지하는 시적 태도로 인해 가능한 것이라고 평가해보고 싶다.
4. 그러므로 다시, 상냥한 눈빛으로
강순 시인에 대한 특이사항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강순이라는 시인이 절필을 경험했던 시인이라는 점이다. 언어에 대한 충실함을 통해 외려 언어의 폐쇄성을 내파하려 했던, 언어로 표현 불가능한 지점을 언어를 통해 하나의 도상圖像으로 그려냈던 시인이 어느 순간 휴지기를 가졌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 까닭이 무엇이었는지 평론가의 입장에서 쉬이 유추해볼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어쩌면 언어를, 그 육중함과 무게감을 온 몸으로 받아냈던 시인이기에 휴지기는 역설적으로 시인이 보여주었던 시적 충실함에 대한 증언이자 증거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했던 시인이 다시금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보다 영민하고 예민해진 시각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기쁠 따름이다. 그리고 그 시간의 흔적들이 시의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이, 시간과 사랑과 타자에 대한 기척들로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스스로를 견디기 위해, 그러면서도 타자에 대한 시선을 거두어 나의 내면으로 침잠하지 않고자 느낌표와 물음표 사이에서 약동하는 태도, 물음표와 느낌표의 기척들에 예민하게 반응하고자 때로는 밤을 향해 스스로를 투신하기도 하고, 때로는 봄의 요란함 속에서 휩쓸리기보다는 스스로를 가만히 놓아두기도 하는 시인의 태도가 우리에게 어떤 믿음을 전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물음표를 거기다 올려놓을 테니 나 몰래 다녀가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시인의 이러한 발화는 독자를 향한 상냥한 제의인 것은 아닐까. 우리가 가진 삶에 대한 물음들, 특수하고도 개인적이라고 믿어왔던 일들이 사실은 어떤 공감의 영역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너의 물음과 나의 물음이 꽃과 벌처럼 때로는 교감하고 때로는 상승할 수 있음을 시인은 전해주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니 이 상냥한 제의와 그 속의 슬픈 어둠에 우리가 시선을 빼앗기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제 사뿐사뿐 걸으며 그녀의 시 속으로 들어가, “와르르”, 떨림을 경험해볼 시간이다.
*임지훈 2020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부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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