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78호/집중조명/권정일/대표시 night 외 4편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1
댓글 0건 조회 301회 작성일 22-12-30 17:02

본문

77호/집중조명/권정일/대표시 night 외 4편 


권정일


night 외 4편



이동하는 새떼죠. 높은 산맥을 넘을 때는 새들도 운다죠. 울음을 움켜쥔  발가락을 풀지 않고 날겠죠. 누군가 공중을 묻는다면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 말할 수도 있겠죠.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수만 번쯤 읊조리고 나면 새들이 페루에 가서 죽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죠. 페루에 가면 숲에서 죽을 수 있을까요. 얼마나 많은 발자국을 공중에 버렸을까요. 발가락이 얼마나 빨갛게 얼었을까요. 얼마나 많은 외로움이 뜬눈으로 가라앉았을까요. 여기, 끝이 없이 밤인, 눈을 가린 당신이 있어요. 여길 봐, 어둠 안에 있어. 밤이 와 있어. 밤이 오고 있어. 당신은 눈을 잃은 순한 짐승, 손톱이 길어지는데 끝이 없이 겨울이에요. 거미가 줄을 치는 끝이 없이 자정이에요. 자정이 지나면 겨울이 오고 겨울이 지나면 언제나 잠자고 있는 밤이 남아서, 결코 잠자지 않는 밤이 남겨져서 끝이 없이 단일한 겨울이에요. 얼굴이 지워지는 줄도 모르고 순일한 밤이에요. 새떼들에게로 망명하는, 새가 되는 기분이에요. 누군가 놓아두고 간 우산처럼 우두커니, 돌아누워야 할 차례예요. 찢어진 밤의 부위는 끝없이 ‘혼자 울어라’예요.


* 유치환, 황지우, 로맹가리, 장석남. 





오래오래에게



가령, 오래오래는


흰 벽에서 생겨 낮이 남겨놓은 밤이 낮을 모를까봐 가만히 서 있다가 저벅저벅 걸어 나오는 거인이다


섬세하게 고약하게 낮잠에 들지 못하게 흘려 쓴 엽서다 


홀연히 떠돌아 온 밤이 아직 읽지 못한 한 줄, 구운 두부 속살 같은 어떤 위로다


그것이 위로라면 녹슨 대문을 밀고 이미 다 사용해버린 별을 다녀오는 


혼자가 혼자에게 대화를 나눠 줄래? 무인칭들에게 묻는 것이다 


창문이 창문을 낳고 창문이 창문을 낳고 창문이 눈동자를 키우는 동안 


의자처럼 앉아 네모처럼 앉아 눈먼 물고기처럼 앉아 


과학하지 않아도 미술하지 않아도 노래하지 않아도 쏟아지는 창문의 세계다


충분히 또렷하게 발자국위에 잇달아 발자국을 찍고 간, 누군가의 숭고한 흰 그림자다


누군가의 아직 따뜻하게 흐르는 기억을 만져보는 것이다


검은 것은 죽 검고 흰 그림자가 검은 것에 물들어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는 옛날 곁에서 오롯해지는 것이다 


발소리를 낮추고 길이길이 사람 곁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너는 떠 있고 나는 잡고 있는 사람이 된다 

구름이 떠 있고 허공이 수직으로 놓인다 


땅을 딛고 나는 잡고 있고 

너는 하늘의 높이를 재고 있다


나는 양손으로 잡고 있는 사람 

오늘은 키가 큰 너를 올려다본다 


너는 바람을 타면서 

구름의 얼굴들을 골라냈다 


나는 얼굴들을 익히려고 

까치발을 들고 태양에 매우 가까워지려 한다


너는 떠 있고 자유롭게

나는 잡고 있고 팽팽하게 


네가 더 높이 나는 것은 너의 첫 번째 자유 

나는 손이 모자라도 괜찮아 놓을 수 있다


너는 달리는 자세로 떠 있고 

나는 놓으려는 사람이 된다


어두워지기 전까지 

우리는 양쪽 끝을 나눠 잡고 있다





장례미사



얼굴의 온도가 아주 조금 엄격해졌다


공기가 0.5도 떨어졌다


지나간 얼굴에게 지금의 얼굴을 내 준다


맨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꽃을 놓으며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을까 


형제자매는 가계도를 그리고

다른 몸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검고 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고


사제는 영원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우리는 잠깐 울고 잠깐 슬프고

약간 웃었다


우리는 각자 살러 갔다





공원묘지



희미한 흰 것과 덜 검은 것 사이

인부는 흙을 골랐다 


오래 다져진 흙이 붉음을 완성하듯이

삽이 흙을 뜨고 뒤집힌 흙의 따뜻한 향


죽어서 다행이에요 흙 아래 유골함

흙의 기운을 감내하는 시간


흙을 채우고 두드리고 수평을 맞추고 두드리고

흙을 두드리고 밟고 수평을 맞추고 꾹꾹 밟고 


안 울어야 할까 얼굴이 손을 감싸고

표정 없는 인사 마지막 공연 정처 없음 소용없음


정처 없음이 소용없음으로부터 격리되고

나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아? 


흙이 쌓이고 꽃 한 송이들 한 사람 입주하고

이만하면 되었어요 지금까지 잘 한 날들은 무효


휴대폰이 울리고 궁금해 하지 마세요 돌아보고

돌아보지 마요 그대로 가요 인부는 삽을 흙에 꽂고 


똑같은 모양의 산 사람들 되돌아가지 않는 말들

당신은 내가 없는 장면에 내가 없다는 사실을 잊겠지


아침에 잠깐 빛나고 저녁에 잠깐 반짝이고 

아침에 있었던 일이 저녁에도 일어나고


계단식 정원에 꽃잎 하나 건너와 

둥근 꽃으로 피어나고  





*권정일 1999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마지막 주유소』, 『수상한 비행법』, 『양들의 저녁이 왔다』. 국제사화집 『숲은 길을 열고』. 산문집 『치유의 음악』. 부산 작가상, 제1회 김구용 문학상 수상.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