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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집중조명/박동억/시평/얼굴의 신비 ― 권정일 시인의 시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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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1
댓글 0건 조회 343회 작성일 22-12-30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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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호/집중조명/박동억/시평/얼굴의 신비 ― 권정일 시인의 시세계 


박동억 평론가


얼굴의 신비 ― 권정일 시인의 시세계 



1. 누대의 얼굴, 일인분의 슬픔

‘나’보다 오래된 것은 ‘나’의 얼굴이다. 언제 그것을 깨닫게 되는가.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부모의 얼굴과 닮았을 때, 눈꺼풀과 입가의 주름이 부모의 표정을 모사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아버지 또는 어머니와 얼굴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는 내 아이의 얼굴에서 나와 꼭 닮은 얼굴을 발견할 때, 깨닫기도 전에 이미 아이의 미소에 나의 얼굴은 응답하고 있으며, 그래서 우리는 ‘나’의 얼굴이 사라져도, 아이의 하얗고 깨끗한 얼굴이 ‘나’의 표정을 계승하게 되리라고 예지한다. 그래서 얼굴은 신비롭다. 포이어바흐Ludwig Andreas von Feuerbach(1804~1872)는 영원불멸이라는 신성한 관념은 인간이 소유할 수 없는 초월적 능력이 아니라, 오히려 인류가 지속한다는 구체적 체험으로부터 탄생한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신성의 기원은 얼굴이 아닐까. 영원불멸에 대한 예감은 부모와 아이가 얼굴을 마주치는 순간에 탄생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신성은 자주 닮음이자 비유이며 둥긂으로 묘사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끝없이 반복되는 삶에 관하여, 권정일 시인은 첫 시집 『마지막 주유소』(현대시, 2004)에서 이렇게 말했다. “보름달이 대책없이 떠/어머니를 다시 저며 내야 한다.”(「달고기」) 아이는 자라나 이제 어머니처럼 월경을 시작한다. 그는 이제 온몸으로 어머니의 마음을 읽기 시작한다. 매달 찾아오는 아픔은 그의 시에서는 회상이다. 어머니가 겪었을 고통을 다시 딸의 몸으로 저며내는 아픈 공감이다. 한편 다른 시에서 그는 “새 몸을 얻기 위해/왜 고통이 없었겠는가”(「겨울 잎들」)라고 쓰기도 한다. 자연으로부터 그는 인내를 배운다. 뿌리는 봄에 얻을 새순의 높이를 위해 겨울을 견딘다. 그리하여 첫 시집에는 모든 아픔을 간직하는 상징적 장소로서 ‘연못’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연못을 흐르는 구름에 매달아 놓고 어머니를 매단다 술집에 매달아 놓은 아버지”(「다시, 연못을 본다」)라는 문장처럼, 이 작품에는 기억을 구름에 실어 보내려는 원심력과 연못에 간직하려는 구심력이 함께 작용하지만, 끝내 시인은 시의 제목처럼 연못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게 가족의 기억은 뿌리로서 ‘나’를 구속하는 동시에 지탱한다.

얼굴은 반복된다. 그는 『수상한 비행법』(북인, 2008)에서 “사실 나는 내가 아니다/시계가 복사해 낸 시간의 그림자다”(「플라톤을 패러디하다」)라고 쓰고, 『양들의 저녁이 왔다』(작가세계, 2013)에서 “핏덩이로 어머니를 받아쓴다”(「완전한 책」)라고 쓴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삶이 지속한다는 사실은 때론 두렵고, 때론 피처럼 독하다. 그런데 자식에게서 어머니의 몸짓이나 표정을 발견하는 순간 느끼게 되는 마음은 설렘일까, 아픔일까, 섬뜩함일까. 시인에게 회상은 아픔에 가까웠던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스스로를 깎는 일”(「독경獨經」)이고 “표백된 아버지 위에 끓는 내 기억을”(「종이의 유목」) 쓰는 일이다. 그렇게 그의 시는 어머니의 흔적을 몸에 새기고,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를 승화시키는 하나의 방식이 된다.

그런데 이렇게 세 번째 시집까지 반복한 주제를, 시인은 최근의 시집 『어디에 화요일을 끼워 넣지』(파란, 2018)에서는 지속하지는 않으려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여러 시 중에서도 가장 단호하게 이를 표현한 것은 “나라는 창을 들고 나는, 나와 악수하고 있다”(「과戈」)라는 한 문장으로 된 작품이다. 이제 그는 ‘나’에 몰입한다. 그것은 이제 딸이나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그저 한 사람으로서 세상에 전진하고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며 아파하고 무너지기를 택했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때 나를 ‘창’에 은유했듯, 시인에게 ‘나’로 산다는 것은 투쟁이다. 그의 시 세계 전체로 볼 때, 네 번째 시집은 사뭇 다른 성격을 지닌다. 어쩌면 그는 비로소 겨울을 지나, 따스한 새순의 높이 또는 오롯이 ‘나’로서 존재하는 ‘새 몸’을 획득한 것처럼 보인다. 신작시에서도 마찬가지다. 시인은 어떤 쓸쓸함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데, 그가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그 눈물이 누대의 얼굴에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눈에 맺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정이 지나면 겨울이 오고 겨울이 지나면 언제나 잠자고 있는 밤이 남아서, 결코 잠자지 않는 밤이 남겨져서 끝이 없이 단일한 겨울이에요. 얼굴이 지워지는 줄도 모르고 순일한 밤이에요. 새떼들에게로 망명하는, 새가 되는 기분이에요. 누군가 놓아두고 간 우산처럼 우두커니, 돌아누워야 할 차례예요. 찢어진 밤의 부위는 끝없이‘혼자 울어라’예요.


―「night」 부분


자정이 되면 사람들은 잠들고 저마다의 꿈을 꾸기 시작한다. 그런데 자정을 넘어서, 새벽까지 깨어 있으면 그 시간은 우리를 겨울처럼 쓸쓸하고 외로운 풍경으로 인도한다. 새벽은 우리 자신만을 마주하는 고독의 시간이다. 하지만 시인에게 이 순간은 위태롭지 않다. 오히려 새벽은 오롯이 자신을 자신의 고독으로만 환하게 비출 수 있는, 순결하고 견고한 시간이기도 하다. 고독의 심지는 한 사람을 바로 세운다. 그래서 그는 새벽을 ‘끝이 없이 단일한 겨울’이자 ‘얼굴’이 지워지는 ‘순일한 밤’이라고 부른다. 이때 ‘얼굴’은 타인에게 비추어지는 얼굴을 뜻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물러나 ‘새’처럼 자유로워지는 시간이다. 그 순간은 혼자 우는 것조차 마음대로다. 찢어진 밤을 아파하는 것 또한 홀로다. 

얼굴의 무게를 버리고, ‘나’로 서는 것. 아마도 이것이 그의 시에 일어난 변화이다. 따라서 세 번째 시집까지 그의 목소리는 자신의 마음을 고백할 때에도 항상 타인의 목소리가 겹쳐져 있다는 인상이었다면, 최근작에서 그의 목소리는 단색(單色)이다. 오롯이 자신의 기쁨과 슬픔, 자신의 고독과 위로로 빈틈없이 채워진 그의 목소리는 이전처럼 다층적인 인상을 주지는 않더라도, 개운하고 선명해졌다. 어떤 의미로 그는 애도를 완수한 것이다. 시 「장례미사」에서 고백하듯, 그는 “형제자매는 가계도를 그리고/다른 몸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또한 “우리는 각자 살러 갔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가령, 오래오래는


  흰 벽에서 생겨 낮이 남겨놓은 밤이 낮을 모를까봐 가만히 서 있다가 저벅저벅 걸어 나오는 거인이다


  섬세하게 고약하게 낮잠에 들지 못하게 흘려 쓴 엽서다 


  홀연히 떠돌아 온 밤이 아직 읽지 못한 한줄, 구운두부속살 같은 어떤 위로다


―「오래오래에게」 부분


물론 우리는 시인이 애도를 완수하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는지 떠올려 보아야만 한다. 아픈 기억은 우리 내부를 점령한다. 그것은 죄처럼 도사리고 있다가 불현듯 우리를 약탈한다. 그래서 ‘오래오래’라는 말의 초탈함이 무겁다. 그 초탈함에 닿기 위하여 시인은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우고, 얼마나 많은 낮을 휘청거려야 했을까. 그 시간을 견딘 이후, 이제 그는 자신을 길들이고, 자신 안의 아픈 기억을 삼켜 ‘흰 벽’에 가둘 수 있게 되었다. 굶주린 슬픔에 ‘구운두부속살 같은’ 위로를 건넬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우리는 시인이 무언가를 극복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기억은 추방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더 깊숙이 삼킬 수 있을 뿐이다. 오래 들여다볼수록 기억은 견딜만한 희미한 어둠이 되고, 그것이 물러난 자리에 ‘흰 그림자’를 만든다. 그렇게 시인은 마음속에 한 줌의 여백을 갖게 된 셈이다. 아무것도 떠올릴 필요 없고, 어떠한 의미로도 채우지 않았기 때문에, 텅 빈 품처럼 ‘사람 곁’이 될 수 있는 그러한 여백을 말이다.


2. 연과 줄이 서로 당기듯, 꽃과 흙이 서로 밀어내듯

시인은 여전히 얼굴을 사랑한다. 그러나 이제 그 얼굴은 부모로부터 자식으로 대물림되는 얼굴이 아니라, 오롯이 자신의 고독을 감당하는 자신의 마음이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 없는 자유로운 표정이며, 사랑하는 연인의 뺨을 어루만질 때의 체온이다. 그는 오랜 고통을 위로하는 법을 발견했고, 이제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여유를 마련하고자 한다. 이 때문인지 그의 시에서 타자를 대하는 방식 또한 바뀌었다. 이전의 시에서 타자가 ‘내 몸에 새겨지는’ 것이었다면, 최근작에서 타자는 나와 대등한 존재로 표상된다. 그들은 서로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밀어내거나 당기는 두 존재다.


너는 떠 있고 자유롭게

나는 잡고 있고 팽팽하게 


네가 더 높이 나는 것은 너의 첫 번째 자유 

나는 손이 모자라도 괜찮아 놓을 수 있다


너는 달리는 자세로 떠 있고 

나는 놓으려는 사람이 된다


어두워지기 전까지 

우리는 양쪽 끝을 나눠 잡고 있다


―「연」 부분


굳이 해설하지 않아도 쉽게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작품이다. 관계를 팽팽한 줄로 은유하는 것은 관습적이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관계를 잇는다’라거나 ‘관계를 끊는다’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위 작품에는 위태로운 관계가 끊어지기 직전의 줄로 비유된다. 한편 권정일 시인의 시 전체에 비추어볼 때, 이렇게 관습적인 은유를 통해 타자와의 관계를 묘사하는 것은 조금 다른 의미로도 받아들여진다. 비로소 시인은 현대사회의 일상적 관점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끈의 은유는 관계를 일종의 역학관계로 상상하게끔 만든다. 그것은 어느 한쪽이 더 우세할 수도 있고, 긴장이 지나치면 끊어질 수도 있다. 누군가는 그물처럼 수많은 관계를 독점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모든 관계를 끊어낼 수 있다. 이것은 살이나 피로 은유하는 관계와는 큰 차이가 있다. 이러한 관계는 “놓을 수 있다”는 것, 즉 근본적으로 중핵인 ‘나’의 존재에 비하면 외부적이고 부수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끈으로 은유한 관계는 살로 은유한 관계에 비해 쉽게 끊어낼 수 있으며, 그만큼 자아는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상태로 상상된다.


희미한 흰 것과 덜 검은 것 사이

인부는 흙을 골랐다 


오래 다져진 흙이 붉음을 완성하듯이

삽이 흙을 뜨고 뒤집힌 흙의 따뜻한 향


죽어서 다행이에요 흙 아래 유골함

흙의 기운을 감내하는 시간


흙을 채우고 두드리고 수평을 맞추고 두드리고

흙을 두드리고 밟고 수평을 맞추고 꾹꾹 밟고 


안 울어야 할까 얼굴이 손을 감싸고

표정 없는 인사 마지막 공연 정처 없음 소용없음


정처 없음이 소용없음으로부터 격리되고

나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아? 


흙이 쌓이고 꽃 한 송이들 한 사람 입주하고

이만하면 되었어요 지금까지 잘 한 날들은 무효


휴대폰이 울리고 궁금해 하지 마세요 돌아보고

돌아보지 마요 그대로 가요 인부는 삽을 흙에 꽂고 


똑같은 모양의 산 사람들 되돌아가지 않는 말들

당신은 내가 없는 장면에 내가 없다는 사실을 잊겠지


아침에 잠깐 빛나고 저녁에 잠깐 반짝이고 

아침에 있었던 일이 저녁에도 일어나고


계단식 정원에 꽃잎 하나 건너와 

둥근 꽃으로 피어나고  


―「공원묘지」 전문


물론 그의 시에도 머뭇거림은 존재한다. 흙의 빛깔은 말한다. 어떤 그리움은 아직 “희미한 흰 것과 덜 검은 것 사이”에서, 새하얗게 사라지지 않은 채 서성인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위 작품을 읽으면서 느끼는 혼란은 다음과 같다. 이 시의 화자는 죽은 이인가, 살아있는 이인가. 다시 말해, 애도받는 이인가, 애도하는 자인가. 위 시의 목소리에는 책망과 위로와 인내와 체념이 뒤섞여있고, 시점 또한 흙을 ‘밟는’ 위치와 ‘흙의 기운을 감내하는’ 위치가 번갈아 나타난다. 여러 진술, 예컨대 “돌아보지 마요 그대로 가요”와 같은 진술로 미루어볼 때, 이 작품은 죽은 이의 시점에서 쓰인 것으로 판단되지만, 명확하게 단정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이 뒤죽박죽인 혼란야말로 이 시의 진정한 목소리가 아닐까.

애도하는 자는 종종 자신을 잃는다. 슬픔에 잠겨, 그는 일상을 중단하고, 후회에 잠기며, 타인의 목소리와 몸짓을 회상하는 데 온정신을 바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애도하는 자는 타인에게 자신을 내어준다. 그는 애도하는 자의 입장에서 말하는 동시에 애도받는 자의 입장에서도 말하려는 자, 즉 두 개의 위치에서 발화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시인의 시가 애도의 완수로 나아가고 있다면, 죽은 이의 위치에서 “나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아?”라고 책망하거나 “돌아보지 마요 그대로 가요”라고 말하는 것이 이해된다. 애도를 완수하려 할 때 죄책감은 타인의 책망하는 목소리 또는 위로하는 목소리로 전이되는 것이다. 그 죄책감이 목소리의 혼란과 떨림을 만드는 것이다.

타인을 잊는 것은 때론 죄처럼 느껴진다. 이를테면 데리다는 애도를 완수하지 않는 상태야말로 윤리적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진실이지만, 때로 어떤 진실은 거꾸로 뒤집어서 그 양면을 살필 때 완성되기 마련이다. 애도는 자기 존재를 상실한 만큼 고통스럽다. 애도받는 자가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는 언젠가 “이만하면 되었어요”라고 말하지 않을까. 당신이 나를 잊게 되리라는 사실조차 괜찮다고 말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우리는 그런 사실을 떠올리며 애도를 지속할 때에 비로소 애도의 진실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시 「공원묘지」의 마지막 순간 무덤에는 ‘둥근 꽃’이 핀다. ‘둥근 꽃’은 얼굴이다. 그것은 죽은 이의 책망하거나 위로하는 목소리 대신, 오직 한 송이의 미소만을 간직하는 얼굴이다. 그것은 순환이다. 한 사람이 생을 마친 이후에도, 기억이나 얼굴처럼, 혹은 그 모든 것을 잊게 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남게 되는 흔적이다. 그것은 대화다. 흙이 닫히고, 발아래 굳어져서 이제 향기조차 남지 않아도, 우리 마음속에 상기되는 침묵이다. 자연은 냉담해 보일 정도로 수많은 생명의 침묵 위에서 꽃을 피우곤 한다. 반면 사람에게는 한 사람의 침묵 위에서 꽃을 피우는 것조차 어렵다. 그래서 ‘둥근 꽃’은 위태롭다. 그러나 우리는 매번 위태롭게 삶을 긍정한다. 그렇게 삶에 닿는다.





*박동억 2016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에 당선. 《시인동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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