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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호/특집/신동옥/인식과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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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신동옥
인식과 충격
- ‘시적 현실’의 문제에 대하여
1. ‘저만치’의 문제
소월과 만해는 자기 고백적 서정시로 한국 근대 시사의 출발점이 된다. 소월과 만해가 투사해 던진 시야에는 자연과 내면이 ‘한 몸’으로 딸려온다. 이 지점에서 소월과 만해는 서경(敍景)과 서정(敍情)의 동화라는 지점에까지 가닿는다. 현대적인 언어로 다시 쓴 그들의 서정시편은 전통 한시의 맥락 위에 놓여있는 셈이다. 소월은 1925년 《개벽》에 「시혼(詩魂)」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소월이 개진한 ‘리듬’에 관한 논의는 근대시에서 ‘호흡’을 리듬과 결부시킨 논의라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소월은 일찍이 ‘근대적인 몸’과 ‘호흡’이 언어에 결부되는 측면에 대한 안목을 보여준 것이다. 근래의 리듬 논의는 시에서 형태와 주체와 자아가 한데 결부되어 전개되는데, 이때 불규칙한 자모(子母)의 변화는 소월이 논한바 ‘혼의 몸’과 결부되기 때문이다.
소월의 ‘몸’과 리듬에 대한 논의는 물론 이론의 여지가 많다. ‘한국 근대시의 전통이 자기 고백적 서정시에서 기원하고 있다’는 주장은 이 지점에서 보다 자세히 검토될 필요가 있다. 먼저 소월과 만해로 특정되는 근대시인들이 내세운 자기 고백의 주체가 어떤 모습이냐는 점을 살필 필요가 있다. 그들이 투사에서 동화(액화)로 기능하는 ‘세계의 자아화’의 공식에 충실히 따르고 있다면, 자아는 어떤 모습이냐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윤식은 ‘배역시(Rollengedichte)’라는 볼프강 카이저의 개념을 빌어 1910년대의 시를 분석한 바 있다. 어떠한 특정한 페르소나의 입을 빌어 표현되는 시를 일컬어 배역시라고 부를 수 있고, 배역시는 1910~1920년대 초반 근대시의 주축을 설명하는데 유용한 틀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김윤식에 따르면 1920~1930년대의 시는 영미시의 전통에 보다 가까운 영향을 드러내는데, 이런 진단은 영미 이미지즘이나 상징주의의 영향이 습합된 근대 ‘모더니즘 시’의 전통을 설명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민요의 전통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장한 소월과 만해의 시는 분명 ‘음악’에 대한 명민한 자각을 시의 무의식적 요건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들의 시에 나타는 자아를 단순히 배역의 서정적 기능화에 기댄 시적 발화로 보기에는 미진한 복합성이 존재한다. 소월의 「진달래꽃」이나 만해의 「님의 침묵」의 시적 자아와 시인과 시적 주체의 모습을 해석해내는 일은 여전히 만만찮은 이론적 설명을 필요로 하는 구석이 있다. 소월과 만해의 시적 자아는 분명 ‘서정적 자아의 단일한 자기 표현’으로 읽히고, 때로 불분명한 ‘시인의 목소리’가 직접 드러나는 때에도 그것이 소월과 만해가 상정한 ‘어떤 주체의 목소리’가 외화된 표현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문제는 소월의 표현대로 ‘저만치’(「山有花」)다. 소월이나 만해의 ‘시적 주체’가 서 있는 ‘현실’의 자리는 투사하는 존재의 시야와 동화되는 현실의 그물망의 균열 지점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때로 만해의 ‘님 시편’에서 특정한 정동의 움직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저 익숙한 체념과 정한의 탄식, 삶과 자연에 대한 외경과 무상, 칠정이 바투는 내면의 고뇌 등등. 근대시는 ‘저만치’의 균열 지점에 선 시인의 어쩔 수 없는 현실 인식을 내장한 채로 상화, 영랑, 백석으로 이어지는 성가들을 들려주었다. 이 흐름은 ‘서정시’라고 통칭되는 ‘한국적인 정의’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 사실이다. 1950년대의 ‘모더니스트’ 김종삼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은 ‘꽃과 이슬을 노래한 시’다. 김종삼이 ‘꽃과 이슬을 노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추천을 거부당한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땅의 시사는 ‘세계의 액화’를 존재론적인 기반으로 두는 서정시 일반의 정의에서 유별나게 모더니즘 시사(詩史)와 (전통) 서정 시사의 대타적인 자리다툼으로 쓰인 것처럼 보인다.
2. ‘리얼’의 문제
2014년 지금 이 자리에서 ‘Real’을 시적 현실의 측면에서 논의할 때, 더구나 그것이 한국 현실주의 시사에서 참조항이 아닌 명제적인 정의의 차원과 관계될 때, 서정시사와 모더니즘 시사의 틈바구니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조지훈이 한국전쟁 이후에 전개된 시단의 모습을 다섯 가지 정도로 분류 하는 모습은 현실주의 시의 위치를 정하는데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고심이 있었음을 반증한다. 조지훈은 당시의 시는 첫째, 전통파의 율격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세련한 시인, 둘째, 서구시의 방법을 가져와 새로운 서정을 구사한 시인, 셋째, 문명과 사회적 모랄의 파토스를 담으려는 시인, 넷째, 지적이며 문명 비판적인 시인, 다섯째, 협의의 모더니즘 정통파로 나누고 있다. 이런 분류는 모더니즘과 서정시의 이분법적인 구도에 기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조지훈의 분류에서 첫 번째는 기왕에 익숙한 ‘자기 고백적 서정시’의 전통을 계승한 모습일 것이다. 둘째는 서정시의 자기 갱신이 나아가는 방향으로 이것은 ‘해외문학파’가 보여준 성취를 참조항으로 했던 식민지와 해방 직후와 그 이후의 시사의 모습을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이 둘은 참조점을 외부에 두느냐 내부에 두느냐에 방점을 찍은 모습이 다를 뿐 시사의 ‘서정시’의 주류와 그대로 일치하는 측면이 있다. 문제는 셋째에서 다섯째인데, 조지훈의 분류는 이것들은 모두 한데 묶어서 ‘광의의 모더니즘’ 일파로 나누었던 기존의 견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는 데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조지훈이 세 번째로 지적한 ‘문명과 도시와 사회적 모랄의 파토스’를 보여준 시인들은 언뜻 떠올리자면 김기림의 「기상도」와 같은 모습을 한 시일 것이다. 이것은 이후에 김준오가 1980년대 이후의 시를 ‘도시시와 해체시’로 분류했을 때, 바로 그 ‘도시시’에 해당할 테다. ‘협의의 모더니즘 정통파’를 제외하면 ‘지적이며 문명 비판적인’ 태도가 남는데, 문명과 지식의 에피스테메가 과연 작금의 현실주의 시사의 주제를 모두 포괄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 든다.
조지훈의 분류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1950년대까지도 시에서 말하는 ‘현실’이라는 개념이 ‘서정적 자아’의 (정신분석적인) 시야를 벗어나지 않는다 것이다. 이때의 현실은 그대로 ‘현실 오인’에서 기원한 자아의 내면의 모습들 그리고 그것을 개관하는 ‘현실 검증’의 장치로서의 기억 흔적과 관계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분히 정신분석에 기댄 이 분석이 유효하게 조지훈의 틀에 전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조지훈의 분석법이 ‘시적 개인’에 대한 정치한 분석에 머물지 ‘시적 실재’에 대한 물음까지를 아우르지 않는다는 점을 반증할 것이다. 요는 1950년대까지도 시사에서 ‘현실’에 대한 물음이 시적 자아의 ‘현실 검증’에 복무하는 결과로 해석된 세계의 ‘이미지의 부활’로 이행된 모습이라는 점이다. 이미지의 현실 검증으로 해석하자면 심지어 일군의 전쟁시 역시 단일한 자아가 바라보는 세계와 기억 흔적의 자리다툼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시사의 계보학과 분류법들은 현실주의 시사를 특정하는데 시작부터 ‘이데올로기’에 대한 배타적인 시각을 드러내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 있는 대목은 여기에 있다. ‘포스트’가 붙는 온갖 담론들이 횡행한 지금 남은 결론적인 참조항은 ‘텍스트를 벗어나면 거기에는 어떠한 현실도 없다’는 해체적인 담론의 위험성일 것이다. 물론 이때의 텍스트 역시 ‘확장된 담론’이라는 의미에서 기호학의 그물망에 걸려들 것이지만 말이다. ‘이데올로기’라는 단어 자체가 금기어가 된 냉전과 분단 치하의 나라에서는 ‘시적 현실’에 대한 현실주의적인 정의가 더불어 금기시 되거나 다시 이데올로기를 유도하리라는 것은 자명한 이치일 것이다. 이땅의 현실주의 시가 ‘신경향파’에서 ‘KAPF’와 그 이후로 이어졌다고 가정할 때, 이런 흐름은 분명 계몽주의와 이데올로기의 관계성을 계몽 일변도로 탈각시키기 때문이다.
페터 지마는 한스-요하힘 리버를 인용하며 이데올로기와 이론의 상관관계는 ‘계몽주의적인 전통’에 뿌리내린다고 말한다. 계몽주의가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계몽주의의 개념이 변주되는 만큼 사회 비판적인 이론과 현실 인식의 틀이 바뀐다는 것이다. 지마는 이데올로기와 이론은 항시 ‘언어적이고 술화적diskusiv인 구조’로 서로에게 제약을 가하고 있다고 말하고, 이 양자는 술화 안에서 불가분리성을 띤다고 정리한다. 이땅의 현실주의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살피기 위해서는 이런 전제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현실주의가 언어적이고 술화적인 구도 안에서 어떤 이념소ideologem들의 차이와 허위를 폭로하는데 기능하기 위해서는 계몽과 거짓 계몽되는 현실을 구분할 필요가 있을 것이고, 문학 가운데 시적 발화는 여기에 일정 기능을 담당할 것이다.
다시 지마를 인용하자면 “이질적인 집단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잠정적인 부분 합의가 하나의 집단어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주체간 합의보다 더 큰 인식적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홍승용이 1985년에 편하고 실천문학사에서 간행된 논문집 『문제는 리얼리즘이다』는 이 글의 주제가 지향하는 논의의 행복한 고투를 보여준다. 루카치가 자연주의에서 초현실주의 이후로 특징되는 이른바 ‘순문학’과 ‘전위문학’과 ‘통속문학’을 비판하면서 보여준 1930년대에서 1960년대에 이르는 논지의 변화는 나름 일관성을 지닌다. 거기에는 자국의 문학적인 유산에 대한 사회역사적인 분석틀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블로흐와 브레히트와 아도르노의 반론을 함께 읽으면 그것은 비단 표현주의와 아방가르드에 대한 ‘리얼리즘의 공격’에 머물지 않는다. 홍승용의 말대로 루카치의 문제 제기를 둘러싼 논쟁은 ‘이론이 현실과의 치열한 대결 과정’을 치르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런 대결은 비단 시나 문학을 넘어서서, 실재의 지식사회학적인 구성의 가능성까지도 확장되는 문제의식을 내포할 가능성마저 내비친다.
3. ‘실재’의 문제
앞서 ‘리얼’의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그런데 이 땅의 현실주의 시사가 처하는 곤경은 ‘시적 실재’의 문제가 현실주의 고유의 것인 양 치부되고, 이 곤경은 현실주의 시가 공박한 역사와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논쟁 국면에서 현실주의의 입론은 앞서 나눈 ‘자기 고백적인 서정시’와 ‘모더니즘 시’ 양자로부터 공박을 받는다. 적어도 어느 한 부분이 침묵할 때, 다른 입장과 번갈아가며 싸우는 식으로 논쟁은 이어져온 것이 사실이다. ‘리얼리즘 시 vs 자유시’, ‘리얼리즘 시 vs 모더니즘 시’, ‘리얼리즘 시 vs 서정시’의 구도가 각각 다른 층위와 입론을 가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시사는 이런 논쟁의 시작과 끝을 리얼리즘 고유의 문제로 치환해서 결론을 맺어온 것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이런 가정은 리얼리즘에 직접 이론적 자양을 제공하는 마르크시즘 비평의 문제의식이 이 땅의 시에 그대로 적용되기 힘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로이스 타이슨을 빌자면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비평적 문제 제기는 대략 다섯 가지 정도가 된다. 첫째, 문학작품과 (자본주의적·제국주의적·계급차별적) 이데올로기들의 관계 설정 문제, 둘째, 작품이 지닌 (자본주의적·제국주의적·계급차별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 가능성 문제, 셋째, 작품과 (자본주의적·제국주의적·계급차별적) 이데올로기적 대립 양상과 타협 양상의 문제, 넷째, 작품과 작품의 시대의 사회경제적 요건의 반영성의 문제, 다섯째, 종교 등 사회경제적 억압 기제에 대한 작품의 비판 가능성 문제. 이상의 문제들에서 중요한 지점은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적, 계급차별적’ 현실에 대한 인식의 시각 문제다.
일찍이 1920~1930년대에 KAPF 내부에서 진행된 일련의 논쟁들의 테제는 타이슨이 제기한 문제점들을 두루 아우른 논쟁들이다. 그러나 1935년 KAPF의 해산 이후에도 (어쩌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정치사회적인 현실과 문학적 현실, 또는 정치사회적인 실재와 문학적 실재 사이의 괴리는 좀처럼 그 간극을 좁히지 못했다. 특히 일제 강점기의 문학은 그 정도가 현실 인식이 아니라 ‘현실 개조의 당위’ 쪽에 무게가 실렸다. 이를테면 회월 박영희와 더불어 신경향파 문학의 장을 연 팔봉 김기진의 경우 그가 한국 문단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23년 1월에 발간된 「백조」 3호를 통해서다. 팔봉은 일본에서 ‘토월회’에 직접 관여했고, 귀국 후인 이 시기에도 ‘민중의 호흡이 제일 가까운 극장’에 관련된 일에 애정을 두었다. 팔봉은 「백조」 3호에서 문학과 극의 차이를 ‘活字로 주는 感銘과 直接 言語로 주는 感銘의 差異’로 나누어 설명한다. 물론 여기에서 팔봉이 선택한 쪽은 직접 언어로 주는 감명의 차원이다. 「백조」는 3호로 종간된다. 낭만주의적인 유미주의를 표방한 동인에 김기진이 가져온 충격은 동인지의 폐간으로 이어진 것이다. 김기진은 이후에 박영희와 더불어 1920년대 말까지 카프를 이끈다.
김기진의 행보는 당시의 문화사회적인 조건과 문학 작품과 작가의 의식과 작가의 비평적 태도 간에 발생한 낙차를 그대로 드러낸다. 팔봉에 비하면 이후의 카프는 점차 세련된 이론과 행보를 보여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현실주의 문학사가 보여준 유산에 대해 문학을 작가의 이론적 실체로 받아들이고, 작품을 그 이론적 실체가 구성한 ‘설명적인 구성물’로 전락시킨 것은 아닌가 하는 비판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한국 리얼리즘의 실질적 내용의 문제는 ‘시적 실재와 현실’인지, ‘시적 현실과 실재’인지에 있는 셈이다. 이 문제는 비단 어떤 비평적인 가치 판단이나, 문학의 사조나, 서정시의 갈래 내지는 유파에 관계된 문제가 아닐 것이다.
현실주의 또는 리얼리즘은 작품이 사회에 대해 참여의 형상으로 발언하는 메시지의 차원에만 관련되지 않는다. 더구나 그것을 시 안에서 드러나는 시적 주체의 목소리와 그 메시지로 한정할 경우에는 ‘시적 주체가 시적 현실에 대해 취하고 있는 태도(attitude)’로 한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에 대해 시적 주체가 취하는 태도의 문제로 리얼리즘과 참여의 문제를 환원하고 나면 문제가 되는 것은 화자의 목소리 또는 시적 자아의 (정치적) 무의식일 테니 말이다. 그 태도가 ‘저항적’일 때는 저항시로, ‘참여적’일 때는 참여시로 규정될 것이다. 실제로 1960년대 이후의 현대시사에서 리얼리즘 시의 다른 이름은 저항시이거나 참여시일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사정이 이럴진대 현대시사는 저항이나 참여의 문학적인 ‘굴절’의 당위성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역사의 시점에서 기능한 이데올로기적인 기능성과 논쟁점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민족’이나 ‘진보’와 같은 테제의 개념사적인 정의를 문학이 추수하는 경향으로 정리되는 사례들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민족문학이라는 개념 하나를 살피기 위해서는 한민족 문화의 전승과 단절 양상을 살펴야하고, 거기서 비롯된 수용과 배제의 과정을 살펴야 되고, 한민족 외부의 세계와 민족 내부의 개별자의 사정을 정치사회적인 조건 아래서 고려해야 하며, 마지막으로 한국어와 외국어의 층위를 무의식적 조건까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런 문제는 문학 사회적인 조직의 내부와 외부에까지 관련되는 방대한 주제가 될 것이다. 해방 직후의 논쟁이나 1980년대의 논쟁은 이런 사정을 여실히 드러냈다.
4. ‘새로움’의 문제
리얼리즘의 문제는 무엇이 리얼인가?에 다름 아니지만, 현실 인식의 구조적인 조건과 층위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현실에는 인간이 결정지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고, 그것들은 나름의 견고한 층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일찍이 마르크스가 통찰했듯이 그 가운데 가장 주효한 억압 기제는 이데올로기다. 이데올로기는 인간이 관여하는 모든 사회적 이해관계에 봉사하며 다시 인간을 옭아매는 ‘생각’의 다종다양한 변주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반영으로써의 허위의식 또한 문제가 된다. (정치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진정한 자신으로 존립하기 위해서 생각하는 주체인 인간이 스스로의 사고로부터 소외되는 양상이 바로 허위의식의 드러남일 것이다.
문제를 이렇게 보면 현실 인식의 문제는 이데올로기적인 허위의식의 문제가 되는 셈이다. 이때의 이데올로기는 이제 언어나 무의식의 차원과도 관계된다는 의미에서 훨씬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한국 현대시에서 이데올로기적인 현실의 정치사회적인 문제가 비로소 ‘시적 자아로서의 시민’에 내면화된 사건은 아마도 4·19일 것이다. 4·19는 정치사회적인 문맥에서의 자유를 순수라는 개념으로 탈각시켜서 전유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학생의 순수·정의 vs 이승만 정권의 부패·불의’의 구도가 혁명의 과정 내내 지속되었다.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운동사나 중남미의 모데르니시모가 공산주의 내지는 무정부주의와 결합하고 직접적인 행동으로 나아간데 반해, 4·19 이후 한국 현대시의 모더니즘에서 전유한 ‘순수’의 개념은 정치적인 의미가 거세된 ‘자유시’로 나아간다. 그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자유와 순수를 동시에 궁구한 사례를 기껏해야 김수영 정도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면 과격한 주장으로 읽힐 것인가.
신동엽은 1961년 3월 30일에서 31일에 『조선일보』 지면에 「六十年代 詩壇 分布圖-新抵抗詩運動의 可能性을 展望하며」라는 글을 발표한다. 신동엽은 개개의 시인이 처한 사회적·역사적 기반에 충분한 고려를 문학 비평의 ‘상황의식’의 척도로 제시한다. 신동엽은 시단의 분포도를 크게 두 갈래로 나눈다. ‘하나는 시정적인 생활, 사회적인 현실에 重濁한 육성으로 저항해 보려는 경향의 사람들, 또 하나는 예술지상주의적 경향에 몸적신 사람들’이다. 신동엽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쪽은 물론 후자의 경향이다. 그는 시의 경향을 다시 다섯 갈래로 세분해서 설명한다. 첫째, ‘향토시’, 둘째, ‘현대감각파’, 셋째, ‘언어세공파’, 넷째, ‘시민시인’, 다섯째, ‘저항파’. 신동엽은 향토시, 현대감각파, 언어세공파를 ‘귀족풍’으로 규정하고 전후 10년간 한국 현대시를 지배한 이들은 이들이 주름잡은 아카데미즘에 기원한다고 진단한다. 일개 시민시인이 가진 ‘도시적 지식인감성의 제한된 울타리’를 넘어서야 한다고 말하며 신동엽은 그것이 역사사회적인 요청이라고 말한다. 요는 ‘李朝적인 病斑의 延長인 咏嘆文化’와 ‘歐美 植民勢力의 문화’를 한꺼번에 떨쳐야한다는 것이다.
여태까지 신동엽과 김수영은 ‘문학과 정치’와 같은 주제가 등장할 때 논의의 출발지점에 놓인다. 이들의 문제의식이 그만큼 선구적이었다는 반증일 테다. 허나 신동엽의 진단은 1961년 당대의 입장에서 돌아보아도 그리 세련된 주장은 아니다. 4·19 이후 모더니즘 시(신동엽의 분류에서 언어세공파와 현대감각파와 시민 시인 일부일 것이다)가 제몫으로 가져간 (자유의 윤리적인 요청이 거세된) 순수와 전통 서정시(향토시와 시민 시인 일부일 것이다)가 제몫으로 가져간 순수는 현실주의 시의 주제가 되지 못했다. 신동엽이 놓친 부분은 순수와 자유의 이질적인 투쟁과 변증법의 지점에 있다. 그것은 김수영의 사변에 가까운 어지럽고 난삽한 시론을 현실주의 시사의 다른 참조점으로 끌어들이게 한다. 이로써 김수영과 신동엽은 50여년이 지난 지금 이 자리의 ‘시적 현실’의 문학사적인 논쟁점의 첫자리를 차지하기에 이른다.
1960년대의 현실주의 시문학사가 놓친 부분은 아마도 신동문이 지적한 ‘감각의 리얼리티’ 차원일 것이다. 분명 한국 리얼리즘 시사는 현실과 역사사회적 조건을 당대라는 차원에서 결곡하게 들여다 본 결과이자 쟁투의 산물이다. 그러나 한편 그것은 ‘진정한 적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으로 현실을 들여다본 결과로 편협한 시각을 그대로 노출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칼 슈미트의 표현에 따르자면, ‘절대적인 적’과 ‘실제의 적’을 구분하는 복잡다단하고 지리멸렬한 쟁투의 차원으로 논의를 한정한 것은 아닌지 되묻게 된다.
2014년 지금 이 자리에서 읽을 때 1980년대에 쓰인 박노해의 「손무덤」이 던진 메시지의 충격과 황지우의 시편들이 던진 전위적인 메시지 전달 방식의 충격은 다소 무딘 지점에서 문제점을 노출하며, 한편으로 당대를 넘어서는 보편적인 ‘인식의 충격’을 질문으로 던지기도 한다. 그것을 2000년대를 한참 넘어선 지점에 쓰인 진은영의 「1970년대산」과 같은 시와 1960년대의 김수영, 신동엽의 시는 물론 1946년에 노농사에서 문학가동맹 계열의 전위시인들이 주축이 되어 발간한 『전위시인집』과 나란히 놓고 읽으면 문제의 지점은 한층 선명해진다. 이제 ‘적’의 존재 유무와 행동 방식과 반경을 물을 때가 아니라는 점이다. 문제는 문제의 향방이 아니라, 문제의 존재 자체가 될 테니 말이다. 테리 이글턴을 빌자면 그것은 자유의 운명과 의미를 가늠하는 문제다.
자신의 기획을 아무 저항 없이 실현하기 위해 절대 권력은 세계에서 의미를 모두 배출시킨다. 그러나 의미 없는 세계는 사실 정복할 가치 역시 갖지 않는 세계이며, 따라서 자유는 자기 스스로 무가치한 것으로 만든 실재 위해 군림해야 할 운명에 처하게 된다.
- 테리 이글턴, 서정은 옮김, 『성스러운 테러』, 생각의나무, 2007, 146쪽.
*신동옥 : 1977년 전남 고흥 출생. 2001년 《시와반시》 등단. 시집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 『웃고 춤추고 여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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