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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호/신작시/김점미/피카소와, 그 오후를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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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김점미
피카소와, 그 오후를
그가 불렀다 이미 오래 전부터 친숙하고 다정한 하얀 손의 터치 형태가 부서진 린넨 천 위에서 시간을 돌려 세우고 바라보는 애틋한 시선 속에서 뽑아낸 명주실. 중요한 건 모사가 아니라 새로운 형태라고 널브러진 선들 가득한 아틀리에. 예술은 날카로운 칼날에 베어 나갔지만 우리는 상처를 꿰매고 봉인할 능력을 가진 자들. 느끼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자들의 공간 한 켠에 들여놓은 각자의 봉방. 모든 가능성과 실험이 있었고 방방의 고통과 심연이 자욱했던 시간으로 그가 불렀다 각진 유리 집 모퉁이 같은, 눈에 잡히지 않는 파장들의 거리에서 동물원 우리 밖을 갈망하는 슬픈 눈동자가 뿜어내는 처연한 명주실 같은 그리움으로 한숨 깊은 석양이 지나갔다 살과 피를 하나씩 흩뿌리면서 형태를 지탱하던 선들도 뽑으면서 커다란 아날로그의 뼈다귀 하나만 남은 그가, 그가 나를 불렀다 시계태엽이 한 세기를 되돌아갔다 재깍재깍 되돌아간 시계 바늘은 절망적인 눈빛으로 우리들의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인의 일요일
몇 년 전부터
시끄럽게 울려대던 전화벨 소리 사라지고
하루 종일
누구로부터도 누구에게도
일상의 소통은 닿지 않아
생각의 화살이 쏟아져
심장을 겨눈 채
때로는 피가 때로는 환희가
머리 밖으로 뛰쳐나와
날이 좋으면
이런 게 인생이지 하며
혼자 걷거나
닫혔는지 닫았는지 모를
적요의 시간 속은
평화이거나 공포이거나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에 놀라
나뭇가지 위에서 노래하던 새들 후다닥, 날아가고
새가 떨친 여린 잎 하나
내일과 함께 빙빙 돌아가고
노는 아이들 소리가
간간히, 창틈을 벌여놓곤
홀연히 사라졌을 때
벽에 걸린 뷔페의 파리 풍경
파리가 나치에 점령되었을 때부터
사람이 사라졌다는 그의 그림
깊은 슬픔은 눈물 대신
침묵을 택했지
벽이 동굴보다 깊어진
태생이 고독한 시인의 일요일은
한적한 침묵의 절망인가
절망 속의 평화인가
*김점미 : 부산 출생. 2002년 『문학과 의식』으로 등단. 부산대 독어교육과 및 동대학원 졸업. 한국 해양대 유럽학과 박사과정 수료 후 독일에서 1년 동안 지냄. 현재 부산남고등학교 교사. 부산작가회 회원, 시인축구단 글발 회원, 한국시인협회 회원. 시집 『한 시간 후, 세상은(2013)』, 글발공동시집 『사랑을 말하다 (2005)』,『토요일이면 지구를 걷어차고 싶다(2012)』.)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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