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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호/김수자/선인장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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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김수자
선인장
섣달그믐 캄캄한 사막 같던 길 아득히 홀로 더듬거리며
물 한 방울도 모래알처럼 목을 넘기지 못해 쓰러질 때
소리쳐 부른 이슬 한 방울의 생존본능 같은 사랑이었다 해도
언제나 그 순간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습기 모금은 바람 한 올 늦지 않게 불어 와 주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
지나간 길에는 더러 마음에 드는 길도 있었다고
그렇다고 그 길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거라고
엊저녁 그대에게 한 말이 자꾸만 가시 걸리는 아침입니다
못 생겼다는 이 말
못 생겼다는 이 말……요놈 요놈 요 미운 놈……이쁘고 사랑스러움이 넘쳐 더 이상 다르게 표현할 수 없을 때……
차라리 밉다고 못 생겼다고 그래버리는 것처럼……당신 참 미운 당신…….말로는 뭐라고 타나낼 길이 없을 때……
지상의 말이 깡그리 답답할 때……차라리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역설의 이 말……그리움의 극점까지
이를 수 있는 이 말……
……당신 참 못났네 그려
땅을 마련하다
부엽토 마사토 한 자루씩 사고 야산 밑의 흙도 한 자루 퍼 와
방울토마토 상추 오이 고추 들깨의 작은 영토를 마련했어요
드넓은 세상에 한 뼘 자투리땅도 없이 플라스틱 박스며 재활용 그릇들에
한 포기 풋것들을 모종하는 아침, 고 앙증맞은 연초럭 탱글탱글한 꿈들에게
한 뼘 땅을 내어 주고 더 이상 갈 데 없는 기다림은 허공에 심습니다
그 말의 꽃
좋은 아침입니다
솔향이 묻어나는 오늘 아침 인사를 따라가다 보니
스물 한 살의 나를 만납니다
회식자리에서 받아 든 칵테일 한 잔이 생각나,
체질적으로 술이라곤 입에도 못 대던 내게
술이 아니라며 쥬스와 마찬가지라고 건네주던
진토닉 한 잔
고향 뒷산에 울울창창했던 잣나무 숲냄새 같아
가을이며 잣송이 수북하게 쌓여있던 뜨락에
조심조심 나무망치로 딱딱한 껍질을 깨
고소한 알갱이를 건네주시던 아버지의 냄새 같아
사당동 버스정류장 앞
작은 카페 구석진 자리에 홀로 앉아
모기만한 소리로 주문하며 어색한 듯 오목하게 몸을 조이곤
한 방울 두 방울 목을 넘기던 진토닉 향기
그 한 잔에 몽롱해져
집으로 가는 골목길이 고향 하늘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아
기분 좋게 휘청이는데
'거 물 좋게 생겼다' 는 지나는 남정네의 말에
화들짝 놀라 갈지자로 달리던 진토닉 향기
물 좋게 생겼다는,
오래 발효한 그 말의 비밀이 솔솔 풀어지는
오늘 아침, 나의 스물 한 살이 다시 말꽃으로 피었습니다
개화에 대한 기억
그 담장 아래를 가 보아도 아무 기척이 없어
낯익은 듯 처음인 듯
또 다른 세상으로의 길이 열리던 순간의 흔적이
아직 보름달처럼 환한 웃음으로 서 있어
그 때 다녀간 게 분명해
초록 넓은 잎사귀로 가만가만 등 다독여 주던 나무
그윽한 눈동자로 사랑노래 불러주던 나무
한여름에 서늘하도록 황홀한 그늘을 펼쳐주던 나무
마흔아홉 개의 심장을 쿵광거리며 힘껏 안아주던 나무
이름할 수 없는 그 순간의 예감이 환하게 열려 있어
오늘도 다녀간 게 분명해
*김수자 : 충북 진천 출생. 2006년 문학시대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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