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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신작시/최상임/빙어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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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최상임
빙어
지구 좌표 어디쯤 점 하나로나마 찍혔을까?
삼한시대부터 있어왔다는 저수지
얼음으로 봉인을 해제한 세상으로
물길 익히러 나온 빙어들
푸르게 풀려온 낚싯줄에
살짝 반응한다는 것이 그만
우주가 기우뚱했다
맛의 실체는 중요하지 않아
걸리면 뼈도 못 추리는 저 입들!
간혹 입속으로 들어가며
마지막 꼬리 힘으로
팽팽하게 물비늘을 털어보기도 하지만
무게가 없는 허공은 틈이 없어
언제나 물살을 관통하고 무수히 떠 있는
저 눈부신 통로를 무사히 건너야 하는
겨울 저수지에 둥글게 갇힌.
슬픈열대*의 방
지난 겨울 얼어죽은 줄 알았던 뿌리에서
늦게 돋은 담쟁이는 흐린 담벽을 천천히 기어간다
세탁기가 마지막 탈수에 원심의 사력을 다하는 동안
오래된 슬픈열대를 읽는다
늦은 아침을 먹고 방으로 들어간 어머니
기척이 없다
화들짝 놀라 가만히 방문을 열어 살펴보니
목줄기 부근에서 이불이 가볍게 달싹인다
나이테 무늬 선명한 장롱을 향해
젖 물리던 자세로 누워
이승에서 빠져나갈 동굴을 말아 웅크렸다
힘겹게 배꼽 부근에 코를 묻고
유실된 문자의 신음을 쿨럭쿨럭 부려놓는다
“내가 처음 너희를 안았을 때
너희는 양 손바닥에도 차지 않았다
너희는 한 순간도 나의 비방 없이는
늘 입지도 먹지도 못한 포만감으로 보챘다
나는 남김없이 주었으며
밤마다 잠을 덜어 마지막 길을 내 주었다
이제 나는 늙었고 너희는 무럭무럭 자랐다
너희 두 손은 늘 움켜쥐기에 바빠
텅 빈 집에 나를 버리고 떠났다.“
제 것 남길 줄 모르는 마지막 어머니족이
외로움의 인플루엔자에 감염되어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창문 너머 나비 한 쌍 수직의 춤을 추고
기억에 갇힌 풍경 속으로 장맛비 내리겠다
*레비스트로스의 저서.
*최상임 : 충북 제천 출생. 2011년 ≪시와경계≫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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